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99화 (99/281)

◈99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6)

* * *

사흘을 더 달려 오전.

우리는 마침내 북부 영지의 중심부, ‘체단’ 영지에 도착했다.

체단은, 리제의 보고서에 적힌 것처럼 높은 산을 등진 거대한 영지였다.

글로 읽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나는 마차 안에서 작은 창문에는 도저히 다 담기지 않는 거대한 풍경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와…….”

새하얀 눈은 마치 설탕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거기다 성벽은 회색인데 멀리 보이는 영주 성은 눈을 쌓아 만든 것처럼 새하얬다.

마치 설산 앞으로 산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참을 수 없어서 창문을 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때렸지만 내 감탄을 막을 순 없었다.

“이런, 춥진 않으십니까?”

“아, 제타르 경!”

제타르 경이 말을 창문 쪽으로 붙였다.

“대공님은요?”

“먼저 성문 쪽에 가셨습니다, 곧 저희도 마차를 세울 겁니다.”

“아하.”

나는 끄덕이고는 얼른 풍경 쪽을 가리켰다.

“세상에,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너무 멋져요, 칭찬하는 솜씨가 부족하지만 아주 멋져요! 최고!”

“영애의 표정만으로 충분히 알겠습니다. 제 딸아이가 초콜릿을 볼 때보다 솔직한 표정이십니다.”

그놈의 딸 비유는 계속할 건가요? 나는 헛웃음을 짓다 이내 작게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몬스터를 맞이하고 대공님의 광증을 처음 본 날로부터 사흘, 짧은 시간이지만 기사들과는 더 가까워진 상태였다.

전적으로 이들이 더욱 친근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허물없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고, 더 친절해진 느낌? 가끔 과해서 문제긴 했지만.

광증 증세를 처음 본 밤 이후 다음 날 아침부터였다.

“이렇게 된 이상 제타르 경의 사랑스러운 따님은 꼭 한번 만나야겠어요. 아는 조카가 생긴 기분이네요.”

“이런, 영애께선 한번 보시고 푹 빠지실지도 모르지만,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초대하겠습니다.”

제타르 경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슬쩍 웃음을 지웠다.

“영애,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뭐를요?

“아, 대장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면 말을 걸기 곤란해집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기에 그러세요?”

제타르 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저희 3사단은 영애의 편을 들기로 하였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네.”

“진심으로 영애의 편이 될 예정이니, 이 말씀은 꼭 드리려 합니다.”

“이전엔 장난이었단 얘기로 들려요.”

“그건 아니지만, 이젠 단순히 조언이 아니라 영애의 위험까지 고려하고 싶어졌단 말씀입니다.”

제타르 경의 한 손이 가슴 위로 올라갔다.

장갑 낀 커다란 손이 특무단의 상징을 덮었다.

“저희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영애님께서 대장님께 진정 필요한 분이신 것 같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제타르 경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영애께서는 성에 도착하는 대로 가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참석하시게 될 겁니다. 인사 자리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네.”

“아니, 상황 상 거의 곧바로 참석하셔야 할 겁니다. 분명 영애가 여독을 푸는 그 잠시도 기다리지 않을 작자들이 득달같이 자리를 만들 겁니다. 북부 인간들은 성질이 불같고 급하거든요. 보는 게 눈과 추위밖에 없으니, 인간들이 내면의 열기를 폭발시키는 쪽으로 발달했지요.”

제타르 경의 인자하던 얼굴이 잠시 찌푸려졌다. 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 자리에 간다면 조심해야 할 작자가 몇 있습니다. 특히나 다혈질인 이들과, 특히나 충성스러운 자들. 마지막으로 특히나 음흉한 자들.”

지금 제발 녹음기가 있다면 너무 좋겠다. 소설 하나 기억 못 하는 내 머리가 이 얘기들을 모두 기억할 수 있을까?

달린아, 생존이 달렸으니, 잘하자.

“얘기해 주세요, 저 바짝 집중하고 있어요.”

적진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바짝 정신을 차렸다.

머릿속에서는 에스테 저택에 찾아왔던 마법사 카스카와 2사단 부대장 롬테를 떠올렸다.

