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
황성에서 공을 치하받은 날로부터 나흘이 흘렀다.
그리고 내 보약 재료를 가지러 가겠다던 라이칸이 떠난 지 사흘이 흐르기도 했고.
고작해야 나흘,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우리 집안은 저택 한복판에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아니, 솔직히 운석보다 더한 것이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어떻게…….
“집안이 한순간에 망할 위기에 처할 수가 있어?!”
내 혼잣말에 옆에서 서 있던 베키가 화들짝 놀라 어깰 움츠렸다. 눈치를 살금살금 보기에 나는 웃으며 물러나라고 했다.
“괜찮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 줄래? 머리가 복잡해서 말이야.”
“네, 아가씨…….”
베키가 나가고도 머리가 매우 복잡했다.
그렇다. 우리 집안은 곧 망할지도 모른다.
“하아, 리제가 말했던 게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일이었다니…….”
나는 얼굴을 마구 비비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는 나만큼이나 엉망인 얼굴의 파올로가 입을 꾹 다문 채 앉아 있었다.
평소였다면 진작 출근했을 파올로가, 온갖 핑계를 대며 휴가까지 내고 고민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오빠, 뭐라도 좀 말해 봐. 이거 어떡해?”
“나라고 별수 있겠냐. 하, 부모님이나 나나 너한테는 끝까지 비밀로 하려 했는데…… 끙.”
“아니, 이게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냐고! 당장 압수당하게 생겼는데.”
미리 알았다면 황제한테 이거라도 해결해 달라고 할걸! 으아아, 후회된다.
그때 아니면 말하기도 어려운데!
‘왜 똥폼을 잡아서는!’
쿵쿵, 테이블을 두드리자 파올로가 한숨을 쉬며 내 손목을 붙잡았다. 뼈가 부러진다며 말이다.
저기요, 뼈는 이런 걸로 부러지지 않거든?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끙, 이때까지 지젤을 찾지 못할 줄이야. 아버지도 숙부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겠지.”
그러했다. 리제가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던 우리 집안의 현재 상황.
신부가 그만 도망, 아니 실종되어 버린 일.
그것도 ‘저는 비혼주의입니다.’라고 써 놓기까지 하고 홀랑 튄 일!
‘아니, 그 언니는 뭔데 이렇게 잘 숨어?!’
이 일의 주인공, 내 사촌 언니 ‘지젤’을 끝내 찾지 못한 것이다.
거기다 어제까지가 대공가에서 준 기한의 마지막이었고, 결국은 최후통첩을 받았다.
투자한 만큼의 재산을 내놓든가, 내놓지 못하겠으면 영지전을 벌이든가.
“대공가랑 영지전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거긴 맨날 싸움만 하는 기사들이 득시글댄다며, 다 들었어!”
“애초에 병사 숫자부터가 차이가 나지……. 그 전에 우리 집은 군량도 감당 못 해.”
우리 집안의 재산 규모가 그랬다니, 흡, 내 병 때문이겠지. 밀려오는 죄책감을 꾹꾹 누르며 상황을 되짚었다.
이미 숙부인 레스터풀 대백작은 투자금을 모두 사용한 상태.
거기다 회수가 어려워 재산을 긁어모아야 하는데, 한창 사업을 확장하던 중이라 도저히 무리란다.
무리하게 자금을 빼도 망하고, 이대로 영지랑 재산을 모두 몰수당해도 망하고, 영지전을 해도 망한다.
이런 망할 경우를 보았나!
“애초에 그 사촌 언니는 왜 비혼을 선언한 건데!”
“그걸 나도 모르겠다…….”
비혼, 좋지. 누구나 하나뿐인 인생, 그 선택 존중한다.
근데 그렇게 사생활이 중요하신 분들께서 뒷수습할 사람은 왜 생각 안 하냐고!
하지만 나는 온전히 그녀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래도 우리 사촌 언니가 두 번째 소설 주인공 같았으니까.
나는 이미 리제에게 레스터풀 영애 ‘지젤’과 대공가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 소설을 떠올렸고, 요정은 친절히도 그게 ‘두 번째 소설’이라 이야기해 주었다.
문제는 이번에도 대략적인 내용만 떠올라서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거였다.
‘제발 빙의하더라도 내가 잘 기억하는 소설에 하게 해 주라!’
그래도 우리 살길은 조금만 봐주고 떠나시지 그러셨어요…… 얼굴 모를 여주님…….
아직 메인 퀘스트는 뜨지 않았지만 정황상 여주가 자리를 비워서 비틀어졌을 테고, 퀘스트 내용은 이를 바로잡으란 것일 게 틀림없었다.
“아, 그게…… 사실은 지젤 양의 상대가 처음엔 대공님이 아닌 다른 남자였다는 얘기가 있었거든. 가브스터 자작이라고 음, 좀 폭력적이고 나이도 있는 분의 후처 자리였다나. 근데 얼마 뒤 대공가랑 정략혼을 맺었으니 그건 그냥 소문이었나 봐.”
내용상 지젤은 폭력적이고 나이 많은 남자의 후처 자리로 가지 않기 위해 그 좋은 머리로 알아낸 정보를 가지고 대공을 찾아갔고.
거래가 받아들여져 계약 결혼을 진행했을 거였다. 세상에는 정략혼으로 알려졌겠지.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네.
무슨 로맨스 소설에서 여주가 비혼 선언을 한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