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3)
무슨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보는 시선이라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이 사람들 왜 이래?
방 안에서 파올로도 이렇게 노려본 건가, 설마?
엄밀히 따지면 우리 가문은 죄가 없는데? 아무리 얘들 눈에는 한편으로 보인다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달린.”
“듣고 있어.”
“그래…… 안으로 들어가 봐.”
“그래, 어?”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이 사람이 대공가 전령 아닌가? 나도 모르게 여전히 날 노려보는 갈색 머리 남자를 보았다.
파올로가 이 사람들을 배웅하기 위해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말이야. 왜 안에…….”
“안쪽에 대공님께서 계신다.”
파올로가 얼굴을 짚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널 왜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말을 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황당, 의혹 그리고 눌러 참은 찝찝함까지.
“혹시라도 대공께서 네게 수작을 부리거나 하면 소릴 질러.”
아주 작게 이렇게 속삭이기까지 했다.
‘대공이 나한테 왜 수작을 부려? 뭐가 아쉽다고.’
하지만 파올로는 정말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날 들여보냈고, 나는 파올로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탁 닫혔다.
대공이 여길 왜 와? 머리는 당혹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진짜 레스터풀 백작 잡으러 직접 행차했나?
근데 그 사람은 여기 없는데. 그리고 그런 거였으면 난 왜 들어가라는 한 건데?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자, 소파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덩치가 아주 크고 키마저 컸지만 날렵한 실루엣과 타고난 비율 덕에 우둔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훤칠하고 시원시원한 느낌이었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저 대공님이 바로 원작에선 차갑고 잔혹한 군주였다.
뒤로 보이는 창문도 원래 작은 크기가 아니었는데, 저 남자가 앞에 서 있으니 모두 가려질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실로 역할에 맞는 우월한 체격이었다.
“대공님을 뵙습니다.”
치마를 잡고 인사를 올렸다. 살짝 긴장된 동작을 눈에 담고 따라오는 시선이 느껴졌다.
“에스테 백작의 여식 달린이라 합니다.”
어쩌지. 여기서는 좀 뻔뻔하게 가 볼까?
“외람되지만 저희 구면이네요, 대공님.”
나름 용기 내어 말했건만 저쪽 채권자, 대공님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황성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진짜 말이 없는 사람이네. 원작에서도 그랬었나?
어찌 보면 흔하다 싶은, 묵직하고 진중하며 차갑고 냉정한 느낌의 남자였던지라 크게 이상하진 않았다.
“저…… 저를 뵙고자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무슨 일이실까요?”
일단 잘 보이고 보자. 어쨌거나 내가 시간이라도 좀 끌면 아버지에게 좋겠지.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예쁘고 무해한 미소로 내 얼굴을 적셨다.
그러자, 대공이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제 얼굴을 부여잡았다.
“……한 번 더 ……어서.”
울림이 좋은 목소리였고 의외로 저음인데도 맑은 느낌이었다.
짧게 말했을 뿐이지만 돈을 내고서라도 더 듣고 싶은 음성이 다시 귓가에 밀려들었다.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고개를 떨어트린 순간 나는 흠칫했다.
순종적인 음성이었다.
거기다 손이 내려가며 가려졌던 눈이 드러났는데, 날카롭던 눈매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내려갈 수 있나 싶었다.
처진 눈꼬리가 어찌나 양순한 느낌을 자아내는지, 저 체격에도 작은 강아지처럼 보는 사람의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근데 잠깐, 잠깐만.
내가 뭘 들은 거야?
“……예?”
뜻밖에 깊다고 생각했던 붉은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파문이 담긴 눈동자를 응시하자니 머릿속에서 누군가 미친 듯이 경고 종을 울렸다.
“궁금하니까, 궁금하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내 눈이 마구 방황했다.
“아, 그 하하, 정말 외람되고 죄송하게도 제 이해력이 많이 아주 많이 부족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잠시 고장 난 머리와 다르게 입술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그, 다시 한번 여쭙는데 혹시 에스테 저택에 찾아오신 까닭이……?”
“처, 청혼하려고요.”
네?
“음, 저희 집에는 건장한 파올로라는 오빠와 제가 있는데, 일단 제 오빠에게 청혼하시는 건 아니겠고, 하하.”
“영애예요.”
울망울망한 눈동자에 대략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저 미친 듯이 커다란 체격을 보면서도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얼굴이었으니까.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책 속에서는 설산 지대의 만년설만큼이나 차갑고 싸늘한 군주가 어째서 저런 몰골이 되었는가?
