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02화 (102/281)

◈102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19)

* * *

제타르 경이 나간 후로 나는 주섬주섬 숄을 챙겨 들었다.

‘이런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앞으로 약 한 달 동안 머물러야 할 장소이니, 체력이 약간 회복되었을 때 미리 둘러볼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제타르 경이 말한 그 소문.

아직은 막 퍼지기 시작한 단계라고는 하나, 이것이 쭉 이어지면…….

‘퀘스트 진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 않아도 가신들의 신뢰도를 올리라는 퀘스트를 받은 상황에서, 평판이 나빠질 것이 뻔한 그런 소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미 들었는지 아직인지 몰라도, 대공님 귀에 들어갈 게 걱정돼!

“이건 대공이 어떻게 반응하든 위험하다…….”

첫 번째 반응, 이 소문을 듣고 분노하며 화를 낼 경우. 광증 발작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발작까지 일어나진 않더라도, 이 소문을 낸 사람을 찾아내서 오늘처럼 응징이라도 하면 내 평판은 더욱 바닥을 치게 되니 역시 퀘스트 진척에 불리하다.

또 두 번째 반응, 만약 이 소문을 대공님 본인이 믿어 버릴 경우.

바로 호감도가 하락하겠지.

호감도 하락은 퀘스트 실패로 이어지고…….

결과는 사망.

“으으, 안돼!”

그때 문이 달칵 열렸다.

조금 전 제타르 경을 통해 소개받았던 하녀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조금 전에도 인사 드렸지만, 아스입니다.”

“린입니다.”

그녀들은 말이 많은 편은 아닌 건지, 아니면 나를 신경 쓰는 건지 인사가 간결한 편이었다. 물론 내가 줄곧 발랄한 하녀들과 지냈기에 이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겠지만.

“달린 에스테예요.”

“말씀은 편히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가씨.”

“그럴 수는 없죠. 그대들은 대공님께서 보내 주신 사람이잖아요?”

둘 중 더 통통한 편인 린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닌가요?”

“네? 아니, 맞습니다.”

“그럼 저도 예우를 갖춰야죠.”

난 생긋 웃고는 조금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잘 부탁해요.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결혼 준비를 서둘렀던 탓에, 이 영지와 성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이 없어요.”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신들의 신뢰도를 올리란 퀘스트가 떴다. 이는 즉 대공 주변인들의 신뢰를 얻을수록 메인 퀘스트 해결에도 유리하다는 걸 뜻하는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도 나는 도움이 필요하긴 했고.

“아스와 린이라고 했죠? 내가 많이 부족해 보일 수 있겠지만 조금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아스와 린이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말씀하신 대로 그건 저희 역할이니 오히려 편히 명 내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개중 말이 더 많은 쪽은 린인지 말이 살짝 길었다.

반면 아스 쪽은 입술 앞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 오빠가 아가씨께선 조카인 라셀보다 연약하니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타르 경의 말은 무시하세요. 여기 오는 동안 추위를 조금 탔는데 그 모습을 오해한 것 같아요.”

“그으, 영애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거라고, 그땐 ‘갓 태어난 눈토끼만큼 연약하시다’고 정정하면 된다고…….”

“…….”

아니, 대체 그 양반은 어디까지 그런 얘기를 한 거야, 이놈의 세 살 취급!

그러고 보면 진짜 세 살인 래빗마저도 나를 저보다 연약한 무언가로 취급하니 참으로 코미디였다.

“……하하.”

나는 생긋 웃고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지금 성내를 잠깐 둘러보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린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말이 없는 줄 알았더니, 대화를 나눌수록 베키를 생각나게 하는 씩씩함이 엿보였다.

“아가씨, 옷은 좀 더 껴입는 것이 좋으시겠어요! 제 이모님이 중앙 사람인데 성내도 꽤 쌀쌀하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아가씨께도 추울 거예요.”

그래서 두 사람의 추천에 따라 주는 대로 다 껴입었더니, 몸이 따끈하다 못해 화끈해졌다. 방 안이 따뜻하니 조금 덥게 느껴질 정도인걸.

“아가씨는 작으시네요. 중앙 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편인가요?”

“우리 이모도 작았어, 아스. 하지만 중앙에선 이 정도가 평균이라고 하던걸?”

“하하, 맞아요.”

마지막으로 대공님이 선물로 주었던 숄까지 걸치고 나니 든든한 숙녀용 겨울 무장이 완성되었다.

조금 과한 감이 있긴 하지만 추운 것보다야 낫겠다 싶었다.

그렇게 막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노크와 함께 아스가 미리 열어 두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영애?”

“아, 대공님.”

문 앞에 서 있던 대공님이 조금 눈을 크게 뜨다가 살짝 웃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놀랐어요.”

몇 시간 만에 재회한 대공님은 한결 편한 차림이었다.

새하얀 드레스 셔츠와 한쪽 어깨를 감싸는 털 망토 차림.

“아, 잠시 나가 볼까 싶어서요. 이곳 구경이 하고 싶어서…….”

망토에 달린 털은 대공님의 머리카락처럼 새까만 색이었는데,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대공님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멈칫했다.

“영애?”

대공님의 새카만 머리가 젖어 있었다. 대충 말렸는지 머리카락 끝에 아직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윽고 물방울이 톡!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공님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져요.”

“그건, 아. 씻고서 바로 영애에게 와서 그런가 봐요. 이상한 꼴을 보여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춥지 않으세요?”

