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7)
그 말에 젊은 마법사 데생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졸지에 제자를 잃게 생긴 제1 마법사 리바의 표정도 만만치 않게 창백해졌다.
안경을 쓴 남자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전하, 전하의 말씀은 곧 법입니다. 하오나 데생트 경은 미래가 촉망되는 훌륭한 마법사로서……!”
“아르테반……. 난 네게 묻지 않았어. 너도 성을 관리하는 총관으로서 할 말이 없진 않을 텐데.”
아르테반이란 남자가 움찔했다.
“에스테 영애가 이 먼 길을 이리 고생하면서 달려왔는데, 준비된 것이 고작 얄팍한 변명 따위밖에 없다니…….”
“…….”
“게다가 순서를 지키지 못하고 나서는 건 함께 죽고 싶은 걸까?”
대공님이 시무룩한 얼굴 그대로 느릿하게 말했다.
분명 몰골은 버림받은 듯 처량한 강아지에 가까웠으나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잠깐, 이 대공님 이렇게 순한 얼굴로 하는 말들은 왜 미쳐 가는 건데!
점차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상 상황 감지! 추가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서브) - ‘네가 미쳐 가는 소리가 들려!’
이런, 위기의 순간!
10초 후 북부 대공님은 또 한 번 광증으로 발작을 일으킬 예정입니다!
앞으로 발작이 있을 때마다 광증 수치는 대폭 오르고, 호감도는 대폭 하락합니다.
발작이 진행될수록 광증 단계가 심화됩니다.
지정되지 않았던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더 심해지기 전에 얼른 막아 봅시다!
내용: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발작 막기 (총 3단계)
1단계 – 초기 발작 (1/1) (클리어!)
2단계 – 심화 발작 (0/3)
3단계 – 최종 발작, 배드 엔딩 (0/1)
보상: 건강 수치 15, 새로운 스킬,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발작 종식,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 +20, 세 번째 소설의 히든 피스 단서
실패 시: 배드 엔딩
※주, 배드 엔딩 시 당신을 제외한 모든 북부 영지민이 사망합니다.
기한: 19일]
“대공 전하!”
벼락같은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앞으로 나선 대공님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손에는 검이 들린 채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전하, 잠시만, 잠시만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예?”
“힘으로 해결해.”
으아악, 대공님 앞으로 막아선 남자가 엄청난 고함을 질렀다.
대공님의 검을 겨우 막은 채였다.
“제가 어떻게 이깁니까!”
힘겹게 맞서고 있는 것은 중년 남성이었다.
거인이란 칭호가 걸맞겠다 싶을 정도로 덩치가 거대했다.
거기다, 주먹코.
저 사람이 제타르 경이 조심하라고 했던 외성 수비대장이구나!
퀘스트에도 이름이 있었지. 외성 수비대장 가르카.
“법도에 어긋나는 일임을 압니다, 전하! 하지만 재고해 주십시오! 저 마법사 양반이 없으면 제 부하들이 죽어납니다!”
가르카가 먼저 움직인 덕에 그 뒤로 몇몇이 더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다들 난감하거나 두려운 표정이었다.
“아르테반은 데생트 님을 생각해서 나선 걸 겁니다. 사람이 어찌 실수도 하지 않고 살겠습니까? 전하, 데생트 님의 공로를 생각해서……!”
몇몇은 나를 향해 증오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기도 했다.
“오늘따라 다들, 제멋대로네. 하필 귀한 손님이 오신 날에…….”
대공님의 시무룩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얼른 걸음을 디뎠다.
[알려 드려요, 3초 후 광증 발작! 현재, 진행 예정인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단계는 2단계입니다! (0/3)]
뾰족한 시선들이 송곳처럼 느껴졌지만 그게 지금 문제냐! 폭발을 막아야 한다고!
“저어, 대공님.”
난 황급히 대공님을 부르며 다급한 마음에 옷자락부터 잡았다. 옆얼굴을 보았는데 이미 눈이 거의 맛이 간 수준이었다.
‘사, 사람을 몬스터로 본 댔나?!’
옆에 있다가 제일 먼저 칼 맞는 건 아니겠지? 떠올린 것만으로도 오싹오싹했다.
‘엠버넷 씨! 위험해지면 나 좀 도와줘요!’
속으로 엠버넷의 희미한 대답을 들으며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얼른 떼어 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대공님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막 초점이 사라지던 눈동자가 날 담는 순간 난 흠칫했다.
놀랍게도 순식간에 초점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영애.”
“네, 대공님.”
아, 이번엔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되는 건가? 하지만 아직 오싹함이 가시지 않았다.
폭군 앞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무시무시한 기운. 정제되지 않아 더욱 흉악하게 느껴졌다.
“휴고 렉타르 체단 대공님…….”
나는 옷자락을 꾸욱 잡았다. 머뭇거리다가 손을 슬쩍 내려 이번엔 장갑 낀 손을 살짝 잡았다.
우리 한 번만 참자, 대공님이 한 번만 참자.
날도 춥고 바람은 거세고 말도 오래 타셨는데, 제발 안에 들어가서 쉽시다. 흑흑.
