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04화 (104/281)

◈104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21)

비수같이 내리꽂힌 온순한 한 마디에 나는 뇌 정지가 왔다.

“으음, 저를 확실하게 보내 버리시네요…….”

“네? 어디로 말인가요?”

나는 얼른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가 이 흰색 도화지 같은 사람을 멋들어진 북부 대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거지.

“혹시 대공님께서는 어린 시절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셨어요?”

“어린 시절이요? 어릴 때…….”

처음에 짐짓 무구한 표정을 지었던 대공님이 찰나 표정을 굳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의 표정 변화가 드라마틱했던 터라 바로 알아봤다.

그러나 이는 정말 잠시였을뿐 순식간에 본래 알던 온순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네, 어린 시절에도 똑같았던 것 같아요. 다만……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하지만 대공이 잠깐 보여 주었던 표정이 워낙 살벌했고 심각했던 탓에 더는 묻지 못했다.

보통 소설 속에서 ‘저주’를 안고 있는 캐릭터의 클리셰라고 하면……

어린 시절에 받은 학대로 저주받은 상태나 다름없는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가 있거나.

아니면 나쁜 마법에 당했다거나.

어느 경우든 저주가 시작된 것이 어린 시절인 경우가 많다.

이 대공님은 과연 어느 쪽일까?

하지만 이런 건 나중에 알아봐도 될 일, 일단 대공님을 프로듀싱하는 것이 먼저였다.

“영애, 나는…… 자신 있어요.”

“네?”

“영애 앞에서만 우는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어요.”

어떡하면 적절하게 이 대공님에게 ‘북부 대공’의 이미지를 알려 주며 한번 해 보라고 살살 꼬셔 볼까 고민하던 중에 이 남자가 불쑥 무언갈 내밀었다.

“그, 그리고 나머지는 영애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어요!”

“제가 시키는 대로요?”

바로 자기 목줄이었다. 아니, 이 남자가 갑자기 스스로를 쥐여 주네? 이게 웬 떡이야?

당장 잡아야지!

“하지만 대공님께서 한낱 저 같은 백작가 영애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신다니요……. 그건 좀 불편하시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다른 사람도 아닌 영애의 말이니까요.”

아무리 끌리는 제안이라도 이 사람은 대단한 자리에 있는 대공님이다. 적어도 한 번은 튕기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러나 내 말에 대한 대답으로 이 남자가 성큼 다가와 고개를 기울였을 때.

그리고 이어서 새하얀 눈만큼이나 깨끗하고 순수한 미소를 지었을 때는 나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내 뜻으로 영애의 말을 따르기로 한 거예요.”

그의 무릎이 접힌다. 기사가 되어 주군을 보는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누구도 내 결정에 왈가왈부할 수 없어요.”

“…….”

“영애가…… 그런 저를 가져 주면, 좋겠어요…….”

차마 뻗지 못한 손이 아주 미세하게 톡, 손끝에 겨우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온기라도 좋다는 듯 남자의 눈이 헤실 접혔다.

“당신이 앉을 자리는 그런 자리에요.”

곱게 접힌 눈이 오롯이 나를 향했다.

“반대하는 자들은 저 설원 위에 던져 버릴게요.”

그 말만 아니었다면 잠시 정말로 로판 주인공이 된 기분을 누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피를 보는 게 꺼림칙하시면 그저 얼어 죽게 두는…….”

“아뇨, 아뇨, 아뇨!”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잠시 이 파괴적인 얼굴에 넋을 놓았을 뿐인데 이런 일이. 대화가 순식간에 상식을 벗어나려는 것을 막았다.

“아뇨, 저는 정말 들어 주시는 걸로 충분해요. 누구 하나 파묻지 않아도 되시구요!”

자자, 릴렉스. 진정하자, 대공님아. 참자. 한 번만 참아 보자.

사실 부하들의 충성도만 보면 충분히 북부 대공님 같은데, 유순한 말투와 표정이 문제라면 이것만 사알짝 바꿀 수 있게 도와드리면 좋지 않을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기분이지만.’

하, 나도 살기 위해서가 아니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제가 무얼 하면 될까요?”

유순하다 못해 순종적인 얼굴을 보다 살짝 숨을 삼켰다.

“우선 조심스럽게 말씀 드려 보자면…… 잠깐 웃지 말아 보세요, 대공님.”

그러자 대공님이 당황했다.

“저는 지금도 웃고 있지…… 않은데요?”

“으음, 이게 아닌데.”

“영애?”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망설이던 대공님이 끄덕이자마자 나는 손을 뻗었다.

허락도 얻었겠다, 가지런한 눈썹 뼈를 한 번 건드려 보고 눈꼬리도 한 번 올려 봤다.

