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81화 (81/281)

◈81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75)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계약결혼물’이다.

‘계약결혼물’이란 무엇이던가.

시작은 계약에 의한 결혼이었으나, 선결혼 후연애를 거쳐 진정한 부부가 되면서 해피엔딩.

그 과정에서 너도나도 누가 봐도 쟤네 사귀는 것 같지만 아냐, 사랑하는 건 아니야! 지독한 입덕 부정기를 한 번씩 거치며. 대화 한 번이면 바로 풀릴 오해도 좀 하고.

독자는 물론 주변인들까지 다 아는 사실을 유독 주인공들만 모르고 헤매는 걸 지켜보는 재미, 모든 게 계약 때문이라고 우기는 장르 아니겠는가.

‘그랬는데…….’

문제는 그 부부를 시작해야 할 여주인공 ‘지젤’ 님께서 탈주하셨다는 거다.

혹시 이 언니, 전생에 나뭇잎 마을 출신이셨나.

래빗이 주인공이었던 《제국의 아들부잣집 막내딸》이 그러했듯이 이 소설 역시 작품의 간략한 내용만 조금 기억이 났다.

차분하고 똑똑하며 천재적인 두뇌로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여주인공 지젤.

그러나 집안의 강요로 나이 차도 많이 나고 평판마저 최악인 남자와 결혼을 할 위기에 처하자, 대공가로 달려가 자신이 그간 조사한 정보를 대가로 거래를 제안한다.

결혼이 아쉽진 않으나, 지젤이 가지고 있던 정보가 몹시 필요했던 대공은 지젤이 내건 조건, ‘계약 결혼 제안’을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단 1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한 후 이혼하기로 하는데…….

막상 그 1년이 지나는 동안 여러 사건을 겪고 이혼은커녕 진짜 부부가 되어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따란.

문제는 그 여러 사건이 무엇인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하아, 솔직히 책 제목이 뭔지 떠올린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요정아, 두 번째로 말하는 건데 이런 건 좀 기억나게 해줄 순 없어?

[저런, 요정은 기억력을 돌려주진 않아요. (╯´;ω;`╰)]

……그래, 기대도 안 했다.

“하아…….”

내용은 정확하게 다 기억나진 않지만, 여주인공 지젤이 정말 똑똑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기억났다.

문제는 그 똑똑한 여주님이 비혼을 선언하고 탈주했을 줄이야!

왜죠? 너무 똑똑해서 결혼이 아니라도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 하셨나요? 아, 그런 거라면 인정합니다.

어째, ‘이 세상의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으러 갑니다!’ 하고 외치는 모습이 떠오르네요, 주인공 언니…….

“아무튼 달린,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꼭 이야기해 줘, 알았지?”

이번엔 이 소설을 제대로 돌려놔야 한다고? 상황이 좀 복잡한데…….

나름 클리셰의 비중이 높다던 육아물도 절대 쉽지 않았는데, 이건 또 얼마나 머릴 써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날 저녁 황실에서 초대장이 도착했다.

내 공을 치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정중한 초대장이었다.

……치하까지야?

* * *

“으으, 베키, 편하게 입고 가도 된다니까…….”

이틀 뒤 오전, 나는 황실 응접실에 홀로 앉아 거친 숨을 토해 냈다.

이른 아침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 박박 씻겨지고 싹 꾸며지느라 체력이 남아나질 않았다.

내가 이전보다 건강해졌단 걸 알게 된 하녀들은 신나서 이것저것을 내 몸에 얹었다.

평소 아무런 말이 없던 모친 백작 부인까지 허락하니, 그 뒤로는 그야말로 엄청난 스케일의 인형 놀이를 몸소 체험했달까.

‘확실히 이전보다 건강해진 것 같긴 한데.’

[현재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는 정산 중이에요! (๑•᎑<๑)ー☆]

현재 요정께서 대대적인 시스템 점검 중이신지, 매번 이 소리를 해 대는 통에 아직은 내 건강 수치를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다.

뭐 얼마나 달라졌길래 계속 로딩 중이신지.

아무튼 나는 유례없이 화려한 차림을 한 채 속이 더부룩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아아, 정식 알현이라니.

그간 황제의 앞에 나아갔던 것이 단순히 황녀의 유모로서 그저 잠깐 보고만 하는 자리였다면, 이번 알현은 주요 대신은 물론 대귀족이 모인 자리였다.

특히나 유모로 임명되었던 때에 비해도 엄청나게 큰 자리라는데.

나는 MBTI에서 첫 자리가 I로 시작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자리 가면 손이 줄줄 흘러내리고 땀이 달달 떨린다고요.

안 가면 안 되나. 이런 치하 필요 없는데. 보상도 필요 없는데!