왜겠어! 원작이 또 괴상한 방향으로 비틀어진 거겠지!
나는 몰래 만지작거리고 있던 옷 장식을 툭 떨어트릴 정도로 아득하고 심각해졌다.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대공이 다시 한번 말했다.
“처, 청혼이 이르면 약혼도 있으니까, 어느 쪽이든…….”
“아뇨 아뇨, 왜 진도가 그렇게? ……가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만.”
나는 헛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은 입을 가리는 척 꾹 손으로 눌러 붙였다.
진정하자. 진정해.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을 숨기지 못하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말았다.
“저, 그, 말씀하시는 의미를 이해 못 한 것은 아닌데…… 어째서요?”
그래, 어째서? 우리 황성에서 잠깐 만난 것이 다이지 않나요?
그러자 볕에 물든 진한 색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다가 곧 또렷한 빛을 띠고 나를 응시했다.
대공이 세 걸음 가까워진 동시에 내리깐 속눈썹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첫눈에 반했어요…….”
새하얗던 피부가 붉은색 색감이 염색되듯 물들었다.
……예?
“첫눈에 반하면 종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정말인 줄은…… 몰랐어요…….”
이게 대체 무슨 전개야.
게다가 존댓말이라니. 잠깐 황태자를 떠올렸지만 그가 주는 인상과는 전혀 달랐다. 정말로 상대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느낌.
살짝 웃는 눈 아래 장식처럼 콕 찍힌 눈물점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실 이 대공도 내가 골랐던 초상화 목록에 포함되었을 만큼 정말 내 취향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이 이렇게 순둥해질 수 있는지는 몰랐다.
어쨌거나 대단한 외모였다. 그리 어둡지 않은 방인데도 대공 주변만 환해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쫄쫄 굶은 해바라기가 해를 보듯이 눈길이 강제로 잡아끌렸으니까.
하지만 그 잘생긴 얼굴을 앞두고서도 내 기분은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평범한 힐링 드라마인 줄 알고 틀었던 드라마가 사실은 암세포도 생명이라질 않나 김치로 싸닥션을 날리는 막장 드라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난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생각해 보자.
당연하겠지만 결혼은 안 될 말이다.
일단 쟤가 이번 이야기의 남자주인공인 건 둘째 치고, 아직 내가 해결해야 할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혼약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사실, 의심이 가는 전개가 있긴 한데.
이건 좀. 아니야. 이건 아니야…….
“저…….”
[서브 퀘스트가 도착했어요! ˚✧╭( ・ㅂ・)و ̑̑✧༚!]
[퀘스트(서브) - ‘두 번째 책을 시작해 보자!’
축하합니다! 영리하게 두 번째 소설을 찾아낸 당신!
두 번째 소설이 어째서 원작과 달라졌는지 대공님과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내용: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청을 받아들이기,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을 따라가 이야기 듣기
실패 시, 건강 수치 -20
기한: 30분
보상: 건강 수치 +3]
아무래도 요정이 나를 비꼬고 싶었던 것 같다.
이 상황이 어딜 봐서 영리하게 두 번째 소설을 찾아낸 거냐, 집안이 망할 것 같으니까 어쩌다 찾아낸 거지.
그리고 청혼을 받아들이라니…….
어째 내가 상상도 못 했던 전개가 눈앞에 성큼 다가온 듯했다.
그 전개란 ‘나라도 여주 역할을 해야 하나’ 하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지젤은 원작대로 대공과의 결혼 계약을 체결하며 가문 간의 정략혼을 이끌었다.
한데 그녀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모든 똥은 나와 에스테가로 넘어온 상황.
게다가 영리하고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던 지젤을 찾을 길도 요원했다.
이 이야기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여주인공이 필요한데, 요정의 설명에 따르면 그 여주인공으로는 ‘대공의 약혼자’만이 인정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 대공 전하가 내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소설도 이렇게 쓰면 욕먹을 것 같은데.
“저, 대공님…….”
일단 만에 하나 저 서브 퀘스트를 거절한다고 해서 해될 것은 전혀 없었다. 실패 시 건강 수치 –20? 문제없다.
그도 그럴 것이,
[빙의자 님의 현재 건강 수치는 ‘80’이에요!]
내게는 막강한 건강 수치가 있거든.
요정이 드디어 시스템 점검을 마쳤는지 얼마 전 저렇게 뜨더라?
이게 바로 첫 번째 이야기를 완성한 사람의 저력이다,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