그 두 사람의 결코 달갑지 않게 바라보던 시선까지도.

“우선 셋 중 다혈질인 자는 외성 수비대장입니다. 제일 몸집이 크고, 주먹코를 가졌으니 쉽게 알아보실 겁니다.”

“네.”

“푸른색 마법사 로브를 입은 자와 검은색 곰 가죽을 어깨에 걸친 내성 수비대장은 둘 다 과잉 충성도들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오케이, 오케이. 곰 가죽이라. 자연스럽게 가죽을 걸친 커다란 실루엣을 떠올렸다.

“이 중 마법사 쪽은 적당히 마이 페이스라 그나마 덜할 것이나 내성 수비대장은 집안 대대로 대공가에 충성해 온 자입니다. 다만 이쪽도 부딪치지만 않으면 될 테니 웬만하면 무시하십시오.”

“무시…… 가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대장님과 함께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나는 바로 이해했다.

적어도 대공님이 보고 있을 때는 시비를 걸지 않을 테니 조심하라는 말, 좋아 좋아.

나는 제타르 경이 일러 주는 덫과 함정들을 차근차근 머리에 입력했다.

‘끝으로’ 하고 말을 잇는 제타르 경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지지더니 표정 또한 심각해졌다.

“가장 경계하셔야 할 것은 총관과 서기관입니다. 성의 경영과 재무를 돕는 자들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음흉한 인간들입니다. 무관이 득세한 곳에선 머리를 뱀같이 굴리는 자들을 특히 주의해야 하는 법이죠.”

제타르 경이 한숨을 내쉰 뒤 진지한 충고를 덧붙였다.

“검을 다루는 인간들은 단순한 편이라 주먹으로 모든 걸 해결하지만 이런 자들은 세 치 혀를 놀려 제 주먹 대신 남의 주먹을 이용하니 말입니다.”

어째 말하는 내내 제타르 경이 더 고민이 많아 보여 나는 그저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예쁘게만 보이던 영지가 어느새 검은 손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소굴로 보이는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국 ‘힘’이 최우선인 영지에서 가장 강력한 분은 대장님이시니까요. 이곳에선 그분이 곧 법입니다.”

“네, 고마워요. 제타르 경.”

제타르 경이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보통 저런 경우는 대공님이 근처에 있다는 소리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마차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쉽진 않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상상 이상이란 거지.’

거대한 성벽이 눈앞에 있었다.

* * *

“종 아르테반이 설산의 주인을 뵙습니다.”

거대한 성문 앞에는 꽤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대공 전하,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전하!”

“전하, 더 늠름해지셨습니다! 전하 만세!”

성내로 진입한 뒤부터 연이은 환영에 마차가 느려지다 못해 멈추는 상황과 계속 마주한 탓에 나는 조금 지친 상태였다.

다들 어찌나 목소리가 크고 왁자지껄한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영지민들의 모습에 그대로 기가 살짝 눌렸다고 할까.

웅성거리는 소리 중 간간이 나에 대한 얘기도 들렸는데, 다들 관심이 많은 것은 분명했으나 대체로 달가워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저 여자가?”

슬쩍 창문으로 내다봤다가 어떤 아저씨랑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가 바로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고 난 후로 커튼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반응이 화끈하다 못해 험악하시더라고. 나더러 마른 꼬챙이랬나.

음, 어떤 의미로 그렇게 얘기한 건진 알겠지만, 서로를 위해 마주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었다.

‘흐음, 영지민들의 반응까지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원작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었던가?

어렴풋하긴 한데, 지젤 그 언니는 처음부터 술술 잘 풀렸다는 것만 기억났다. 근데 난 왜 이렇지.

그렇게 성내를 지나 내성에 도착했다.

도개교를 건너서 영주 성에 다다르고서야 비로소 마차에서 내렸는데, 내겐 다행스럽게도 걸어야 하는 거리가 길지 않았다.

“와, 여기까지 마차가 들어오는 건 처음 봐.”

“조용히 해, 인마.”

뒤를 따라오는 단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되도록 짧게 걸을 수 있도록 대공님이 나를 배려한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감사한 일인걸. 건강 수치가 많이 올랐다고는 하나 오래 걸어서 좋을 건 없었다.

