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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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나는 북부 대공님과 다시 한번 만났다. 장소는 대공님의 수도 저택이었다.
“대공님을 뵈어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79]
오, 인사만 했을 뿐인데 호감도가 오르다니. 이것만 보면 이번 퀘스트는 참 쉽게 해결될 것 같단 말이지.
“다시 만나서 기쁩니다, 영애…….”
“네. 이야기는 모두 들으셨겠지만요.”
며칠 만에 다시 본 대공은 여전히 덩치가 컸다.
장신구처럼 콕 눈물점이 박힌 얼굴에서는 날카로움 대신 어울리지 않는 발그레함이 느껴졌다.
“에스테의 편지가 먼저 도착했죠?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요.”
대공이 크게 끄덕였다. 어우 씨, 목 안 아픈가? 격한 끄덕임에 놀랐다.
“대공님께서는 황제 폐하를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네, 레스터풀과의 일도 있고…….”
말을 잇던 대공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잠시 날카로운 기색이 스쳤으나 찰나였다.
“청혼과 약혼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 불같이 화를 내셨어요.”
“폐하께서요?”
“황녀님께서요.”
아, 우리 래빗……. 나는 래빗의 얼굴을 떠올리고 하하하, 웃었다.
“일단은 약혼부터 하고 싶다는 저희 조건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는 끝내 나를 말리진 못했지만 바로 식을 올리는 대신 준비 기간을 갖고 그동안에는 약혼 관계로 지내길 바랐다.
짧은 기간이라도 내 성을 에스테로 남기고 싶다는 부친의 의지였다.
‘그보다 혼인 서류를 제출하면 바로 부부라고 하던데, 그건 다음 주에 낸다며?’
어차피 북부 영지로 가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부부든 약혼자든 그게 그거였지만, 제국에서는 혼인 서류를 제출한 순간부터 부부로 친다.
이 남자와 나는 아마 혼인 서류를 제출하기 전 약 일주일 정도 약혼 관계로 지내는 셈이었다.
사실 오늘 만난 건 그 혼인 서류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서 만난 거기도 했다.
그래, 북부 영지에 가기로 결심도 했겠다. 메인 퀘스트에 적극 임해 보자고.
특히나 지금은 쉽게 쉽게 호감도가 오르고 있다지만 분명 곧 뭔가 있을 거란 말이지.
“청혼을 받아들였고 이제 결혼 준비도 한창 시작된 것 알아요.”
놀랍게도 대공가에서는 에스테가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대신 열렬한 지원이 이어졌다.
“대공 전하께서는 에스테가가 레스터풀에 의해 무고한 희생양이 될 뻔한 점, 잘 알고 계십니다. 이건 대공 전하께서 보내시는 투자금입니다.”
황금과 돈.
“에스테 영애에게 보내는 선물입니다.”
“이 사람 누구에요?”
“혹시 약초와 의학으로 유명한 아스린 소국을 아십니까? 그곳 최고의 의사입니다.”
의사.
“대공께서 보내시는 지참금입니다. 바일론 영지입니다.”
부동산까지.
‘와, 재벌 3세랑 결혼하는 신데렐라가 이런 기분이구나.’
오기가 생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것저것 준비했지만 곧 저쪽 스케일에 질린 눈치였다.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돈 좋지. 부동산도 좋지. 현금과 현물, 부동산이 짱이야.’
내 연봉으론 120년을 일해도 강남에 집 한 채 못 사는 동네에서 온 소시민이라 부동산에 눈이 돌아…… 간 건 아니고.
현재를 즐기기로 했다.
퀘스트 끝나면 돌려줘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좀 아깝겠다.
“많은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 준비를 마치면 영지로 가 식을 올리겠죠?”
대공이 가는 눈매를 느릿하게 깜빡였다. 섬세한 속눈썹이 눈 밑을 쓸어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여쭙고 싶어요.”
그래, 이 말을 할 때가 왔다.
이 소설은 뭐다? 계약결혼물이다.
가장 중요한 단어가 나와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대공님께서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메인 퀘스트에 포함된 내용.
자, 어떡하면 자연스럽게 계약을 제시할 수 있을까.
며칠간 열심히 고민한 결과를 꺼내려 하는데, 대공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영애는 영애가 끝내 나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 경우 영애를 놓아주길 바라는 건가요?”
엥?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가 꺼낸 말이 내가 하려던 말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헤어질 생각부터 하신 거라면…… 너무 슬프겠지만.”
