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8)
* * *
달린과 대공 휴고가 자리를 뜬 뒤, 정문 앞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남았다.
남겨진 가신들은 각기 생각에 잠겨있거나 얼떨떨한 표정인 한편, 때로 감격과 환희에 가득찬 이도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 오오. 둑스시여. 하아, 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군.”
감격과 환희에 가득 찬 이 중에는 외성 수비대장 가르카도 있었다.
“경도 말이요? 나도 그렇소. 세상에, 전하의 광증을 가라앉힐 방법을 찾았다니…….”
그는 사실 중앙에서 온다는 예비 대공비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은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대공가를 우습게 본 레스터풀과 뭐, 사촌이라고?
감히 대공가의 위신을 더럽힌 자들은 눈밭에 던져 그 밑의 눈이 흙탕물이 될 때까지 밟아도 모자랐다.
게다가 우리 전하께 수도 출신의 대공비라니! 안 봐도 비리비리할 게 틀림없잖아!
호전적인 가르카는 가신 중에서도 특히나 분개했던 자였다.
하지만 조금 전의 모습을 보고 가르카의 마음은 거의 180도 바뀐 뒤였다.
답이 없을 것 같던 우리 전하의 미래가 처음으로 밝아 보였다. 전하께서 그렇게 금세 진정하다니!
고로, 가르카는 예비 대공비가 평소 무시하던 비리비리한 수도 출신이든 괘씸한 레스터풀이랑 친척이든 상관없어졌다.
아, 물론 대공 전하를 진정시킬 수 있는 존재가 하찮은 벌레였더라도 가르카는 대공비로 열렬히 섬길 자신이 있었다.
한편, 가르카처럼 환희와 기쁨으로 떠드는 이들이 3분의 1 정도라 하면, 남몰래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있었다.
“스승니임, 저 진짜 죽을 뻔했다고요! 예?”
“아, 귀 뚫려 있다, 이놈아. 쯧, 네놈까지 죽이려 들 줄 알았나 뭐…….”
“다신 그러지 마십시오, 스승님. 저 오래 살고 싶다고요…….”
푸른 로브를 걸친 마법사 리바와 그의 제자 데생트였다.
죽다 살아난 데생트의 낯빛은 아직도 창백했다. 아직도 대공의 손에서 새파랗게 빛나던 검이 생생했다.
“스승님이 뭐라 하시든 저는 이제부터 무조건 그 영애님 편입니다! 보셨죠? 영애가 막아 주시지 않았으면 저 진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뒤, 자신은 얌전히 예비 대공비를 따르겠다고 하는 데생트의 선언에 리바는 주름진 눈을 찡그렸다.
“떼잉, 난 마음에 안 드는데…….”
“그건 모르겠고, 저는 생명의 은인을 따를 겁니다! 스승니임!”
데생트가 리바의 로브를 잡고 늘어지자 리바가 결국 찡그리다 못해 외쳤다.
“아, 알겠다 이놈아. 우리도 적극적으로 방해는 안 하면 될 거 아냐.”
리바는 달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애에게서는 이상한 마나가 느껴졌으니까. 북부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기운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들처럼 키운 제자이다 보니, 리바는 데생트를 향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가신들이 저마다 하나둘씩 자리를 옮기려 삼삼오오 모여 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는 겁니까?”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가 좌중에 울려 퍼졌다. 다들 걸음을 멈췄다.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영주 성의 총관 아스테반이었다. 그는 안경을 슬쩍 올리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전하께서 감히 하찮은 백작 영애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못해 들어주시다니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 말을 듣던 누군가가 손을 들며 찡그렸다. 어느 노귀족이었다.
“하지만 아스테반 그대도 보지 않았소?”
“예, 봤습니다. 장로님.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는 거지요.”
아스테반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문 쪽을 향했다. 달린과 대공이 사라진 문이었다.
“방법을 찾았다고 속단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차가운 조소와 함께 뱀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영애가 금지된 ‘흑마법’같이 사술이라도 썼을지,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 * *
“으아, 피곤해…….”
푹신한 침대에 드러누우니,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미 세 시간째 이러고 있는데도 피곤하다.
그도 그럴 게 마차 여행만 거의 열흘을 했다. 아무리 편해도 탈 것은 탈 것. 중간중간 도시나 마을에 머무르긴 했지만 눈이 가물가물했다.
[심한 피로로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 현재 건강 수치: 80]
“……너 갈수록 표정이 다양해진다?”
그리고 뭐, 이 정도 수치 하락은 간지럽지도 않아요.
[요정은 웃으며 방심은 몸에 좋지 않다고 조언해요. 나쁜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 요정 놈이?
반협박 같은 한마디에 나는 창을 조용히 노려봤다. 뭐, 뭐. 간만의 평화 좀 즐기면 덧나냐?
‘가만 보면 이 요정 놈은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고사 지내는 것 같다니까.’
[이런, 요정은 빙의자 님이 살길 바라요! (╥ω╥`)。゚]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
무시하고 다시 누우려 했으나, 아무래도 요정은 나를 그냥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또다시 새로운 창이 눈앞에 떴다.
다행히도 이번엔 쓸데없는 소린 아니었다.
[현재 미사용 중인 아이템 ‘사이렌 오더 강화 주문서’가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어요?]
[아이템 강화 주문서(노말) - ‘사이렌 오더’용
효과: 아이템 ‘사이렌 오더’의 강화를 돕는 재료. 강화 시 능력이 추가된다.
