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89화 (89/281)

◈89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6)

“오셨습니까, 대공 전하.”

안으로 들어서니 단정한 차림의 사람들이 칼같이 줄 맞춰 도열해 있었다. 역시 로판에서 많이 본 것 같은 풍경이었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모실 준비는 마쳤습니다.”

집사인 듯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나를 향해 목례했다.

정중하긴 한데, 눈이 마주친 미묘한 순간에 눈꼬리가 날카로워진 것 같기도 했다.

“저는 대공 전하의 수도 저택의 총 관리인, 알베이트입니다. 반갑습니다. 영애님.”

“아, 달린 에스테입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집사의 뒤를 따라 걸었다. 등 뒤로 따끔하게 꽂히는 시선은 일단 모른 척했다.

‘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하녀고 시종이고 팔뚝에 단검을 매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하도 시선들이 날카로워서 목 뒤가 아플 정도였다. 설마 퀘스트 내내 이런 걸 견뎌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가자,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은 에스테 저택에서도 보았던 갈색 머리 남자였고, 다른 한쪽은 푸른 장발을 가진 덩치가 커다란 남자였다.

“대장님을 뵙습니다. 허어, 세상에. 바로 이 아가씨입니까? 대장님이 그 쌩 난리 지랄…….”

퍽.

“바르고 고운 말을 쓰도록 하지요, 롬테 부대장.”

“아우 씨, 무슨 마법사가 힘이 뭐 이리 셉니까?”

이름이 롬테인지 하는 푸른 장발을 가진 남자가 갈색 머리 남자에게 얻어맞은 턱을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반갑습니다. 저는 체단 대공가 산하 특무대 제2사단 부대장 롬테 암가르입니다. 듣던 대로 아주 미인이시군요! 하하하!”

“……카난카. 대공가 소속 마법사입니다. 반갑습니다.”

“달린 에스테예요. 반갑습니다…….”

순식간에 인사가 쏟아져서 얼떨결에 답을 하긴 했는데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카난카라는 마법사는 에스테 저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보진 않았지만 여전히 엄청 차가운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저 롬테란 사람 역시 호탕하게 웃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매번 입만 샐쭉 웃는 황태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걸 구분하지 못했을 거다.

아니, 주인공인 지젤은 처음부터 대공가 가신들이랑 잘 지냈던 것 같은데, 난 왜 이래?

“아, 이야기는 끝났겠지요? 그럼 식은 언제 올리는 겁니까, 대장님?”

음? 잠깐, 이야기가 바로 거기로 간다고?

나는 깜짝 놀라 롬테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바로 대공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빨리 말해, 나 결혼 받아들인 거 아니라고! 우리 확실하게 얘기한 건 없잖아!

그러나 내 시선이 닿기 무섭게 살짝 고개를 기울인 이 북부대공님이 손을 그러모아 쥐고 입술을 가렸다.

“아, 저, 영애가 괜찮다면 어, 언제든…….”

뭡니까, 이 신혼 첫날밤 같은 농도의 수줍음은?

아니, 저기요. 우리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댁의 상상 속에서는 애가 영어유치원까지 간 것 같죠?

“저, 저는 오늘 여기에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그렇게 알고 온 건데…… 아니었나요?”

“으잉?”

카난카와 롬테가 서로 마주 보았다.

“대장님, 설마 아직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고 모셔온 겁니까?”

“아니야.”

“아, 그렇죠. 그럼 납치지.”

“다만 다 못한 얘기를 마저 하려고 모셔온 거야. 거긴 듣는 귀가 많으니까…….”

“아아, 그건 그렇죠.”

다 못한 얘기?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 않아도 대공이 굳이 자기 저택에 가서 하자고 했던 얘기가 궁금한 참이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다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아직 영애께서 듣지 못하신 듯한데…….”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대답을 바라고 자신을 쳐다봤다고 생각한 건지 마법사 카난카가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의 반려는 대공가 영지로 가셔야 합니다. 식도 그곳에서 올려야 하며, 어떤 이유에서건 그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어어? 그런가요?”

어, 이런 건 못 본 것 같은데. 아니, 기억을 못 했나 보다.

그럼 만에 하나 내가 퀘스트를 위해서 이 남자와 계약 결혼을 한다면 수도에서 벗어나서 살아야 한단 말이야?

가족들과 래빗을 볼 수 없다니, 그건 좀 그런데.

