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20)
“으음, 그래도 거의 말랐네요. 다행이에요.”
나는 수건을 내려놓았다. 대공님은 자신의 입을 슬쩍 막은 채 숨을 낮게 내쉬고 있었다.
“역시 너무 무례했죠? 다시 한번 죄송해요…….”
“아니에요……. 한 번 더 해도, 아니, 아니.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영애.”
대공님의 붉은 눈동자가 차마 나와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귀가 터질 듯이 붉어져서 눈치는 챘지만, 앞쪽 얼굴은 완전히 절경이었다. 새하얀 피부 여기저기 복숭아꽃이 핀 것처럼 분홍빛 꽃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우리, 그래도 되는 사이니까…….”
으음,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잊을 만하면 미모로 한 대씩 후려 맞는 것 같다.
내 취향의 남자가 나를 보고 수줍어하는 모습이라니.
육아물에서 마주쳤던 2황자 라이칸도 엄청 내 취향의 남자이긴 했지만, 혹시나 이야기가 더 비틀어질까 싶어 엮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 탓에 사실 사람을 상대한다기보다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초상화를 보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에 비해 이쪽은 장애물이 아예 없는 느낌이라고 할까. 특히나 매번 내 손길을 간절히 원하는 듯한 모습이 덕후의 심정을 설레게 만들었다.
‘요정이 드디어 내 로망을 이루어 준 건가.’
퀘스트에 실패했을 때, 사망하는 것만 아니라면 좀 더 이런 상황을 만끽해 볼 텐데 말이지.
“아, 영애. 구경은 하지 않아도 되나요?”
“네, 괜찮아요. 대공님께서 모처럼 찾아와 주셨으니, 대공님과 이야기를 더 나눌까 봐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87]
오, 신기하네. 직접적인 터치가 있을 때는 오히려 잠잠하던 호감도가 말 한마디에 오르다니.
무슨 차이인 거지?
내가 연애 쪽으로 그리 무지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어째 이런 쪽으로는 도통 머리가 돌지 않는단 말이지.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발동 중입니다.]
흐음, 살아남을 궁리만 하다 보니 머리가 굳었나.
“영애, 저녁 식사는 제 식당에서 하려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좋아요.”
곧 있으면 해가 떨어질 터였다. 식사 얘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나는 대공님 맞은편에 앉은 채 잠깐 생각에 빠졌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니 문득 해야 할 말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근데, 이걸 어떻게 꺼낸다.
“저어, 대공님. 혹시 대공님이 가진 ‘광증’에 대해서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네, 괜찮아요.”
광증이란 단어에서 대공의 표정이 잠깐 굳었지만 찰나였다. 그는 유순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할 일이라면서.
“전에 모닥불 앞에서 설명해 주셨을 때 광증 발작이 일어나는 건 두 경우라고 하셨죠?”
나는 전에 대공이 해 줬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몬스터를 베는 도중에 나타나거나, 혹은 감정이 심하게 격해질 때나. 후자의 경우는 거의 없었고, 보통은 몬스터를 베는 도중에 나타난다고도 말씀해 주셨구요.”
“네, 맞아요.”
나는 정문 앞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후자의 경우로 광증이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건.
이때까지 이 대공님이 절대자였기 때문에 가신들이 그의 분노를 일으킬 만한 상황이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래서 광증 발작은 대부분 몬스터 때문에 일어났었던 거지.
퀘스트에서의 표현처럼 ‘아방한 북부 대공님’이지만 이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절대자란 소리기도 하겠다.
“혹시 영애…… 오늘 정문 앞에서 있었던 일을 신경 쓰시는 걸까요?”
대공님이 내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걸 눈치챘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이 거대한 강아지 같은 대공님은 혼나기라도 한 것처럼 시무룩해진 얼굴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 일에 대해 책임을 묻거나 원망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이 대공님 탓도 아니고 가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별생각이 없기도 하고 말이다.
“신경 쓰이긴 하지만,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대공님을 감히 탓하려 여쭤본 건 아니에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나는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생긋 웃었다.
“그저 대공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요. 저는 이 영지와 성이 처음이고, 저희 관계를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싶어요. 신경 쓰인다는 건 이런 부분이었어요. 혹시나 이런 말씀을 드리면 불편하실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다 괜찮아요.”
“…….”
“다 괜찮은 것 같아요.”
다행히도 시무룩하던 표정이 풀렸다. 신경 쓰이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여기 오기 전에 북부 영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공부했었는데요.”
리제가 주었던 기밀 사항이 담긴 일명 ‘위험한 보고서’가 내 공부 자료로 뚝딱 탈바꿈됐다.
“이곳의 가신들은 특히나 체단 대공가와 대공님께 충성한다고 들었어요.”
“네, 그럴 거예요. 이곳은 ‘힘’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땅이니까요.”
어느새 시무룩한 기색이 완전히 사라진 대공님이 살랑 눈을 접었다.
“척박하고 춥지만 이곳 사람들은 가슴에 불을 품음으로써 살아남았어요. 그 때문에 상당히 호전적이고 전투를 좋아해요.”
“네, 북부에는 대대로 뛰어난 기사들이 많은 걸로 알아요. 아무래도 몬스터가 많으니까.”
