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92화 (92/281)

◈92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9)

* * *

저택을 나오자마자, 남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퀘스트(메인) - ‘북부 대공 프로듀스! 계약 결혼을 완수하라!’의 조건 달성! (달성도: 5%)]

뭐야. ‘계약 결혼’을 하게 된 게 메인 퀘스트 조건 중 하나인데, 달성도가 이 정도로 낮다고?

아무래도 두 번째 메인 퀘스트는 육아물 때랑은 체크 기준이 다른 것 같은데.

세상에, 매번 바뀌다니. 이 세계 난이도 무슨 일이냐, 정말.

사실 이 관계에서 갑은 누가 봐도 대공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내가 제안한 시간을 달라는 내용의 계약 결혼에 응했다.

내가 기간이 다 지나고 ‘끝내 너를 사랑하지 못했다’ 해 버리면 끝날 일이라는 걸 대공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래도 바로 계약서 작성하자고 한 건 좀 너무했나. 그래도 나름 눈치 본 건데.’

기왕 여기까지 진행되었으니 조금만 더 빠르게 가도 좋겠다는 심정에 그만 너무 서둘렀던 거 같다.

아무튼 계약 결혼도 계약이다 보니, 내가 기간을 물어보자 대공은 무척 고심했다.

사실 메인 퀘스트 제한 시간은 30일이었지만 계약서에는 대공님이 말하는 기간을 적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혹시 중간에 대공님한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해지하셔도 된다고 했더니…….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가 1 올랐어요! 현재 광증 수치: 19]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5 내려갑니다! 현재 호감도: 67]

젠장, 광증 수치가 1이나 더 올랐다.

“그, 그럴 일 없습니다!”

거기다 펑펑 울어 버리는 바람에 막 차를 가지고 들어온 알베이트와 뒤따라 들어오던 카닌카에게 남몰래 죽일듯한 시선을 받았다. 전 억울해요, 억울하다고요.

그렇게 얼추 논의를 마치고, 계약서는 다음에 작성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혼인 서류 제출은 보류하기로 했으니, 이걸로 일단 한숨 돌렸다.

슬쩍 돌아보니 직접 배웅하겠다고 쭐레쭐레 따라 나온 대공님이 보였다.

발그레한 표정 때문에 커다란 강아지를 뒤에 달고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언제 영지로 출발할지 저희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건데요…….”

당연하겠지만 결혼 준비에는 내가 북부 영지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레스터풀 대백작가와는 어떻게 되셨나요?”

“아…… 카닌카가 어떻게든 투자금을 되돌려 받을 거예요.”

음, 더는 묻지 말아야지. 어떻게 받을 건지도 묻지 말아야지. 도망간 그 숙부님의 최후가 안타깝지만은 않았다.

그 숙부님이 도망치는 데 성공했으면 부친이 모두 뒤집어썼을 수도 있었다. 그럼 우리 집안은 정말로 망했을 거라고.

나는 흡족하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이유로 투자한 돈이었지만 어쨌든 조건에 혼약이 들어가 있었고, 결국 틀어졌으니…… 꼭 받아야겠지요.”

“다른 이유로 투자하셨다구요?”

내 질문에 대공님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네. 레스터풀 영애의 그 이야기가 아니었더라면…… 아니, 아니에요.”

잠시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대공이 느릿하지만 우아하게 말을 흐리고 마무리했다.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이 일순 사나워지는 것을 보고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쪽도 사나운 얼굴은 꽤 무섭긴 하네. 난 어쩌다 이런 남주가 나오는 소설만 골라 읽어서…….

“그, 저희 부모님은 저희가 서로 마음이 통했다고 알고 계세요.”

부모님께 이미 대공님을 좋아한다고 밝힌 이상 계약 결혼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야 했다.

혹시라도 아시게 되면 딸을 팔았다는 자책감에 시달리실 거였다. 그런 분들이었으니까.

“제가 계약을 제안 드린 건 비밀로 하고 계속 사랑하는 사이라고 밝혔으면 좋겠어요.”

“네? 사…… 사, 사.”

“사랑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3) 현재 호감도: 70]

아휴, 감사합니다, 대공님.

“네, 사랑요. 저는 부모님께서 그렇게 쭉 믿으셨으면 좋겠어요. 이미 몇 번 말씀 드렸지만 저는 그간 몸이 안 좋았었고, 이것 때문에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거든요. 되도록 제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어요.”

음, 나중에 두 번째 메인 퀘스트가 마무리되면 이혼하고 돌아가게 될 텐데, 그때는 계약 결혼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서 충격을 완화시켜 드리자.

좋아, 완벽한 계획이야.

