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83화 (83/281)

◈83화. 1. 육아물은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77)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왜냐면 이제는 이 소설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마무리되고, 래빗은 래빗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래빗으로 산다고 해서 나랑 맺은 친구 관계가 틀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라는 건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는 황녀님의 유모이자…… 친구이고, 황녀님을 구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래, 우정에 대가가 어딨나.

끝끝내 나는 황실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 * *

‘흐음, 정든 이 공간도 잠시간 안녕인가.’

나는 끝내 황제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서 알현실을 나왔다.

건강 수치가 올랐어도 여전히 창백해 보이는 피부 덕에 아직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이로써 쉽게 퇴궁 허락을 받은 데다 휴가까지 얻었다.

잘된 일이지.

앞으로는 두 번째 이야기를 찾아 원작대로 되돌리는 것만으로도 바쁠 테니 말이야.

“우리 래빗이 마음에 걸리지만.”

래빗은 돌아가는 나를 아쉬운 눈으로 보기만 했다.

원래는 나를 따라 나오려 했으나 그 순간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전’이라는 소리가 래빗을 멈춰 세웠다.

더구나 내게 퇴궁허락을 내린 직후, 황제는 곧바로 대신들에게 신전을 향한 앞으로의 조치와 처분을 공표했던 것이다.

더구나 앞으로 래빗을 건들면 인생을 조져버리겠단 걸 모든 대신들에게 보여주려 한 것 같았다.

래빗은 나를 따라오려다 그 내용에 귀를 기울였는데,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주 그냥 조져버리겠다는 눈빛이었지?

그래도 영 아쉬웠는지 눈으로는 내 뒤를 계속 쫓고 있었다.

그나마 래빗을 향해 입 모양으로 ‘다시 봐요’ 하고 속삭였더니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표정이 밝아졌다.

어쩜 그렇게 귀엽고 깜찍한지. 최고다, 우리 황녀님.

“영애.”

뒤를 돌았더니, 이게 웬걸 호위 기사뿐이던 복도에 황태자가 우뚝 서 있었다.

쟤가 여기 어쩐 일이야? 알현실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 창공의…….”

“아아, 됐어요.”

아, 그럼 땡큐고요.

황태자가 싱긋 웃더니, 날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꽤 진지한 태도가 예전과는 사뭇 달라 당황했다.

“영애는 한동안 황성에 입궁하지 않을 테니 기회가 없을듯하여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존댓말을 해도 그 뒤에는 의심과 불신이 깔린 채였고, 나를 대할 때면 언젠가 자리에서 쫓아내겠다는 속마음을 전혀 감추지 않았던 그였다.

그랬던 남자가 고개를 숙이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동생을 구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모습에선 평소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사람 왜 이래?

“……말씀드렸지만, 인사를 받으려 한 행동은 아닙니다.”

“네, 그래서 더 고맙습니다.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사람이 내 여동생 곁에 있다는 이야기니.”

으음, 알겠다. 이거 완전 여동생의 여벌 목숨 보는듯한 시선이지? 이 미친 육아물 오빠 같으니.

하지만 진지한 눈빛에서 감정만은 잘 느껴졌다. 이 정도로 내게 고마움을 크게 느꼈단 거겠지.

“네, 인사는 잘 받았습니다.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감히 물러나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다만 보내기 전에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정말 원하는 것이 없으니까요……?”

내 대답을 듣기 무섭게 황태자가 씩 웃었다. 어째 서글서글한 눈에 장난기가 돌았다.

“이번에야말로 제국을 달라고 한다면 주셨을지도요.”

뭐야. 그 제국 필요 없어. 줘도 안 가져요.

“……황송한 말씀이십니다.”

“아, 제가 오해하게 말을 했네요. 아마 제국만큼의 가치가 있는 아들을 하나 달라고 했어도 기꺼이 주셨을 텐데.”

이제 저런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외람되지만 거기서 황태자 전하의 존함을 아뢰었으면요?”

“하하하, 영애를 살려 두지 않을 것 같은데요?”

우린 마주 보며 하하하 웃었다. 그래, 너도 싫지? 나도 너 싫어. 역지사지해 보란 말이다.

“좋습니다. 영애가 황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걸 알겠으니, 앞으로도 내 여동생 곁에 오래오래 남아주십시오.”