“이곳의 몬스터는 다른 지역에 사는 같은 종보다 훨씬 크고 매섭고 악독해요.”
짧게 읽었지만 이곳 북부의 역사는 그야말로 유명한 리얼리티 쇼를 떠올리게 하는 ‘인간 vs 자연’의 역사였다.
이 경우 정확하게는 ‘인간 vs 몬스터’라 불러야겠지만 말이다.
“이곳에서는 실력이 뛰어나거나 경험이 많은 자가 무조건 상급자가 됩니다. 일상생활에서야 예외가 있을 수도 있으나, 전투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어요. 그래야 생존에 유리하니까요.”
“음, 잘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상명하복이 매우 뚜렷한 곳이다, 이거지. ‘억울하면 힘으로 덤벼라’, ‘약한 놈들은 보호를 받아라!’ 하는 생각이 기저에 깔린 곳이기도 하고.
생각을 마무리한 나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신변잡기에 가까웠다면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혹시 대공님께서는 이상형이 있으신가요?”
“네?”
“음, 없으시면 저부터 이야기해도 될까요?”
대공님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의아함이 가득 담긴 시선을 슬쩍 모른 체하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빙긋 웃었다.
“저희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간을 갖기로 하였으니, 대공님에 대해 이런 것도 알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이건 사실 핑계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영애는 이상형이…… 있나요?”
“솔직하게 말씀 드리자면 없지는 않아요.”
이번 두 번째 메인 퀘스트 때문에 생겼고, 그게 당신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마, 말씀해 주세요.”
그랬다.
이번 두 번째 메인 퀘스트의 미션 중 이 아방한 대공님을 원작의 ‘북부 대공’으로 되돌리는 것도 있었다.
원작에서의 ‘북부 대공’의 성격이라면, 흔한 클리셰대로라면 대략 이런 성격이겠지.
무뚝뚝한 데다 차가움을 넘어 냉혹한 성격. 눈물은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만 가끔 흘릴 것.
“음…….”
……이 남자에게 그런 변화가 가능한 거야?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단은 흑발에, 붉거나 푸른 눈이면 좋구요…….”
샛별을 콕콕 박아둔 듯 과하게 초롱초롱해져서 나를 쳐다보는 눈에 난 잠시 관자놀이를 짚고 싶었다.
‘야, 요정 어딨냐? 너 진짜 달성 가능한 퀘스트를 준 거 맞냐?’
아냐, 좋게 생각하자. 일단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남자가 몬스터를 때려잡는 모습이나 광증을 일으켜 아군에게 덤비는 모습을 보면, 일단 ‘냉혹한 성격’이라는 조건 쪽은 문제없지 않을까?
“그리고 말수가 적고 무뚝뚝…… 음, 무뚝뚝해도 좋고 그냥 진중한 분이어도 좋을 것 같아요.”
“…….”
“차갑고 이성적이며 누구에게나 냉정한 사람이 좋은 것 같아요.”
어디 보자, 그리고 또…….
“그리고 으음, 군주로서의 위엄도 넘치면 좋을 것 같네요.”
“……영애.”
“네?”
나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아 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왜, 왜 우세요?”
어느새 대공님이 눈물을 글썽거리다 못해,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참 서럽게 우는 남자였다. 죄를 지은 게 없는 것 같은데 양심에 콕콕 찔릴 정도로.
“……여, 영애. 그냥 제가 싫으신 거죠?”
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생각해 보니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아니, 대부분 그렇게 받아들이겠다 싶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아뇨. 대공님 끝까지 들어 주시겠어요? 아직 하나 남았어요.”
아직 한 발 남았다.
이건 로판 덕후라면 누구나 다 아는, ‘북부 대공’의 가장 중요한 성격이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들이 남들을 대하는 모습이라면요, 또 하나.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뭔가요?”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사람요.”
아니, 근데 이 말, 입 밖으로 뱉으려니까 좀 부끄럽다, 이거.
어쨌건 그래, ‘차가운 북부 대공이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하겠지’에서 ‘따뜻하겠지’가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나.
“그럼 연인과 부인 앞에서는 우, 울어도 된다는 건가요?”
“그…… 그럴걸요?”
……이래도 퀘스트 수행이 되나?
일단은 한 걸음 떼는 게 중요하니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물기 어린 대공님의 얼굴에 언제 서러움이 가득했냐는 듯 발그레함이 맴돌았다.
“그, 그런 거라면 자신……. 아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까진 없었는지 대공님이 중간에 슬쩍 말을 바꿨다. 죄송하지만 자신도 가져 주시면 좋겠다. 그래야 제가 살아남거든요.
“정말요? 저를 위해 그런 모습도 보여 주시겠다는 건가요?”
“네!”
아, 양심. 저 바닥에 떨어진 게 혹시 달린, 님의 양심이 아니신지?
어쩐지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대공님의 모습에 나는 슬쩍 눈을 피하며 하하하, 웃었다.
“혹시, 대공님께서도 이상형이 있으실까요?”
주먹만큼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나도 노력해 보고자 대공님께 물었다.
그러자 이 대공님이 글쎄, 조명이 100개쯤 켜진 듯이 환하게 웃으며,
“저, 저는 영애가 이상형이에요…….”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