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90화 (90/281)

◈90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7)

“믿기지 않지만 대공님께서 제게 첫눈에 반하셨단 말, 신뢰할게요. 진심이 아니고서야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저, 정말입니다!”

“네, 믿어요.”

참 신기하다.

리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리제 말에 의하면, 북부 대공의 영지는 지금 라이칸이 가 있는 티히스타 산맥처럼 온갖 몬스터와 마물, 마수 따위가 득실거리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매번 마물을 제일 많이 때려잡는 사람이 대공이라고도 했다.

“정말 정말 대단하신 분이래! 다만, 피를 묻히고 나타나는 모습은 좀 무서운가 봐…….”

지금 이 모습을 보아선 쉬이 상상할 수 없는데.

“저는 아직 대공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지만, 만에 하나 제가 대공님의 청혼을 받아들이면 북부 영지로 가서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건…….”

“으음, 말씀 드렸듯이 예전에 많이 아팠다 보니, 카난카 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나서 혹시나 가족도 없는 곳에서 아프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해요.”

내 말에 대공님이 또다시 울상을 지었다.

“이럴수록 더 생각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내 취향의 남자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니 마음도 아프고 또 약해지려고도 하지만, 우선은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먼저일 듯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대공님과 있는 동안 시간도 벌었고, 혹시 오늘 아버지가 좋은 소식을 가져오실 수도 있지 않나.

“알겠습니다…….”

만약 아버지 일이 정말 잘되었다면 아버지가 구해 온 돈에다, 내가 황실이나 리제에게 빌려온 돈을 합쳐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추욱 처진 커다란 어깨를 보는 건 조금 안됐다 싶었지만,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이야기를 잘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 * *

집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고서 정문 쪽으로 걸으며 생각했다.

사실 대공에게는 시간을 달라, 조금만 더 생각하게 해 달라고 했지만 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거 빼도 박도 못하겠는데.’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잠시 시간을 벌긴 했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방법이 없으면 북부 영지로 가야지. 별수 있나, 뭐.

집 안으로 들어간 순간 예상은 했지만 분위기는 상상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베키와 하녀들이 나를 보며 왈칵 눈물을 쏟았고, 집사는 침통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사색이 돼서 달려온 아버지는 머리가 까치집이었다. 마구 쥐어뜯으신 것 같았다.

“달린!”

아버지에 이어 파올로도 달려왔다. 음, 이미 다 말했나 보군.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었다.

“저 다녀왔어요, 아빠. 엄마.”

아버지의 눈이 그렁그렁했다. 어머니도 못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더했다.

그러나 이미 더한 눈물 펑펑 쇼를 보고 온 내 마음은 평온했다. 그래, 그 대공님만큼 자주 울기도 쉽진 않겠더라.

“아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파올로에게 모두 들었다. 대체……!”

“앗, 일단 앉아서 얘기하면 어떨까요? 아빠 쓰러지실 것 같아요…….”

내 제안에 가족들이 응접실에 둘러앉았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가족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음, 아무래도 숙부랑 함께 간 자리의 결과는 좋지 않았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침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레스터풀 대백작과 다녀온 자리는…… 후, 그래. 엉망이었단다.”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절절한 절망은 아주 잘 느껴졌다. 나도 같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버지의 탓이 아니잖아요. 애초에 원인과 책임 모두 레스터풀에 있으니까요.”

“어찌 됐든 지금 상황에서 레스터풀과 에스테는 운명공동체나 마찬가지이지 않으냐.”

“…….”

아버지의 침울한 얼굴이 나를 본 순간 더욱 어두워졌다.

“그래, 달린. 이제 진정하였으니 한번 들어 보자꾸나. 이게 다 무슨 일이냐?”

“그, 파올로에게 이미 들으셨겠지만, 아빠.”

“아니다, 그만 말하거라. 네 입으로 듣고 싶지 않구나! 청혼, 청혼을 받았다고?”

“얘야, 도대체 대공께서는 무슨 생각이시라니?”

아버지의 질문에 이어 지금까지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모친까지 입을 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음, 사실 다들 알고는 있을 터였다.

영문은 모르지만 대공이 내게 청혼을 했고, 이거야말로 이 에스테가가 망할지 모를 상황에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큰 기회가 될 거라는 걸.

“말도 안 된다. 무슨 꿍꿍이시라더냐! 거기다 식도 영지에서 올려야 하고, 결혼한 뒤에는 영지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고? 네 몸으로 말이더냐?”

“절대 안 된다, 아가야.”

가족들은 나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했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 내게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기회를 잡기는커녕 어떻게든 다른 길을 찾아보려 전전긍긍하는 걸 테고.

가족들이 반대한다 한들 이 상황을 벗어날 뾰족한 수도 없었지만.

나야 퀘스트를 진행 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이 괴상한 상황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이 모든 걸 설명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초조한 얼굴로 평소라면 절대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을 말까지 했다.