나는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돌아서는데 등 뒤로 ‘내 동생, 참 안됐네…….’ 하며 혀 차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혼잣말이라기엔 너무 컸고, 안타까워한다기엔 말투에 웃음기가 잔뜩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봐야, 또 이상한 소리나 할 것 같지.

얼마나 걸었을까. 막 정문에 다다라 마차를 타는 곳에 도착했다.

기사의 도움을 받아 막 마차에 타려 할 때였다.

“영애!”

다급한 외침에 내 발이 멈췄다.

“2황자님?”

‘집에 가라고 해 놓고 왜 다들 이렇게 난리야?’

돌아서니 숨을 잔뜩 몰아쉬는 2황자가 서 있었다.

달려왔는지 조금 전 알현실에서 보았던 것과 다르게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고, 단정했던 깃도 풀어 헤쳐진 채였다.

도리어 이런 흐트러진 차림이 이상하기는커녕 묘하게도 저 날카롭고 사나운 얼굴에 잘 어울렸다.

이 남자의 얼굴은 사납지만 섬세한 느낌이 있었으니, 이런 모습은 방탕한 부잣집 도련님 같달까. 왜, 잘생긴 망나니 같은. 나도 참, 소설을 너무 많이 봤어.

“이렇게 달려오시다니,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아니, 없다.”

음, 래빗에게 별고가 없다니 다행인데. 그 문제가 아니라면 2황자가 이렇게 뛰어올 이유가 있나? 없는데…….

우리가 침묵하는 사이 마부와 기사가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이곳엔 나와 2황자만 남았다.

“하지만 무슨 일을 만들 생각이다.”

“네?”

“시간이 흐른 뒤에 후회하긴 싫으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 황녀님께 무슨 일이 없는 거면 대체 무슨 일로…….”

“유엘에게 일은 없지.”

2황자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2황자님?”

“라이칸.”

진중한 목소리가 둥둥 공기를 울렸다.

“내 이름은 라이칸이다.”

그렇지 않아도 커피 CF에서나 흘러나올 것 같은 목소리가 더욱 낮아지니, 절로 귀가 쫑긋 서고 목 뒤의 솜털이 서는 기분이었다.

“영애는 황실에서 어떻게 유엘과 영애를 찾아냈는지 알고 있나?”

“아니요…….”

그건 모르지. 그저 육아물 주인공의 가족들이니 어떻게든 찾아낼 거라고만 생각했지?

결국엔 늦지 않게 왔으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전에 에스테 백작저 앞에서 주었던 물건을 기억하나.”

“무슨 물건, 아…… 네!”

나는 황급히 부채에 달린 작은 장식을 들어 올렸다.

주머니 대용으로 쓰는 장식을 거꾸로 뒤집자 데굴 펜던트가 굴러 나왔다.

“앞으로 영애는 이걸 지니고 있도록.”

황태자가 날 데려가 죽이니 마니 했던 날, 2황자가 주었던 물건이었다.

얼떨결에 받긴 했으나, 사실 언제 돌려달라고 할지 몰라서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돌려달라고 하면 바로 줘야 하니까.

재깍 내놓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 돌려드릴까요? 늘 갖고 있었어요!”

“그것 덕분이다.”

“네?”

“그것 덕분에 그대를 찾을 수 있었다.”

2황자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그건, 모든 황족에게 반드시 주어지는 물건이다. 특별한 마력이 담겨 있어 추적이 가능하지.”

몹시도 맑은 하늘빛을 닮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시야에 비친 푸른 눈이 한없이 진지했다.

“당연히 유엘은 갖고 있지 않았어. 우리가 주는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며 이 또한 거절했으니. 하지만 이것 덕분에 두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펜턴트를 응시했다.

오래전부터 전장에 직접 나서는 일이 많았던 비센의 황족들에게 주던 것이 전통처럼 굳어진 일이라고.

이런 중요한 걸 왜 내게 줬던 걸까.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면 2황자는 몇 수나 앞을 내다본 셈이었다.

“대단하세요, 2황자 전하. 그럼 전하께서는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하셨던 거군요?”

“……어째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왜 그렇게 할 말을 잃고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이 뜻이 아니야?

날카롭게 잘생긴 얼굴이 입술을 벙긋벙긋하다가 곧 자신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아니, 됐다. 내 영애가 이런 사람인 걸 모르고 꺼낸 얘기도 아니니.”