앞에서는 남은 가신들이 열심히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종 하르간의 첫째 아들이 설산의 주인을 뵙습니다.”

북부 사람들은 바깥에서 인사를 올리는 게 전통인 걸까.

막 두 번째 사람이 인사를 올렸을 무렵.

“엣취!”

차가운 바람에 나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고, 이걸로 뚝 인사가 끊기더니 주변 공기가 싸늘해졌다.

아, 맙소사. 입 다물고 있을걸, 이놈의 재채기도 참아 볼걸!

등 뒤로 살짝 식은땀이 흘렀다.

“영애? 추우세요……?”

대공님은 매우 놀란 기색이었다. 마치 일어나선 안 될 일을 본 사람처럼. 왜 이러지?

“네? 네? 아뇨.”

“얼굴이…….”

대공님이 나를 보며 눈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울상을 짓지 않는 얼굴이 신선하다, 느끼기 무섭게 울상이 되었다.

“성 주변엔, 추위를 방지하는 마법이 깔려 있을 텐데?”

차가운 목소리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리바, 마법은?”

“으음, 으으음, 깔았지요. 분명 깔았을 텐데요…….”

사람들 중 푸른색 로브를 걸친 노인이 어물어물 말을 흐리며 눈을 피했다.

푸른 로브. 제타르 경이 조심하라고 했던 사람 중 하나인가?

“똑바로 말해……. 지금 발동이 안 됐다고 하는 거야?”

대공님이 눈을 살짝 찌푸린 순간 리바라 불린 노인이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제 제자가 말입니다. 데생트!”

“네? 네? 네?”

“이놈, 이런 마법 하나 제대로 구사를 못 하고! 에잉, 이러면서 무슨 대공가 제1마법사 직을 노리겠다는 거냐!”

노인이 지팡이로 웬 젊은 남성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남성은 맞으면서도 아주 잠깐 울상을 지었을 뿐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으, 으엉, 네, 네! 잘못했습니다……. 제, 제가 아직 마법이 미숙하여!”

“미숙?”

“이런, 전하. 데생트 님이 아무래도 토벌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실수한 모양입니다.”

“아르테반.”

마찬가지로 덩치가 크고 이들 중 유일하게 안경을 쓴 깐깐해 보이는 남자가 젊은 남자를 옹호하고 나섰다. 이에 대공님이 그 자를 부르는 순간.

[서브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서브) - ‘친해지길 바라, 안 친해지면 쟤가 죽음!’

축하합니다! 북부 영지에 무사히 도착한 당신!

그러나 북부 영지의 가신들은 당신을 전혀 반기지 않습니다. 어떡하면 좋아요, 가신들 대부분은 멋대로 사라져 버린 ‘여주인공’의 잘못까지 당신 탓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약 결혼의 진정한 해피 엔딩을 위해서는 이 가신들과도 가까워져야 합니다.

가신들과 친해져 봅시다!

내용: 특정 가신 3명의 신뢰도를 50 달성

외성 수비대장 ‘가르카’ : -30/50

내성 수비대장 ‘칼리’ : -15/50

제1마법사 ‘리바’ : -28/50

실패 시: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발작.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 -20

보상: 건강 수치 10, 새로운 스킬, 아이템 ‘사이렌 오더’ 강화 주문서, 히든 피스 단서

※주의하세요,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가 올라갑니다!

기한: 10일]

한동안 퀘스트가 안 뜬다 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듣자 하니, 조금 전에 자기 제자 때리고 발뺌한 노인장이 마법사 리바구만.’

사실 마이너스 호감도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육아물 퀘스트를 진행할 때를 생각해 보라.

우리 래빗이 폭군을 향해 느꼈던 그 충격과 공포의 호감도 –118이란 수치를 보고 나면 뭐…….

이 정도야 봄바람이구만, 허허허허.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평화로운 건 나뿐이었단 거다.

“미숙이라……. 미숙해서 제대로 걸지 못했고, 토벌에 다녀와 피로하여 유지가 어려웠다…….”

대공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분명 울망울망한 눈인데, 어째 등 뒤가 싸했다.

“그 미숙함으로 네 생명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똑같이 얘기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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