‘도망가고 싶다, 남은 메인 퀘스트만 아니었다면…….’

그랬다. 현재 아직 다음 메인 퀘스트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 자리를 옮길 수도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라면 다른 소설의 주인공도 있을 수도 있겠지.

‘다시 한번 ‘남주 찾기’를 시작할 때인가.’

“잘 부탁한다, 사이렌 오더야…….”

믿을 건 너뿐이다, 알지?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강화 주문서’는 모두 사용했다.

목숨 걸고 얻어 낸 추가 기능에 힘입어 주인공들을 더욱 잘 찾아 주길 바란단다, 사이렌 오더야.

팔찌를 열심히 쓰다듬고 있는데,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시종이 들어왔다.

그렇게 시종을 따라서 복도를 총총 걸었다. 말이 총총이지,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 난 정말 학교 발표도 하기 싫어서 맨날 피피티 만들었는데요. 흑흑.

“에스테 영애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때마침 시종이 잠깐 멈춰 서더니 나를 웬 기둥 앞에 세워 두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드레스 자락 안에서 슬쩍 신발을 벗었다.

“아우, 발이야…….”

모처럼 건강해졌다고 예쁜 신발을 신은 건 좋았는데, 영 발에 맞지 않았다.

해방감에 발을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신발을 다시 신는다는 게 그대로 중심을 잃고 삐끗했다.

‘아, 안 돼. 넘어지면!’

베키와 레지나와 그외 하녀들이 꼭두새벽부터 만든 열성의 결과물이 엉망이 된다!

곧 알현이라고! 수습할 시간 없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탓에 바닥을 짚은 발은 그대로 더욱 미끄러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미 늦었단 걸 깨달았을 때 몸은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윽, 망했다!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단단한 무언가 내 팔과 등을 받쳤다.

예상했던 아픔 대신 잡힌 곳 주위로 번지는 생소한 감각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으로 단단한 턱선과 흐드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누군가 나를 붙잡아 준 것이었다.

“어…….”

나는 낯선 이의 등장에 눈을 깜빡였다.

현재 나는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자가 놓으면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질 것 같았다.

이거 예전에 똑같은 상황이 있었는데. 이번엔 자세가 좀 더 창피하단 것만 빼면 거의 똑같아…….

나를 붙잡아 준 것은 멋들어진 검은 제복을 걸친 낯선 남자였다.

한쪽 어깨에 가죽 재질에 털이 달린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겨울에서 막 봄으로 넘어가고 있는 지금 계절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꼭 겨울에서 바로 나타난 사람 같았달까.

“그, 죄송합니다.”

“…….”

뜻밖의 상황에 얼른 사과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꽤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난 당황했다.

뭐지, 왜 말이 없어? 놓아주지도 않고. 거기다 쳐다보지도 않잖아?

워낙에 체구가 큰 탓에 얼굴이 한참 높이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난 눈을 크게 떴다.

어, 이 사람.

‘초상화에서 봤던 사람이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유려한 턱선.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듯하면서도 끝만 살짝 말려 올라간지라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분위기인 건 분명했는데, 특히나 눈동자는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색처럼 몹시도 진하고 진한 붉은 색이었다.

칠흑같이 새카만 머리칼과 대비되었다.

이 남자의 초상화는 눈 색이 붉긴 했지만 워낙 취향이라 남겨둔 초상화였다.

“감사드려요, 크게 다칠 뻔했는데…….”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며 나를 관찰하듯 떨어지질 않았다. 곧 고개를 살짝 기울이기에 내가 방긋 웃자, 남자의 눈이 조금 커진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취향으로 잘생긴 남자가 여태껏 나를 붙잡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사이렌 오더가 빛을 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남자주인공이라고?

어떤 소설인데? 저 사람이 직업이 뭐였더라? 리제가 알려 줬었는데…….

“대공 전하!”

아, 그래! 대공!

갑자기 뒤에서 기사가 달려와 대공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남자는 고개만 살짝 끄덕일 뿐 곧 손짓해서 기사를 물렸다. 기사는 당황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남자, 아니 대공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곧 나를 놓아주었기에 제대로 서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와, 진짜 커. 대공이라면 역시 ‘북부 대공’이겠지?

황제가 신전의 인원 배치 선언에 맞춰 래빗의 호위를 위해 북부에서 대공을 불러들였단 이야기는 들었다.

‘분위기 장난 아니네.’

그때 남자가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조금 전까지 내 손에 들려있던 부채였다.

내 손엔 조금 크게 느껴졌는데, 남자의 손에서는 엄청 작아 보인다.

괜히 위축되는 기분에 어깨를 움츠렸다.

“…….”

말없이 다가온 남자가 상체를 약간 숙이고서 부채를 내 앞에 내밀었을 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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