“으음? 아, 덕분에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저도 의문이 풀렸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2황자님 덕분에 저도 산 셈이네요.”

“아니, 그게 아니야. 영애.”

2황자의 얼굴에 잠시 사나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가, 곧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고, 고맙다면, 그대도 내 이름을 부르는 걸로 하지.”

“네?”

“고맙다면서.”

뜻밖의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니 붉은 꽃이 살짝 피어난 것처럼 물든 얼굴이 보였다.

그가 느리게 여닫는 눈꺼풀 속으로 뜻 모를 것이 마구 스쳐 지나갔다.

“아, 음, 어…… 라이칸 님?”

“…….”

“라이칸 님?”

2황자, 아니, 라이칸이 얼굴을 가린 채로 끓는 소리를 냈다. 그가 그대로 고개를 돌린 채로 입술만 열었다.

“나는 내일부로 티히스타 산맥으로 떠날 예정으로, 유엘이 부탁한 보약의 재료를 구하러 갈 생각이다.”

앗, 그거. 더는 필요 없어진 것 같은데, 음.

여기서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어 나는 살짝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필요 없어졌으니 가지 말라고 하면 래빗이 실망하겠지.

“현지 사정이 녹록지 않다고 하니, 언제 돌아오게 될지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갈 예정이다.”

“어, 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말했지만 구해오는 것은 나고, 먹는 것은 영애다.”

라이칸의 낮은 목소리가 퍽 기분 좋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마치 성우처럼 무척 좋으면서도 또렷하게 감기는 목소리라 계속 듣고 싶어지는 목소리였으나, 말의 내용은 아무래도…….

래빗 때문에 본인이 퍽 곤란해졌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다녀오면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가슴에서 의문이 작게 피어올랐다가 연기처럼 사그라들었다.

“영애는 내 거처에서 언제나 치료만 하고서 돌아갔었지.”

“네…….”

이마를 살짝 덮은 라이칸의 머리가 바람에 살랑였다. 사람의 손을 탔지만, 우아함 속에서 야성을 잃지 않은 맹수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짧았다.”

“…….”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라이칸이 펜던트를 내미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힘 있는 손길이 이끄는 대로 내 손이 움츠러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펜던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라이칸이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내 쪽으로 밀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심스러운 손길이 다시 내밀어졌다. 내가 머뭇거리며 다른 쪽 손을 뻗자 그는 손등에 입을 맞춰 인사했다.

“돌아오면 내 거처에서 차를 마시고 가겠나?”

[등장인물(주연) ‘라이칸’의 호감도가 기준 수치를 넘었습니다!]

[등장인물(주연) ‘라이칸’을 당신의 두 번째 ‘나만의 로판’ 루트의 등장인물로 초대하겠습니까?]

뭐? 나는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잠시 꿈에 젖은 것 같은 기분이 사라지고 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이 남자도 ‘나만의 로판’에 들어온다고?

‘대체 ‘나만의 로판’이 정확히 뭔데?’

줄곧 침묵하거나 대답을 회피하던 요정이었다. 래빗이야 그렇다 쳐도 라이칸이 여기에 등장한다는 건…….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이걸 받아들여도 되는 거야? 대체 받아들이면 뭐가 좋은 건데.

[‘나만의 로판’ 기능은 빙의자 님에게 후에 도움이 될지도? (๑˃̵ᴗ˂̵)و ♡]

아무래도 망설이는 나를 보며, ‘옜다 힌트!’, 하고 던져준 기분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두 번째 인물이 추가됩니다!]

[요정의 창, 오류! 오류! 기능끼리 충돌했어요!]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빨갛게 창이 물들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요정의 창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와 뻔뻔스럽게 반짝거렸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두 번째 인물이 추가됩니다!

단,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의 영향으로 열람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됩니다!

이름: ‘라이칸 포르 비센’

-역할: 주인공 ‘달린’의 ????

-칭호: 이적을 눈치챈 자(유니크), 전설의 기사(레전드리)

-달린을 향한 호감도: 82 / 100 ]

[앞으로 빙의자 님만의 사랑스럽고 개성 있는 ‘나만의 로판’을 만들어 보세요! ٩(๑• ₃ -๑)۶♥]

나는 라이칸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칸 황자님.”

좋아, 이 세계에서 나이대가 맞는 ‘남자사람친구’ 정돈 하나 있어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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