대공님이 나를 온전히 담는 순간 날카롭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창백하게 질린 낯 위로 내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혼난 강아지 같은, 놀라고 시무룩한 표정이 떠올랐다.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발작 2단계를 막아 냈습니다! (1/3)]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85]
“아, 제, 제가 지금, 또 무서워졌나요? 광증을, 보였어요? 사람을 모, 몬스터로 봤어요?”
나는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요.”
그리고 한 번 더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셨죠. 아직은.”
그러고는 슬쩍 마법사들 쪽을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젊은 데생트 쪽은 움찔했지만, 리바는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래, 내가 저들을 회유해야 한단 말이지.
“마법사님께서 실수를 하신 것 같은데…… 사람이면 누구나 실수를 하고 살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대공님.”
리바의 눈썹이 움찔했다.
“하지만 영애, 어떤 실수는 생명을 거둬도 모자랄 수 있어요…….”
대공님이 눈을 글썽거리면서 살벌한 소리를 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죽음으로 갚는 것 외엔 방법이 없지 않을까요?”
네? 지금 정상으로 돌아온 거 아니었나?
이 무구한 표정의 대공님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조금 춥게 만들었다고…… 죽으면 저 사람이 제 꿈자리에 나올 것 같아요. 제가 편히 못 잡니다.
“감히 대공님의 판단에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되지 못하지만.”
그러고 보니 아직도 엉겁결에 잡았던 그의 장갑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눈치를 보듯 눈을 깜빡이면서.
“오늘은 제가 처음 대공님의 성에 방문한, 제겐 무척 뜻깊은 날인데, 혹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신다면 피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할게요.”
냉큼 튀어나온 대답에 내가 더 놀랐다.
양순하게 내려간 눈꼬리가 나에게만 고정되었다. 와, 이 와중에 옆에서 쏟아지는 시선은 뭐람. 이거 엄청 부담스럽네.
“또 뭘 안 할까요?”
“네?”
“영애의 말대로 할게요.”
“그으, 그럼 이만 들어가는 건…….”
“네!”
눈물이 차올랐던 발긋한 눈으로 미소가 스쳤다.
해사한 얼굴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취향의 얼굴이 방긋 웃고 있는데, 어느 덕후가 홀리지 않을까?
물론 그건 그거고, 지금 내가 취한 행동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래빗과 황실 사람들의 관계를 해결할 때는 가족들을 잘 포장해서 래빗에게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 포장해야 할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가신들에게 점수 좀 잘 따 보자고 이런 건데.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됐던 건지, 주변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이미 술렁거렸다.
“지, 지금 전하의 눈이…… 원래대로…….”
“봤소? 당신도 봤소? 내 지금 전하께서 미친 소처럼 날뛰지 아니한 걸 본 거요?”
“예끼 이 사람아, 어느 앞이라고, 닥치시오!”
목소리가 큰 건 북부 사람들 특징이었나? 아니, 그럴 거면 귓속말하는 제스처는 왜들 하시는 거죠?
“무엇보다 지금 전하께서 저 여인의 말을 들었…….”
나는 나름대로 덩치를 숙여 쑥덕이는 가신들을 조금 황당하게 보았다.
“영애…….”
“앗, 대공님!”
그러나 가신들을 신경 쓸 시간은 없었다.
이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대공을 달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영애. 영애가 춥다고 한 걸 잊었어요……. 북부에선 전혀 춥지 않은 날씨라.”
어느새 대공님의 커다란 망토가 내 어깨에 폭 덮였다. 나는 엄청난 무게에 휘청거렸다.
악 무거워! 무슨 망토를 돌로 만들었어?
“영애!”
“하하, 전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대공님.”
이를 본 누군가가 다시 속닥였지만, 마찬가지로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대공님이 당황하며 나를 붙잡았다.
“하, 하지만, 영애 앞에서 또 이성이 나간 모습을 보이고, 이젠 부족한 모습까지…….”
“조금 전엔 아무것도 안 하셨는걸요. 그리고 이제 그리 춥지도 않고. 그러니까 우실 필요 전혀 없으시죠!”
광증 참은 것만으로도 잘했다! 정말 잘했다!
시선이 느껴지거나 말거나 열심히 이 대공님을 달래려 노력한 결과, 대공님이 울음을 겨우 그칠 무렵.
대공님은 태연하게 폭탄을 툭 떨어트렸다.
“나, 영애의 목소리를 들으면 광증이 진정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아직 눈물로 촉촉한 눈으로 날 바라봐서,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말을 꼭 그렇게 젖은 눈, 젖은 목소리로 하셔야 하나요……?
대공님의 열렬한 시선을 피하느라 고개를 돌린 난 누군가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 외성 수비대장 가르카였나?
그런데 그의 눈이 찢어질 것 같이 커지는 동시에 반짝거림이 스쳤다.
“맙소사! 오오, 위대한 신 둑스시여! 제 오랜 염원이 이루어지는 겁니까!”
[인물 ‘외성 수비대장(가르카)’의 신뢰도가 대폭 올랐어요! 38/50]
[인물 ‘제1마법사(리바)’의 신뢰도가 소폭 올랐어요! -20/50]
나는 나를 보는 가신 대부분의 눈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무시무시하게 쳐다보는 몇몇 이들을 빼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