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71)
그 뒤로 상황은 일사천리였다.
황제 프란츠는 실종된 래빗을 찾기 위해 무려 황실 기사 전체와 수도군을 직접 움직여 신전으로 향했다.
이 같은 결정은 정치적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을 뿐 아니라, 이후 수습할 때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정되어 있었다.
관점에 따라서는 최악의 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도 내 대신전엔 무려 대신관이 세 명이나 있던 상황.
죽은 이를 제외하면 웬만한 부상과 병은 대부분 치료가 가능하며 전 대륙을 통틀어서도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희귀한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자칫 제국을 제외한 전 대륙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작정이라도 한 듯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심지어 신전 안으로 진입할 때는 무력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 사실이 시민들 사이에 전해지면 필시 수도 치안과 민심에도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칠 것임에도.
“내 딸이 납치당했다.”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하였으나,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가는 황제의 모습은 마치 예언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황녀가 대신전 지하의 음습한 제단에 갇혀 있었음이 알려졌을 때, 온 수도가 경악했다.
이때다 싶어 신전 측에 아부하기 위해 황제를 비난하던 귀족 세력도 재빠르게 입을 닫고, 후환을 두려워했다.
소리 없는 퍼지는 소문 사이에서 구출된 황녀가 황성의 거처로 돌아가기까지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황녀는 안전하게 돌아왔다. 그러나 황녀가 무사히 돌아왔음에도 황성의 분위기는 흉흉하다 못해 최악이었다.
“무어라? 허, 어렵다?”
“네, 그렇습니다.”
황제에게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현재, 극악무도한 황녀 납치극의 주범인 신전에 책임을 묻고 있어야 할 황제가 여기, 한 영애를 치료하는 자리에 있는 까닭은 이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짐은 네게 살리라고 했다.”
바로 아기 황녀를 구하다 중태에 빠진, 이번 황녀 구출의 최고 공로자 달린 에스테를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치료가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황제의 앞에 우뚝 선 이는 태양처럼 밝은 금발을 가진 몹시도 아름다운 남자였다.
그러나 얼핏 졸린 듯 보이는 푸른 눈이 그의 인상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는 대마법사 발데르였다. 현재 마법사의 탑 주인이기도 했다.
“저 영애를 치료하려면 음, 마법과는 다른 좀 더 본질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폐하.”
“…….”
“이를테면 마법은 찢어진 근육을 붙이고, 피부를 재생할 수 있지만…… 저 영애는 그런 수준을 넘어 ‘생명력’ 자체가 다했습니다.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발데르가 반쯤은 졸린 듯한 나긋나긋한 투로 설명했다.
“방법이 없다?”
“음, 굳이 따지자면 신관이 쓰는 힘이 제일 적절하겠습니다…….”
그쪽에서 벌인 일로 수도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 아무렇지 않게 신전을 언급하는 것도 대단했다.
“짐은 그딴 대답을 듣자고 그대를 부른 것이 아니다.”
협박조로 변한 황제의 음성을 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도 극소수였다.
“하지만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한데…… 괜히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시간에도 시시각각 저 영애의 생명력이 고갈되고 있습니다.”
발데르는 자신이 그중 하나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혀 겁먹은 기색 없이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결국 발데르는 그대로 물러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가기 직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폐하, 참 이상합니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나 같은 것이 저 영애의 몸을 감싸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추이로 보면 약 한 시간 정도면 모두 소모될 것 같습니다.”
그건 마법에 있어 경지를 초월한 자의 조용한 선고였다.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저 영애는 사망에 이를 것 같군요.”
발데르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마법사는 호기심으로 생을 사는 존재. 그런 그에게 미지의 힘이란 없던 흥미도 솟구치게 했다.
그녀가 살아남기만 한다면 꼭 한번 다시 봐야지, 발데르는 느릿느릿하게 생각하며 그대로 물러났다.
래빗은 이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 황녀님. 마지막으로 부탁. 절 꼭 한 시간 이내로 치료해 주시기……에…요.”
어쩌면 이미 알고 있던 걸까?
죽음을 앞둔 사람은 운명의 힘으로 자신의 끝을 짐작하기도 한다. 달린 역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석연치 않은 점도 있었지만 래빗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못 보냬.”
사실 자신도 치료가 필요했지만 래빗은 단호히 거부했고, 그런 래빗을 강제할 사람은 적어도 이 황실엔 없었다.
