◈75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69)
‘손이 풀어진 것까지 티 낼 필요는 없지.’
저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마지막 천이 찢어졌다.
나는 손가락을 꾹 쥐었다가 폈다. 손에 피가 안 통해서, 일어나려면 저린 팔과 다리를 풀어두어야 한다.
“언제든 가능하게 만들어두었습니다.”
“고생했네, 로룬의 신도.”
“아닙니다. 모든 신도들이 애써 준 덕분입니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쾅, 쾅쾅! 문이 세차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 아래, 좌우, 총 여덟 방향에서 문이 열리더니 그 문으로 각기 한 사람씩 혹은 두 사람씩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 희미한 빛 덕에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가장 크고 커다란 문에서 들어온 사람은 나도 익히 보았던 개새끼, 로알이었다.
“오셨습니까, 두 번째 대신관이시여.”
나를 보고 비웃었던 노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의 눈에서 로알과 같은 황금색 아지랑이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황녀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시는군요.”
로알이 작게 끄덕였다.
“과연 대단한 힘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미리 주술진을 준비하여 다행이군요.”
“예. 저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심지어 그 대단하신 황제 폐하께서 몸소 납셔도 말이지요.”
작은 웃음소리가 노인과 노인의 옆에서 들렸다.
“준비가 모두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시작할까요?”
로알이 싱긋 웃었다.
잠시지만 그 느끼하고 음침한 눈이 내 쪽을 향하더니 더욱 깊게 휘어졌다.
마치 일어났냐고 묻는 것 같은 시선,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
나는 입 안쪽을 꽉 깨물었다.
‘스킬 쿨타임은 얼마나 남았지?’
빙의가 남발할 만한 스킬은 아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안 쓸 수가 있겠어?
[이런, 스킬 ‘빙의’의 쿨타임까지는 아직 3시간이 남았어요! (╯•﹏•╰)]
가슴에서 희미한 두드림이 느껴졌다. 엠버넷 씨였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영혼 ‘엠버넷’이 소멸을 각오하며 힘을 빌려주겠다 선언합니다! 스킬 쿨타임이 줄어듭니다! 쿨타임 종료까지 3분 남았어요!]
‘엠버넷 씨…….’
나는 치맛자락에 땀을 닦으며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고마워요. 도움, 잊지 않을게요.’
그녀에겐 정말 미안했지만 지금 사정을 가릴 처지가 되지 않았다.
황족들은 어디까지 알아냈을까? 여기가 어딘지는 알까?
분명히 어딘가에서 추적하고 있을 것임을 믿었다.
2황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친다. 능글맞기 그지없던 황태자와, 이제는 그저 서툰 아빠였단 걸 알게 된 황제의 낯까지.
‘그래, 댁들이 진정 육아물 가족이라면…….’
아니.
‘래빗의 가족이라면, 증명해! 이깟 시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시간은, 내가 벌어 줄 테니까.
“모두 오늘을 기립시다, 이 영광의 날을! 위대한 그분의 힘을 받은 황녀님께서 우리의 동료로서, 그분의 손과 발이 될 위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시는 날을!”
염병, 뭐가 어쩌고 어째?
난 슬그머니 발을 모았다. 무릎을 접어 앉는 내게 관심을 보이는 자는 없었다.
뚝, 바닥으로 다시 피가 떨어졌다.
건강 수치는 어느새 27까지 떨어졌다. 괜찮아, 이 정도면 움직이는 데는 문제 없어.
납치당하는 퀘스트를 억지로라도 수락해 보상으로 받은 건강 수치가 이 순간엔 도움이 되었다.
이 자리에 나타난 신관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개중 가장 화려한 옷을 걸친 건 로알과 옆에 서 있는 자, 그리고 가장 먼저 나타났던 노인이었다.
“손을 들라!”
노인이 신호하자 모든 이들이 하늘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래빗이 쓰러진 바닥에서 빛이 샘솟더니 반투명한 공간을 만들었다.
래빗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쓰러진 채였다.
“자, 모두 힘을 합칩시다! 오늘 이곳에서 위대한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로알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쫙 찢어지듯 펼쳐진 미소에는 광신도의 광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뜻에 따라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순정한 힘을 가진 종을 얻을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지 않으며, 오, 거스르지도 않는!”
뭐?
“우리는 이제 오래전 ‘성녀’를 잃었던 것처럼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대한 그분의 인형을 얻을 테니까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동시에 신관들에게서 빛이 터져 나왔다.
대신관의 눈동자에 깃들었던 것과 똑같은 황금색 빛이었다.
빛 주변으로 래빗을 덮쳤던 새카만 연기가 휘몰아치며 래빗을 감싼 반투명한 결계 안쪽으로 스멀스멀 들어가기 시작한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엠버넷 씨! 당신의 능력을 마음껏 보여 주세요! 어떤 커다란 대가를 치른다 해도 황녀님을 꼭 구할 테니까!’
수사슴처럼 땅을 박찼다.
이 순간 이 공간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사나운 맹수가 될 힘이 필요했다.