추가되는 능력: 주연이 아닌 인물의 감정을 알 수 있습니다.]
망설임 없이 추가했다. 이번 추가 기능은 지난번만큼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퀘스트에 아주 유용하게 쓰이겠어.’
누워서 팔찌를 쳐다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답 대신 옆에 있던 줄을 잡아당기자, 문 쪽에 달린 종이 땡그랑 울렸다.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여성과 남성 한 명이 들어왔다.
“아, 제타르 경!”
“쉬고 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영애.”
“아니에요.”
나는 침대에 얼른 앉았다.
“바로 쉬시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해합니다. 많이 피곤하셨겠죠.”
“하하, 네, 조금.”
제타르 경이 함께 들어온 둘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은 수도의 여성을 기준으로 봤을 때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었다.
“이쪽은 영애를 모실 전담 시녀들입니다. 린과 아스입니다.”
두 여인이 인사하기에 얼른 나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자리를 비워달라는 제타르 경의 말에 밖으로 나갔다.
“괜찮으십니까? 문 앞에서 겪으신 일에는 같은 북부인으로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수작을 부리더라도 회의장에 들어선 뒤에나 할 줄 알았지, 설마 정문 앞에 저질러 놓고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 마법 말씀이시죠.”
나는 세 시간 전의 풍경을 떠올리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거기다 원래 문 앞에 나와서 올리는 인사는 고개를 숙이는 걸로 충분합니다. 멀쩡한 회의장을 두고 무슨 짓인지…….”
“어어, 그런가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애. 대장님께서 잘근잘근 조지고 계시는 중이니 말입니다.”
뭘 조져요?
“수도에서 오신 영애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나 참, 적국 사신이 왔을 때나 하던 짓을……. 연회장을 천여 바퀴 돌아도 모자라겠군요.”
아니, 저는 누가 뭘 어떻게 조지는지 궁금한데요. 혹시 그 조져지는 사람 중에 제 퀘스트 대상이 있으면, 곤란해져서요!
“저는 대장님 명으로 영애께 간단히 설명드리고, 식사는 언제 하실지 여쭤 보러 왔습니다.”
“그걸 왜 제타르 경께서?”
“아, 왠지 영애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제 딸이 혼자 이 성에 들어왔으면 어땠을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뇨, 그만 듣겠습니다.
내가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손바닥을 들어 보이자, 제타르 경이 눈치 빠르게 말을 멈췄다.
그나저나 보아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데.
“영애, 혹시 걱정되십니까? 지금쯤 징계받고 있을 가신들이?”
“으음…… 네.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제겐 정문 앞에서의 일이 제겐 크게 나쁘게 와닿지 않았는데, 저 때문에 괜한 일을 겪는 게 아닌가 해서 조금 걱정되네요.”
내가 착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좀 춥다고 생각하고 말았으니.
정말 대공님을 사랑해서 일생의 반려가 되기 위해 왔다면 모를까, 대공님은 퀘스트 대상인 데다 퀘스트에 성공해야 살아남는 처지니까.
오히려 퀘스트 대상인 가신이 실시간으로 잘근잘근 조져지고 있을까 봐 걱정된다. 그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하는데 말이지.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고작 세 시간이었을 뿐인데, 영애가 대장님께 ‘흑마법’처럼 사악한 사술을 부려 홀린 것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아…… 네에?”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음흉한 자들이 있다고. 그런 자들이 과잉 충성도가 되면 이런 결과를 낳기 마련입니다.”
“저, 그 소문이란 게 지금 심각한 건가요?”
“으음…….”
아무래도 제타르 경이 가장 말하고 싶은 부분은 이것이었던 듯했다.
“사실 가신들의 악질적인 장난질에도 영애께서 책잡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무려 대장님의 광증을 가라앉히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가신들의 반 정도가 영애의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반 정도?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그 안에 퀘스트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으면 좋겠는데.
“이 성의 세력은 크게 네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대장님의 친위대 격인 특무대, 내성과 외성 수비대, 마법사단, 그리고 이곳 성내 총관 휘하 관리직이지요. 이 중 영애는 저희 특무대를 행동 하나로 완전히 한편으로 사로잡으셨으니…….”
남은 건 셋이다?
“셋 중 외성 수비대장인 가르카는 세 시간 전의 그 일이 아주 감명 깊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외성 수비대 쪽에서 같은 시비를 걸 일은 없을 겁니다.”
[인물 ‘외성 수비대장(가르카)’의 신뢰도가 소폭 올랐어요! 42/50]
어, 그래 보이네요.
마침 떠오른 창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남은 건 둘, 이네요……?”
“그렇습니다. 몰래 성가실 일을 벌일 만한 세력은 내성 수비대와 총관 휘하 성내 하급 관리들 정도입니다. 이 두 세력만 주의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서 제타르 경은 자기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깔끔하게 돌아갔다.
“아, 전담 시녀인 아스가 제 친동생입니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해 달라며 소통의 창구까지 열어 놓고서 말이다.
여러모로 참 고마운 사람이긴 했다. 덕분에 퀘스트 수행이 더 쉬워질 것 같았으니까.
아니, 근데 황당하네.
……무슨 소문이 그리 빨리 퍼져?
대공님 호감도 올리는 데 방해나 되지 않으면 좋겠는데.
아니, 괜히 광증 수치 또 오르는 건 아니겠지? 오르면 내 피 같은 호감도가 내려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