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2)
“안녕하십니까, 영애.”
문을 두드린 사내는 덩치가 파올로만큼이나 크고 웃는 것이 호탕하면서도 인자한 기사였다.
벌써 8일이나 함께 한 탓인지 나는 함께하는 기사단 중 주요한 사람의 얼굴은 익은 상태였다.
현재 함께하는 이들은 특무단 제 3사단 사람들이었다. 그중 여기 눈앞의 사람은 3사단의 부대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제타르 경.”
세 살짜리 딸이 있다던 제타르 경은 그래서인지 가끔 나를 정말 세 살, 아니 근력이 세 살만도 못한 사람으로 보곤 했다.
“예, 혹시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열린 창문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건 아닐 테고, 겨울을 품은 도시가 아주 가까워진 탓일 터였다.
“네. 배고프진 않아요. 아직 점심이 다 꺼지지 않아서요.”
“이런, 요리를 담당하는 요엘이 들으면 슬퍼하겠군요. 영애께서 일곱 살인 자기 딸보다 잘 못 먹는다고 슬퍼합니다.”
“……수도에선 이게 정상이에요.”
북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녀를 불문하고 파올로처럼 덩치가 평균보다 컸다. 그건 어릴 적부터 많이 먹은 덕분이라면서.
“요리가 맛이 없는 건 절대 아니니까 요엘 경이 저 때문에 실망하지 않으면 좋겠네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포기를 모르는 전형적인 북부 인간이니.”
오늘도 두 그릇 먹이기에 실패하면 또 다른 재료로 도전할 거란다. 그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대장님께서는 먼저 앞서 나가 도시를 보고 계십니다. 오늘은 무리겠으나 내일은 아마 도시에서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아, 전달 감사해요.”
그럼 그 사이에 대공님은 하루 거리를 앞질러 버렸다는 건가? 그건 좀 대단한데.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제타르 경이 다시 말을 걸었다.
“고작해야 8일이긴 합니다만, 영애께서 쉽지 않은 여행길을 잘 견뎌주셔서 저희 모두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예? 제가요?”
“네. 전달받기로 영애께서는 부딪치기만 해도 부러지는 연약한 몸을 가지셨다고 들었는데.”
파올로 그놈의 머리를 뽑아놓을 테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아니라도 중앙의 숙녀와 귀부인에게 북부까지의 길이란 험난한 여정이긴 합니다.”
“제가 잘 도착했다면 그게 제 덕이겠어요? 여기까지 잘 동행해주고 신경 써주신 특무단 분들 덕분이죠. 그리고 대공님께서 챙겨주신 덕이 제일 크겠구요.”
특무단을 칭찬하며 그들이 충성하고 아껴 마지않는 대공님의 칭찬도 당연히 곁들였다.
제타르 경은 인자하게 웃더니 곧 조금 장난스럽게 미소했다.
“뭐, 영애를 판단하기에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습니다만 저희 3사단은 영애의 편을 들기로 했습니다.”
“네?”
제타르 경이 그 말을 하기 무섭게 뒤쪽에서 워후! 워후후! 하는 기사들의 힘찬 함성이 들려왔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대장님께서 정략혼을 진행할 때에 대공 가 내 특무단, 친위대를 비롯한 가신들의 반응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레스터풀의 만행까지 이어졌으니……. 그 결혼이 엎어진다니 다들 분노 반, 맘에 안 드는 레스터풀을 부숴버리자며 신난 마음 반 정도로 영지전을 강행하자고 부르짖었죠.”
그리 강하지 않는 바람이 싱싱 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는 과거를 가만히 읊조리는 제타르경의 얼굴은 흥분으로 달아오르기도 했다가 찡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대장님이 어느 날 갑자기 영애께 청혼을 하셨다지 뭡니까?”
음,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레스터풀과 정략혼이 맘에 안 들던 차에 좀 엎어지나 싶더니, 이번엔 내가 등장했다 이거구나.
그래서 에스테 저택에 나타났을 때나, 대공가 저택에 갔을 때 다들 날 노려봤던 건가 보다.
……어째 이것도 퀘스트가 결코 쉽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는 건가.
지젤 그 언니는 쉽게 쉽게 갔던 것 같은데. 나는 끄응 한숨을 쉬었다.
“조심하십시오, 영지에는 영애가 대공님께 사술을 쓴 건 아닌가 의심하는 과잉 충성도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내 한숨이 더 깊어졌다. 제타르 경의 이해한다는 시선을 받으며 난 살짝 아미를 찌푸렸다.
“저, 제타르 경은 왜 이런 걸 저에게 알려주시는 거죠?”
“아, 저희 3사단은 영애의 편을 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왜요?”
제타르 경은 잠시 눈을 굴리다가 인자하게 웃었다.
“3사단엔 애 아빠들이 많습니다.”
“그게 왜요?”