마음 한구석엔 얼굴 취향이겠다, 성격 온순하겠다, 이런 남자라면 이성으로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뭐, 지금 당장은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좋아요, 영애. 말씀하신 대로 따를게요.”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서브) - ‘떠나요~ 설산으로~’

북부 대공님은 이제 임무를 마치고 영지로 돌아갑니다.

계약 결혼을 하게 된 당신, 함께 영지로 갑시다!

※단, 기후가 매우 다르니 만반의 준비를 하길 권장합니다.

내용: ‘남자주인공(북부 대공)’과 함께 북부 영지로 가자.

보상: 건강 수치 8,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 +2, 아이템 ‘사이렌 오더’ 강화 주문서]

* * *

결혼 허락을 받긴 했지만 한동안 에스테가에는 무거운 기운이 가득했다.

부친은 화병 난 사람처럼 뒷목을 부여잡기 일쑤였고 모친은 입맛을 잃었다.

파올로는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살벌하게 생긴 대검을 들고 연무장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매일 같이 가족들을 앉혀 놓고, 오늘은 대공님의 어떤 점에 반했으며 어쩌다 감동하게 되었는지, 또 내가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구구절절 자랑하고서야 겨우 그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달린.”

식을 올릴 정확한 날짜는 일단 북부 영지에 대략 한 달 정도 다녀와 보고서 결정하기로 했다.

하긴 혼인이란 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 정도의 기간을 두는 게 맞긴 했다.

마침 한 달 뒤에는 3황자님의 탄신연이 있어 수도로 돌아오기에 딱 좋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쭉 흘러 내가 북부 영지로 떠나는 날이 하루 앞으로 찾아왔다.

떠나기 하루 전날 파올로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심각한 얼굴로 내 방을 찾아왔다.

“난 안 믿어.”

“뭘 안 믿어?”

나는 퀭한 얼굴로 파올로를 응시했다.

“네가 대공님을 사랑한다는 말 말이다. 내가 그걸 믿겠냐?”

“내가 사랑한다는데 왜 네가 믿느니 마느니 하세요?”

“그게 어딜 봐서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이냐?”

내 얼굴이 지금 이 모양인 이유는 이틀간 엄청난 강행군을 했기 때문이었다. 래빗의 처소를 방문해서 수다도 떨고 그녀를 달래기도 하며 밤을 샌 뒤, 다음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울면서 나타난 리제를 위로하느라 또 한바탕 진을 뺐다.

“흐응, 오빠. 넌 사랑이 뭔지 알고?”

내 짓궂은 질문에 파올로의 심각했던 표정이 와장창 깨졌다.

“최근에 사랑이 뭔지 아신 건가? 응? 상대는 혹시 내 친구인가? 응?”

곰같이 다부지지면서도 남자답게 잘생겼다 할 수 있는 얼굴이 잠깐 창피함으로 붉게 물들었다.

“트리샤 양과는 관련 없는 일이야. 아무런 일 없거든?”

“흐음? 난 내 친구라고만 했지 리제라고는 안 했는데? 나 친구 또 있다?”

“누구?”

“황녀님?”

파올로가 아프지 않게 내 뺨을 꼬집었다.

“심각한 얘기를 못 하게 하지, 아주.”

“아아, 아파! 황녀님에게 이를 거다!”

“그래, 일러라, 일러.”

파올로가 우리 래빗의 정의의 딸랑이에 맞아 보지 못해서 일러 보라는 소리를 이렇게 쉽게 하는 거다.

그 딸랑이에 참교육 당해 본 3황자님의 증언에 의하면 인생이 개조되는 느낌이라던데.

한번 겪어 봐야 여동생의 연약한 살갗에 손댈 생각을 못 하지.

물론 다 엄살이고 정말 아픈 건 아니어서 난 입을 삐죽였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파올로.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으니 안심해.”

“……그건 어느 날 갑자기 황녀님의 유모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롤린, 그곤 내게 다가오게 만들었던 것과 같운 ‘계시’ 때문에 생긴 일이더냐?”

이틀 전, 래빗이 물었던 질문이 생각나서였다.

그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래빗은 잠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축복하겠다고 했다.

동시에 ‘수하룰 절대 혼쟈 두진 않게땨!’ 하고 뜻 모를 말도 했었지.

지금 내가 파올로에게 할 대답도 다르지 않았다.

“응, 맞아. 내가 황녀님과 그동안 계속 잘 지내는 거 봤지? 이번에도 아무런 문제 없을 거야.”

“…….”

파올로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긴 침묵 끝에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가서 안전하게만 지내라.”

파올로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파올로가 너무 염려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이건 내가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 퀘스트 확실하게 완수하고 돌아올 거니까.

눈앞에 닥친 일부터 생각하자.

‘어차피 안전하게 잘 다녀올 테니까.’

그리고 나는 얼마 뒤 ‘북부 영지’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했단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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