누워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눈앞의 이 사람을 제외하고는.
래빗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제.”
그리 넓지 않은 방, 래빗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작았더라도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은 래빗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을 터였다.
“나는…….”
래빗이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 래빗에게는 큰 결심이 필요했다.
오래전 그녀가 너무나도 아끼던 제국 펠프스는 이 나라의 손에 멸망했다.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병에 걸려서, 늙어서,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그렇기 때문에 지키지 못했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마지막을.
“이제, 당신울…….”
제국이 미웠다. 그를 닮은 사람이 미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행동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원수 같은 나라에 태어난 걸 원망하다 체념하며 그저, 지난 생에서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의 마지막을 평생 곱씹음으로써, 후회와 과거 속에서 이렇게라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믿눈다.”
래빗은, 로아타는 과거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아이는 환생해서도 모든 걸 잊지 못했고, 기억은 발을 붙잡았다.
그러나 전생에 틀어박힌 채 살아서 현생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할 거라면, 더는, 전생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나는 태어나소 단 한 번도 ‘신성한 힘’을 쓴 적이 없댜.”
래빗이 황제 프란츠를 향해서 말했다. 래빗 쪽에서 먼저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은 어쩌면 이번이 처음인지도 몰랐다.
“당신운, 아직도 내가 ‘금지된 신성력’에 댱했다고 믿고 있나?”
“믿는다.”
“이 말울 둘으면 내가 더 이상하게 보이겠지먄…….”
“이상해도 상관없다.”
부녀의 시선이 교차했다.
“네가 원하면 그에 대해 더는 묻지 않겠다. 아니, 평생 말하지 않아도 좋다.”
“…….”
“잃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음을 알았으니.”
래빗은 문득 황제 옆에 서 있던 황태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래빗은 조그만 주먹을 꾸욱 쥐었다.
“신성한 힘운, 달린울 위해 쓰게따.”
마침내 래빗은 과거에, 그리고 무너져 가던 조국에 안녕을 고했다.
어쩌면 그날 죽은 이들은 래빗이 이렇게 살길 바라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래빗의 조그만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래빗은 곧 침대로 다가갔다.
달린의 옆에는 새하얘진 얼굴의 라이칸이 앉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둘만 있고 싶댜.”
래빗이 청하자, 라이칸과 나머지 사람들이 조용히 방을 비워주었다.
고요해진 방에서 래빗이 고개를 돌렸다.
새액새액 숨을 내쉬는 달린은 힘겨워 보였다. 래빗은 달린의 손가락을 꾸욱 잡았다.
“달린, 네 말대로 나눈 전생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 그롤 필요가 없댜.”
마주 잡은 손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신관들이 썼던 빛과는 다르게 래빗이 일으킨 신성한 힘은 찬란한 은빛이었다.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네 말대로 나눈 이제 현생을 살 테니…… 제발 돌아와랴.”
달칵.
달린도 래빗도 듣지 못하는 한 조각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누군가는 원작이라고, 다른 누군가는 운명이라고도 부르는 태엽이자 거대한 세계의 부품이었다.
“뭐든 좋댜, 내 모둔 능력울 쏟아부어도 좋우니까, 제발 살아랴…….”
래빗이 일으킨 은색 빛 위로 은은한 푸른색이 얹어졌다. 로아타 황제의 힘이었다.
래빗은 뭐든 좋다는 심정으로 힘을 끌어모아 달린에게 전했다.
간절한 마음이 통했던 걸까?
래빗이 이 모든 것을 끝냈을 때, 달린은 비로소 정상적으로 숨을 쉬었다.
래빗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호흡과 심장 박동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온몸의 타박상과 팔의 깊은 상처가 말끔히 나은 뒤에도.
달린은 장장 2주간 깨어나지 못했다.
* * *
예전에 누가 물어본 적 있었다.
로판을 왜 읽냐?
거기다 대고 뭐라고 했더라. 일단은 되게 쓸데없는 걸 본다는 것처럼 쳐다봐서 기분이 드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적당히 사회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대꾸했던 것 같은데.
“뭐가 재밌냐니까?”
“응, 엿이나 먹어.”
사실은 니가 맨날 말하는 그 겉멋만 든 이야기보다는 훨씬 재밌다고 대꾸하고 싶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