“의도한 바는 아니나 어린 동생을 둔 단원도 많아서, 다들 영애를 각자의 아이에 이입하더군요.”
“그것참, 반갑다기엔 뭐한 친절이네요…….”
난 멀쩡한 성인 여성이라고, 이 사람들아.
“애초에 그런 식이면 저 같은 젊은 영애를 보면 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쩐지, 내가 어쩌다 밥을 깨끗이 비우면 지나치게 흐뭇하게 본다 싶더라니.
하지만 제타르 경의 친절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반쯤 장난으로 건넨 호의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앞으로 있을 상황을 짐작할 수 있고 또 대응도 할 수 있게 된 거니까.
“그건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꼬리를 친다면 저희가 대공가만의 개라 부르짖을 수 있겠습니까?”
이들 특무단의 상징은 들개였다. 늑대랑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생긴 문양이 가슴팍에 수 놓아져 있었다.
“저희 3사단은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다 보니 특히나 감이 좋습니다. 원래 새끼가 있는 짐승들이 더 예민하고 감이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
“영애에게서 느껴지는 감이 좋았습니다. 아 물론, 평생 상상도 못 했던 대장님의 모습을 본 것도 한몫했지만 말입니다?”
제타르 경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영지에는 아마 충성심이 넘치다 못해 이를 증명하지 못해서 몸이 달아있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것들은 이런 좋은 감을 느끼더라도 무시할 테니 감히 드리는 조언이지요.”
북부 사람들은 대체로 우직하고, 호탕하며, 본인들끼리의 결속이 강하다.
몬스터와 마수로 둘러싸인 환경 탓에 전통적으로 우두머리를 향한 충성이 강했고 특히나 누구보다 강한 대공을 향한 충성은 하늘을 찌르는 상태.
리제가 준 북부 관련 정보들이 벌써부터 상황을 판단하는데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어떤 의도신지는 몰라도 저는 받은 호의나 은혜는 잊지 않아요.”
“오, 별말씀을. 그런 부분은 저희 북부 인간들의 성향과 비슷하시군요.”
창밖으로 조금 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내 몸이 절로 파르르 떨렸다.
이렇게 꽁꽁 싸매도 추위가 느껴지긴 하네.
“아! 영애 추우십니까?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이고,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얼른 전달사항만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저녁엔 대장님도 오실 예정이고, 오늘만 좀 위험한 구간을 지날 겁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출발할 때 중간중간 몬스터가 나오는 지역을 지나간다고 전달받았었다.
“네. 전달 고마워요. 제타르 경.”
“아,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영애와 너무 오랜 이야기를 나누면 대장님께 혼납니다.”
“네?”
“내용은 발설되어도 상관없는데 제발, 오 분 이상 대화했다고 전하지만 말아 주십사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영애!”
작은 웃음 소리와 함께 마차에 붙어있던 말이 살짝 떨어졌다.
제타르 경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치는 것과 동시에 기사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섞였다.
‘저 사람도 참, 은근히 호들갑이 심하네. 파올로 과인가.’
그나저나 대공도 참 대단했다.
언제 하루 거리를 앞질러 갔으며, 그걸 또 다녀왔다가 저녁엔 여기로 돌아온다고?
제타르 경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눈물이 많긴 해도 나머지 능력은 책 속 대공 그대로라는 거겠지.
북부는 무(武)와 검을 숭배하는 곳.
눈물은 굉장히 많지만 무의 정점을 찍다 못해 수하들의 열렬한 충성심을 이끌어낼 정도로 실력이 대단하다고 봐야 했다.
‘팔 일간은 다행히 호감도만 올랐지.’
천만다행으로 광증 수치가 오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광증’이라는 증상에 대한 정보가 없다.
리제가 준 정보 모음집에도 이에 대한 건 따로 없었다.
몬스터나 마수를 엄청난 솜씨로 베어버렸다는 이야기 같은 건 있었지만.
우선은 앞으로도 호감도만 쭉쭉 올라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 * *
그날 저녁.
도시에 다녀왔다던 대공이 돌아온 건 꽤 늦은 시간이었다.
돌아오자마자 대공은 나를 찾아왔는데, 몹시도 놀란 표정이었다.
“저,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다고요?”
“네? 네.”
마차에 앉아 있다 그를 마주한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몰아쉬고 있진 않았지만 대공에게서 다급한 기색이 느껴져서였다.
“어째서 식사를 하지 않으셨나요? 혹시 어디가 아프신가요?”
“네? 그건 아니고, 그게…….”
“입맛이 맞지 않으셨습니까? 아니면 혹 식사를 거를 정도로 누가 거슬리게 했나요?”
잠깐, 잠깐만. 이 대공님이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잠깐 말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인데 이야기가 홀로 안드로메다로 떠났다.
“어려우시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우선 식사 담당부터 때려 눕혀보면 알겠지요…….”
“네? 네? 아니요! 아니요,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