“달린, 얘야, 혹시 폐하께 부탁해 볼 수는 없겠느냐?”

“그래……. 말도 안 된다는 소리인 줄 안다만은 너는 황녀님의 유모 아니니?”

걱정으로 가득 찬 세 얼굴이 나를 향했다.

두 분 다 이 제국에서 황실이 가지는 권위와 두려움을 모르시지 않을 텐데도 이런 말씀을 꺼내신 걸 보면, 나를 북부로 보내는 것이 그 이상으로 두려우셨던 듯했다.

“……저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도 섣불리 끼어드실 수 없는 문제라고 들었어요. 그렇지 파올로?”

“……그래.”

파올로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제발 황제 하께 가서 말이라도 한번 꺼내 봐. 난 이대로 내 동생을 보낼 수 없어. 넌 북부의 겨울이 어떤지 몰라서 그래.”

파올로가 한껏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염치 불고하고 황실로…….”

쿵쿵!

다급한 노크 소리로 인해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배, 백작님! 크, 큰일 났습니다. 지금 황실에서 전령이!”

달달달 떠는 시종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얬다.

“대공가 휘하 특무단과 기사단이 레스터풀 저택을 포위했다고 합니다!”

“뭐? 지금? 어째서인가?”

“그게, 레스터풀 대백작님이 재산을 챙겨 도, 도망가려 하다가 붙잡히셨다고…….”

아이고. 나는 남몰래 이마를 짚었다.

현재 레스터풀과 체단 대공가 사이의 문제는 전적으로 레스터풀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기한을 주었는데 최후까지 갚지도 못하고 도망까지 쳤다니.

‘붙잡히지나 말지!’

……이건 텄다. 황제도 실드를 쳐 주기 어렵겠는데.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면 당연히 레스터풀도 잘 봐 달라고 해야 했다.

어쨌거나 걔들이 망하지 않아야, 함께 사업하는 우리 집도 무사할 테니.

근데, 그 새를 못 참고 레스터풀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지젤 언니는 그렇게 똑똑한데, 그 숙부란 아저씨는 거의 판을 망쳐 놓는 수준의 트롤이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각오했다. 망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퀘스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네.

“허어! 지금 정작 에스테 가가 수도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혼자 도망을 치려고 했단 말이더냐!”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얼굴을 붉히며 크게 화냈다.

“그들이 도망치면 우리는! 우리 에스테 가는 수도에 와 있는 대공께 어찌 될지 뻔히 아는 작자가!”

아버지가 이를 꽉 깨물었다.

동시에 곧 닥쳐올 미래를 짐작하시기라도 한 듯 나를 몹시 슬픈 눈으로 바라보셨다.

“음, 아버지. 저 대공님의 청혼을 받아들이려는데요.”

“안 된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일 때문인지 부친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오히려 갈피를 못 잡는 듯한 행동에 미안함마저 담겨 있었다.

“잠깐 제 얘기도 들어주세요. 사실, 대공 가문이면 제국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인데, 왜들 그러세요.”

나는 침울한 분위기를 못 느낀 척 얼른 생긋 웃었다.

저기요, 저 죽으러 가는 거 아니거든요?

북부가 얼마나 춥든 간에……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뭐.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지 몰라서 줄곧 고민이었는데, 사실 저도 대공님이 좋았어요.”

난 양손을 맞잡고, 꽃물이 물든 듯 발그레 예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일단 제 취향이시고.”

이거 중요하다. 같은 성격이면 잘생긴 남자를 만나라 했다.

“제게 첫눈에 반하셨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워낙 진솔해서 거짓말 같지는 않았어요. 사실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한들 대공가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걸요.”

“…….”

“그리고 제가 얼마나 살진 모르겠지만 살면서 제게 첫눈에 반한 남자를 또 언제 만나보겠어요. 그런 남자가 대공님 같은 사람일 경우는 또 얼마나 있겠구요.”

부친이 입술을 뻐끔 움직였다. 나는 가족들이 말을 잇지 못한 틈을 타 얼른 말했다.

“단지 지젤 언니 자리를 제가 차지하는 게 미안하고 찜찜해서 계속 망설였는데, 방금 괜찮아졌어요.”

해석하면 이렇다.

“우리도 살려면 방법은 없어요.”

뒤통수는 누가 쳤다? 레스터풀에서 쳤죠. 저들이 뒤통수를 거하게 쳐준 덕분에 우리에게도 방법이 없어졌어요!

“다 떠나서 저도 대공님이 좋아요. 그러니 대공가로 갈게요.”

이어지는 내 설득에도 가족들은 여전히 반대하는 얼굴이었지만 끝끝내 누구도 내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아니, 꺾으면 가문이 망하게 될 테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울상을 짓는 가족들에게 약 한 시간에 걸쳐 대공에 대한 마음을 피력했더니, 다행히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생긋 웃었다.

“집사, 대공가로 전령을 보내 줘.”

퀘스트 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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