“우선 눈매는 이렇게, 이렇게…… 대공님 조금만 시선을 내려 보세요.”

“이, 렇게요?”

“네! 좋아요. 거기서 인상도 한 번 찡그려 보세요, 살짝만요.”

광대를 잠시 건드렸다가 이내 입술로 내려가서 입매를 슬쩍 만진 뒤 손을 뗐다.

“입술은 조금 더 다물어 보세요. 눈은 이제 치켜뜨는 느낌으로, 저 한 번 보시구요. 아뇨, 입은 너무 꾹 다물지 마시고.”

“…….”

“아! 맞아요, 그렇게. 살짝 다무시는 느낌으로.”

으음, 아직도 입술을 너무 앙다물었는데. 나는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입술 한가운데를 툭 건드렸다.

일순 그의 숨이 멈췄다.

“네, 맞아요. 이런 느낌이에요.”

오, 이렇게 보니 그럴싸하잖아? 그럴싸하다 못해 날카로운 느낌이 들었다.

취향도 아닌 붉은 눈이었음에도 초상화를 남겨 두게 만들었던 얼굴답게,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이전이 순백의 눈이었다면 지금은 정제된 얼음 송곳 같았다.

‘이런 느낌이 충분히 가능했잖아?’

그래, 이게 바로 로판 속 북부 대공님의 모습이지.

우는 모습만 봤을 때는 지옥의 난이도를 예상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이제 이 느낌을 가신들 앞에서도 보일 수 있다면 퀘스트 조건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요정, 프로듀싱은 밖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조건이야? 아마 그렇겠지?’

[놀라운 통찰력, 요정은 그렇다고 대답해요! ⌒゚>⩌<゚⌒]

놀라운 통찰력은 개뿔.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걸 가지고.

갈수록 이놈은 나를 비꼬는 것 같단 말이지.

“대공님, 혹시 지금 이 느낌을 기억하실 수 있을까요?”

“아…….”

“앗.”

풀렸다.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대공님이 말을 하자마자, 내가 잡아 준 얼굴이 풀려 버린 것이었다.

거기다가 더욱 풀어지기까지 했다.

완전히 넋을 놓은 사람처럼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으음, 얼굴에 너무 힘을 주게 만들었나?

“그 대공님, 표정이 풀어졌는데 제가 다시 한 번 잡아 드려도 될까요?”

“그…… 괜찮은데, 영애. 저기.”

“네, 눈썹부터 다시 잡을게요. 시선은 아래로 미간에는 이렇게 힘을 주시고, 그리고 입매는 이렇게…….”

“영애.”

탁, 내 손이 잡혔다. 손이 따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뜨거운가?

시선을 들어 올리니 어느새 반쯤 몸을 일으킨 남자가 앞에 있었다.

어찌나 체구가 큰지 그 그림자가 나를 다 덮을 것만 같았다.

“그, 그만.”

내 시선이 떨리는 그의 입술에 고였다.

“너무, 너무 많이 만져요.”

“네?”

“……자주 이렇게 남을 만지나요?”

차차 붉게 물들어 가는 피부를 보았다. 참으로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오래전 미술 시간에 새하얀 천을 붉게 염색했던 것이 떠올랐다.

신기한 건 얼굴이 붉어질수록 그의 표정은 차차 무룩하게 가라앉았다는 점이었다.

“익숙한가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가 올랐어요! (+3) 현재 광증 수치: 18]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 호감도가 내려갑니다! (-8) 현재 호감도: 79]

악! 잠시만, 잠시만요!

“그,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전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나는 얼른 대공님 얼굴 앞에 손바닥을 쫙 펼쳤다. 저기요, 내 피 같은 호감도 수치가!

퀘스트로 겨우 내려 놓은 광증 수치가! 악!

“전 남성과 교제해 본 적도 없어요! 이렇게 남성의 얼굴을 만져 본 것도 처음인걸요?”

그 순간 가장 먼저 3황자님이 떠올랐다. 여덟 살짜리 뺨 꼬집어 본 건 안 치는 거겠지?

다음으로 떠오른 건 2황자와 헤어지기 직전 그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면서 그의 뺨에 닿았던 감각이었다.

아냐, 그건 내가 한 게 아니라 그분이 접촉한 거잖아.

순식간에 진정된 대공님이 수줍게 얼굴을 끄덕였다.

“그렇군요…….”

“네에, 그러니까 저희 앞으로 이 표정을, 아니지. 대공님, 앞으로 혼자 계실 때든 아니면 다른 가신과 함께 계실 때든 한번 이 표정을 연습해 보세요.”

“좋아요, 노력할게요.”

그가 양순하게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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