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카난카와 롬테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경계하거나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난카마저도 얼굴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저, 크흠, 대장님, 진짜 아무 말씀도 안 드린 건 아니지요?”

왜들 이러지? 의아해하던 난 곧 고개를 돌리다 깨달았다.

대공님이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댁들의 스윗 리를 키티 같은 수장이 눈물이라도 흘릴까 봐 걱정했다 이건가.

“크흐흠! 일단 저흰 잠시 밖으로 나가 있겠습니다. 다른 부대장들에게 소식을 알려야겠습니다.”

“마법사 쪽은 제가 맡죠.”

“아아, 그래. 뭐 이미 다들 도착하신 건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두 사람이 응접실에서 나가고, 문 앞에 서 있던 총 집사 알베이트까지 나간 뒤 문이 닫혔다.

에스테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응접실에 적막이 흘렀다.

뭐, 일단은 지금 들은 얘기는 둘째로 치고 할 얘기가 있으니 말이지.

“저, 대공님.”

“영애…….”

어쩌다 보니 말이 동시에 나왔다.

대공이 잠시 입을 다물더니, 조금 뒤 내게 먼저 말하라 권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말씀 드릴게요.”

선명한 색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날 응시하니 괜히 긴장됐다.

비록 이야기가 뒤틀리는 바람에 성격이 이렇지만, 섬세함과 날카로움을 오가는 상반된 이미지가 잘 이어진 얼굴이 잘 어우러진 남자의 얼굴은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혹시 제게 하시려던 말씀이 지금 카난카 님이 하신 저 얘기 맞나요?”

“네…….”

어쩐지 내 눈치를 보는 덩치만 큰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작게 웃음이 나왔다.

내 취향인 날카로운 얼굴에 이런 덩치를 가지고 무해해 보이기도 어려운데, 그 어려운 걸 울보 대공님이 해냅니다.

“그, 영애가 아직 답을 주신 건 아닙니다만, 내 영지가 나쁜 곳은 아닙니다. 눈이 많지만 살기엔 꽤 좋기도 하고…… 눈이 많지만 먹을 것도 충분하고…… 눈이 많지만 몬스터 처리는 확실하게……!”

대공님이 손을 휘휘 저어 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얼굴이 모든 설득력을 받쳐주기 때문인가, 이 모습도 귀엽게 보였다.

“그렇군요, 눈이 참 많은 곳이구나.”

“누, 눈이 나쁜 건 아닙니다.”

“아 그럼요. 전 눈 좋아해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77]

응? 지금 이 타이밍에 호감도가 왜 오르는 건데?

아니, 설마.

“좋아해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78]

“흡!”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려 괜히 눈을 깜빡이는 남자를 응시했다.

대공은 더욱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와, 뭐야. ‘좋아해요’란 말 한 마디에? 이렇게도 호감도가 올라요? 이런 꿀 같은 일이? ‘좋아한다’는 단어만 들어가 있으면 되는 거야?

얼른 케이크를 좋아한다, 봄을 좋아한다 등등 열심히 응용해서 말을 더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호감도는 더 오르지 않았다.

대신 대공님의 귀는 건드리면 펑 터질 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리고 이, 이 얘기만 드리려고 한 건 아니에요……!”

“아, 그럼 어떤 말씀을 더 하시려 했을까요?”

조심스럽게 묻자, 대공님이 잠시 모양 좋은 입술을 뚝뚝 손가락으로 누르다가 떼어냈다.

“이, 장식품은 어떤 걸 좋아하시나요?”

“네?”

“자, 장신구는, 드레스도 있고요. 모피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기요, 저는 아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왜 혼자서 벌써 혼수 일체를 마련하고 계시죠……?

아니지, 조금만 좋게 생각해 보자.

수컷 늑대가 첫눈에 반한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큼지막한 먹이를 들고 헥헥대는 모습을 상상하자, 왠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 음, 우선은 몸이 좋지 않아서 추운 곳은 쥐약이긴 한데…… 아직 겨울이 멀어서 모피는 잘 모르겠어요.”

일단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로 아직 겨울을 맞이한 적이 없는걸.

하지만 리제가 예전에 대화하다가 올해 겨울에는 눈표범 가죽이 갖고 싶다고 말했던 것으로 봐서는 수도의 겨울도 꽤 추운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부의 날씨를 수도와 비견할 수는 없겠지. 난 수도보다 훨씬 추운 곳에서 온 남자를 바라봤다.

“음, 대공님 여기까지 대공님을 따라온 마당에 저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대공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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