래빗, 우리 아기 황녀님에게 닿을 힘을!
‘한 점 후회 없이 싸우기 위해선 아이템 하나 정도는 써야 제맛이지. 요정!’
[퀘스트(서브) 보상 아이템 ‘사이렌 오더’의 ‘강화 주문서’를 사용하시겠어요?]
[아이템 강화 주문서(히든)Ⅱ - ‘사이렌 오더’용
효과: 아이템 ‘사이렌 오더’의 강화를 돕는 재료, 강화 시 능력이 추가된다.
추가되는 능력: 책 속 인물에 대한 공감 및 이해 능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당신은 때로 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곧이어 내 팔찌 ‘사이렌 오더’에 기능이 추가되었단 알람이 떠올랐다.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수많은 시선 속에서 뛰어가기 바빴으니까.
[스킬 ‘빙의(lv.3)’가 활성화됩니다!]
[경지의 깨우침으로 스킬 레벨이 올랐어요!]
[기사 ‘엠버넷’의 능력치가 재조정됩니다. B급->A급]
[5분간 사용 가능합니다! ※남은 시간: 04:58]
내 안으로 어떤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사이렌 오더의 추가 기능으로 보게 된 ‘엠버넷’ 씨의 모든 기억이었다.
“존경합니다, 위대한 황제 폐하시여.”
소녀의 모습으로 수없이 공을 세우는 황제를 보며 동경을 품은 소녀 기사.
“저는 당신의 영원한 기사가 되겠습니다.”
오래도록 강인한 등을 따르던 호위 기사.
그리고 눈감으며 흘린 마지막 눈물까지.
“폐하, 신은 죽어서도 폐하의 행복을 바라겠습니다.”
‘엠버넷 씨, 이번엔 저도 그 길, 함께 가겠습니다.’
우리 래빗 황녀님, 이제는 행복하게 꽃길만 걸으셔야지.
“마, 막아라!”
“신성한 의식을 방해하지 못하게 막아!”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제일 가까이에 있던 노인과 그 주변에 있던 신관들이었다.
“으아악! 어, 어서 나서란 말이다!”
이들의 외침을 듣고 하얀 갑주를 걸친 이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쾅!
내 손에 들려 있던 돌이 새하얀 기를 뿜으며 빛의 검이 되었다.
나와 부딪친 기사 셋이 그대로 튕겨 날아가자, 모두가 일순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신중하게 나를 살폈다.
“포위한다!”
“예!”
다행히도 노인이 경계하느라 손을 내리면서 래빗에게 다가가던 검은 안개의 속도가 줄었다.
나는 또 한 명을 쓰러트리며 달려갔다.
‘빈틈!’
일단 결계 속 기절한 래빗을 깨워야 한다!
‘래빗이 일어나면 상황은 지금보다 나을 거야.’
[요정의 팁! ٩(๑•̀ㅂ•́)و ‘빙의’ 스킬 레벨 4부터는 건강 수치를 제물로 지속시간을 늘릴 수 있어요!]
당연히 바쳐야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당장 바칠 때니까 빨리 늘려!”
[지속시간 종료 후, 건강 수치가 소모되어요!]
적진의 한복판답게 무수히 많은 기사들이 나타났다.
나는 이 수많은 적을 앞두고서야 엠버넷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기억이 고요하게 몰아쳤다.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단 한 번 진 적이 없는 로아타의 이름 없는 검. 모든 공을 황제의 이름으로 올린 자.
“당신께서는 아주 위대하신 분이셨고, 저는 한낱 당신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요.”
처음 나타났던 때 했던 말은 그녀를 소개하기에 너무나 부족하고 겸손한 말이었다.
“얼른 막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이냐!”
달려오던 이를 막고, 쓰러트리고, 때로는 공격을 흘려보내는 동시에 신관들을 향해 던져 버렸다.
틈을 파고들고 또 파고들고……. 얼마나 파고들었을까.
나는 결계의 앞에 다다랐다.
[현재 스킬 ‘빙의’ 지속을 위해 건강 수치를 소모 중입니다! 남은 건강 수치: 18]
뒤쫓아온 이들이 검을 뻗기 전에 나는 결계로 손을 뻗었다.
쾅! 검은 번개가 내리치며 내 손을 튕겨냈다.
“로알 대신관님!”
“그냥 두세요.”
드넓은 공간으로 로알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러나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어느새 안개가 거의 래빗에게 닿을 듯했으니까.
-‘저것’이 폐하께 닿아선 안 됩니다!
엠버넷이 내 안에서 강력하게 경고했다.
‘알고 있어요!’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다. 퀘스트 문구에서 보았던 ‘주인공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
그건 이 불길한 결계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확실했다.
엠버넷의 검과 결계가 충돌했다.
맞부딪힌 곳에서 스파크가 일어나 뺨과 팔 쪽으로 튀었다.
베이는 소리가 들린 것 같더니 꿰뚫은 듯한 상처가 생겼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발짝 다가갔다.
“래빗 황녀님!”
애타게 부른 효과가 있었던 걸까, 래빗이 스르륵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