온순하게 말을 이어가던 대공의 어깨가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가 올랐어요! (+1) 현재 광증 수치: 18]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 호감도가 내려갑니다! (-5) 현재 호감도: 72]
에에에엥? 잠시만, 잠시만! 이게 무슨 소린데?
‘광증 수치가 올라가면 왜 호감도가 내려가는데?!’
야, 요정 나와. 나오라고! 설명해!
[이런, 이제야 아시게 되었군요!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가 오르면 호감도가 내려가니, 주의합시다! ⊂((´^`))⊃]
야 이씨! XX! XXX!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 이놈의 퀘스트가 쉬울 리가 없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기껏 올린 호감도가!
“……그런 의미로 말씀 드린 건 아니에요.”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광증 수치. 아직 저게 뭔지는 몰라도 올려서 절대 좋을 게 없단 건 분명했다!
“저는 그저 저희가 정말 부부가 되기 전에 제게도 사랑에 빠질 시간을 주셨으면 해요.”
“사랑에 빠질 시간…….”
이대로 생각해 둔 말을 꺼내도 될지, 혹은 방향을 바꿔야 할지.
어느 쪽으로 말을 꺼내면 좋을지, 갈팡질팡했지만. 긴장감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네. 저희의 혼인 서류 제출을 조금 미루고 시간을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남자가 내내 두르고 있던 온순함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자연히 처음 황성에서 보았던 얼굴, 내가 알던 초상화 속 그 날카롭고 첨예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저는 대공님만 괜찮으시다면, 기한을 정해 그 시간 동안 저희 관계를 두고 보았으면 해요.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지 서로 고민해 보자는 거죠. 저는 대공님께 일종의 결혼 계약을 제시하는 거예요.”
그러자 대공의 얼굴이 밤바다를 담은 듯 어둑하고 흐려졌다.
“영애는 제가…… 별로이신가요?”
얼굴은 완전 취향입니다.
하지만 얼굴이 취향이라고 결혼했다면 저는 약 스무 명의 로판 남주들과 결혼했을 거예요.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싫다, 좋다, 분명히 답해 드릴 수 있을 정도로 대공님을 알지 못해요.”
“…….”
“그리고 제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점을 대공님께서도 잘 아실 테고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솔직히 서로를 알기엔 우리 너무 적게 보지 않았니. 사실 지금도 얼떨떨한 심정이라고.
나는 또다시 광증 수치가 올라갈까 초조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기울어진 관계에서 자라는 감정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 점이 걱정되어서 제안 드리는 이야기에요. 물론 제겐 제안할 권리도 면목도 없지만.”
보통 책 속에서는 아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남녀가 필요한 걸 거래하며 명목상 쇼윈도 부부가 되자는 계약을 맺는다.
“대신 대가 없이 시간을 달란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동안에 저도 대공님이 원하는 걸 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원하는 것이라니요?”
“음, 예를 들면…….”
주인공 지젤은 대공에게 자신의 지략으로 알아낸 정보와 계략들을 팔았었지.
그 언니처럼 똑똑하지 않은 내가 팔 수 있는 건, 기억이었다.
얼추 하나 정도는 기억이 났다. 이 소설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였다. 이거라면 이 남자에게도 도움이 될 듯했다.
“그 상단의…….”
“영애가 저를 좋아할 수 있게 노, 노력해 주세요.”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내 말을 가로막은 대공님은 그 커다란 어깨를 살짝 접은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체격에서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연약함을 보며 소설 속 냉혹한 군주는 그 어디에도 없음을 확인했다.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저 성격을 어떻게 원래 대로 돌려놓지.’
너무 갑작스럽게 시작해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두 번째 메인 퀘스트였다.
사실 마음 한구석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왜 지젤은 계약 결혼까지 제의하고서 사라졌는가? 대공의 광증이란 대체 뭘까?
아직 밝혀낸 것은 거의 없는데, 불안 요소는 너무 많았다.
나는 뒤틀린 원작을 원래의 이야기로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이 똥을 치우고, 결말을 보고, 끝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럼 영애가 제안한 걸 받아들일게요, 계약 결혼.”
대공이 유순하게 웃었다.
“……그 단어에 그리 좋은 기억이 있지는 않지만.”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때 느꼈어야 했는데.
“영애가 지워…… 주셨으면 좋겠어요.”
“좋아요, 대공님.”
광증이란 속성을 가진 사람이 절대 유순할 수만은 없다는걸.
“저도 노력할 테니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대공님.”
이때에는 몰랐지.
그냥 단순히 제2의 래빗이라 생각하고 대하면 될 줄 알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