아까 린이 성내가 꽤 서늘하다고 했는데, 아무리 북부 사람이 추위에 강하다지만 젖은 머리로 돌아다닐 정도는 아니지 않나?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대공님의 얼굴이 발긋 달아올랐다. 이내 입술로 수줍은 미소가 피어났다.

“춥지 않아요. 고마워요, 영애. 걱정해 줘서…….”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86]

아뇨,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별말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호감도라니요.

“얼른 영애를 보고 싶었어요. 씻은 건 혹시나…… 피가 묻어 있을까 봐요.”

……예?

나는 해맑게 휘어진 눈꼬리를 보며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피요? 피라고요? 징계하러 갔다는 얘긴 들었는데, 피를 볼 정도의 일이었어?

‘제발, 저 피의 주인이 내 퀘스트 대상만 아니어라.’

나는 속으로 강하게 염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피를 봤다는 얘기를 이렇게 온순한 얼굴로 해도 되는 건가.

누구와 있었는지 물어볼까 싶었지만 자칫하면 제타르 경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 하게 될 것 같아 일단은 참았다.

대공님은 내 표정을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살짝 입을 뗐다.

“어딜 가시려고 했나요? 그, 몸은 괜찮은가요? 피로하다고 들었어요.”

“자고 일어나니 몸이 조금 가볍더라구요. 그냥 여길 둘러보고 싶었어요.”

나는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풍경이 너무 예쁘더라구요. 성은 더 예쁠 것 같아요.”

대공님의 시선이 내 손이 가리키는 풍경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나를 향해 돌아왔다.

붉은 눈동자가 잠시 별빛이 콕 박힌 듯 초롱초롱해졌다.

“……영, 영애가 더 예뻐요.”

예?

“가, 감사합니다.”

화아아악. 달아오르는 새하얀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와, 이 남자, 갑작스럽게 직구로 밀고 들어오네. 놀라라.

“저도 대공님께서 미남이시라고 생각…….”

여기까지 말하던 난 잠깐 멈칫했다.

린과 아스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언니들? 지금 얼굴이 꼭 제가 소설 속 애정 씬을 볼 때 짓는 표정 같네요?

그녀들의 눈에서 ‘안구 공유합니다, 대박 사건. 제시 ㄱㄱ’ 같은 주접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심지어 린은 아스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고 있었다.

“영애?”

“아, 아니에요. 대공님.”

나는 뺨을 긁적였다.

“저, 아스? 수건 좀 가져다줄래요?”

“네, 아가씨.”

아스가 얼른 돌아서 수건을 가져오는 동안 나는 겉옷의 단추를 툭툭 풀었다. 북부의 옷은 빈틈없이 여밀 수 있도록 단추가 많은 편이었다.

대공님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나는 아스에게 옷을 건네면서 흘끗 린까지 곁눈질했다.

“옷은 여기 두고 잠시만 자리를 비워 줄래요?”

“네.”

“네, 아가씨!”

린과 아스가 아쉬운 눈을 했지만 얼른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자리를 비웠다.

나는 수건을 든 채로 대공님을 보았다.

“대공님, 여기 앉으시겠어요?”

“네?!”

그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다 이내 머뭇머뭇했다.

“저, 영애…… 치, 침대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네? 아, 그냥 앉으시란 이야기였는데…….”

“…….”

“그럼 저기 의자에 앉으시겠어요?”

대공님이 등을 돌렸다. 걸음걸이가 로봇처럼 삐걱삐걱했다.

너른 등을 보다 나는 풉,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곤 그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대공님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닦으셔요, 대공님.”

“아, 괜찮아요. 영애!”

“하지만 물이 떨어지기도 하고, 제가 다 추운 것 같아서요.”

“닦을게요!”

단 3초 만에 말을 바꾼 대공님이 수건을 받아 들었다. 탈탈 털듯이 닦는 모습이 영락없는 커다란 강아지였다.

으음, 이렇게 커다란 강아지가 있으면 조금 무서울 것 같지만.

나는 그가 머리를 말리는 모습을 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아, 저 대공님,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네? 네.”

그럼 사양하지 않고.

“그렇게 하시면 뒤는 안 닦이는 것 같아요. 이렇게…….”

내 손이 커다란 손에서 수건을 가져왔다. 곧 수건을 그의 뒷머리에 톡 내려놓았다.

으음, 아직 뒤는 덜 말랐네. 손가락에 닿은 머리카락이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잡아 살짝 문질렀다. 반쯤 젖었음에도 아주 부드러웠다.

이야, 남자주인공에게는 머릿결도 기본으로 주어지는 건가. 신기하네.

“대공님께서는 아주 건강하셔서 감기에 걸릴 일이 없으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래빗과 있는 동안 우리 아기 황녀님에게는 시중드는 하녀가 거의 없었다. 본인의 의사였다.

그 탓에 유모인 내가 자잘한 것을 해 주기도 했는데, 이렇게 머리를 말리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 래빗 머리카락은 더 가늘고 부드러웠지. 역시 아기 머리칼이 최고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그대로 멈췄다.

무의식중에 래빗을 대하듯이 대공님의 머리를 닦아 주고 있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니까.’

“저, 대공님?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제가 황녀님 유모였다보니 이런 일이 손에 익어서요.”

“네? 네? 아…… 괜찮아요.”

정신 차리고 보니 머리카락은 꽤 많이 말라 있었다.

하지만 대공님의 상태는 괜찮지 않아 보였다. 특히나 귀와 뒷덜미가 잔뜩 붉어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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