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22)
추측이지만 가신들은 대공님이 소설 속 대공님과 비슷한 모습일수록 더 좋아하지 않을까?
아니다, 지금도 강하니까 있는 그대로 좋아하려나?
하지만 대공님이 시무룩한 얼굴을 할 때 그를 바라보던 미묘한 표정들을 떠올리면, 대공님에게 바라는 이미지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애초에 이런 성격을 반기는 곳이면, 기사들이나 가신들이 그렇게 터프하고 걸걸할 리가 없지.’
“대공님, 청이 하나 있어요. 혹시 제가 성과 영지를 돌아봐도 괜찮을까요?”
나는 살그머니 자세를 바로 앉아 그를 마주했다.
“앞으로 한동안 지낼 곳이 어떤 곳인지 봐 두고 싶어서요.”
“물론이에요. 이 영지 안서에 영애가 가지 못할 곳은 없어요.”
“네. 모두 대공님의 땅이니까요?”
대공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렇게 허락도 받았겠다, 이젠 가신들의 호감도를 좀 올리러 다녀야겠다.
나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모양이니 그에 대한 오명도 좀 벗고, 퀘스트도 해결해 보자고.
“영애, 혹시 땅 좋아하세요?”
“네?”
이것 또 무슨 엉뚱한 질문이야?
하지만 난 성심껏 대답했다.
“땅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땅 좋지. 돈과 땅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아, 영애께서 이전에 제가 선물로 드린 것 중에 바일론 영지를 제일 좋아하셨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그건 부동산…….”
“네?”
“아뇨, 아니에요.”
한국에선 강남 땅 부자가 꿈이었지, 이룰 일이 없었을 뿐. 나는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네, 사실은 좋았어요.”
“아하, 그럼 이 영지도 가지시면 되겠어요.”
“저,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영애께서 제 부인이 되면 이 영지도 공동 소유니까요?”
흐음, 나는 그를 쳐다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를 꼬시고 계신 거군요?”
그러자 대공님의 귀가 발긋 물들었다.
그러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았다.
“네……. 그러면 안 될까요?”
“그럴 리가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80]
“그저 감히 대공님의 귀가 붉어져서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2) 현재 호감도: 82]
오, 칭찬하면 오른다고?
신나서 열심히 칭찬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꼼수는 통하지 않는지 다시 오르진 않았다.
나는 깔끔히 물러났다.
“돌아다니는 걸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대공님은 산책까지 함께 할 것처럼 나를 따라 나섰지만, 일이 많은지 그대로 돌아갔다.
물론 강아지 귀가 축 처진 것이 보일 정도로 시무룩해진 채였다.
‘휴, 광증 수치 오를까 봐 가슴 졸려 죽는 줄 알았네. 이거 심장병으로 먼저 죽는 거 아니야?’
이번 대화로 느낀 건데, 이 사람 내가 다른 이성 얘기를 하면 광증 수치가 오르는 것 같은데.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 북부 영지까지 이성이 날 찾아오기라도 하면 수치가 폭발하겠네.
‘없어서 다행이다.’
‘달린’에게 따로 연인이나 상대가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어쩌면 요정 그놈이 일부러 이런 몸에서 눈을 뜨게 한 걸지도 모르지만.
“흐음, 파올로는 괜찮겠지? 이미 봤으니까.”
내 혼잣말에 안내를 위해 앞서 걷던 린과 아스가 멈칫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날이 무척이나 좋네요.”
“네, 아가씨. 오늘은 북부 치고 날씨가 아주 좋은 편이에요.”
아스가 대답하고 린이 눈을 반짝였다.
“예비 대공비님께서 이곳에 도착한 날이라 하늘도 반기나 봐요!”
으음? 이 언니, 호칭이 갑자기 변한 것 같은데. 말투나 표정도 그렇고.
착각이 아니었다. 대공님이 다녀간 뒤로 눈이 더 초롱초롱해졌으니까.
아마 대공님이 돌아가면서 남긴 한마디 때문일 거다.
“최선을 다해 모셔야 할 거야. 그러기 위해 너흴 데려다 놓은 거니까……. 너희의 손발이 계속 멀쩡히 붙어 있길 바란다면 특히.”
……이게 명령이냐, 협박이냐.
뒤에서 온순한 얼굴로 머뭇머뭇 내리는 지시에 입을 떡 벌렸지만 두 시녀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즐거이 여기는 기색이라 나는 이 사람들 다 조금씩 또라이인가 생각했다지.’
“대공 전하께서 무언가에 애착을 보이신 건 처음이에요! 사람이든 물건이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분이셨는데……!”
“아하, 그런 분이셨군요. 그런데 아직은 ‘아가씨’라 불러 주면 좋겠어요. 그 호칭은 차차 익숙해지고 싶어서요.”
“네, 아가씨!”
린은 아무래도 베키 과가 맞나 보다. 옆에서 여성 치고는 살짝 낮은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러고 보니 린뿐만 아니라 아스도 목소리 톤이 낮은 편이어서, 엠버넷 씨가 떠올라 괜히 반갑기도 했다.
‘그나저나 가신들은 왜 안 보여?’
일부러 마주치려고 산책을 나왔더니 어째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가 싹 치워 놓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처럼 마침 저 멀리 세 사람 정도가 나타났다.
아이고, 반가워라.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저런, 다친 발에 무리가 갑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_╥`) 현재 건강 수치: 78]
린과 아스가 조언했던 것처럼 성내는 실내인데도 꽤 서늘한 편이었다.
때문에 나는 느슨히 했던 무장을 꼼꼼히 정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꽁꽁 싸매도 다리 쪽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현재 걷고 있는 곳이 1층, 그것도 벽 없이 기둥만 있어 바로 정원으로 이어지는 복도라, 바람이 쌩쌩 들어왔다.
‘와, 어떻게 이런 곳에서 추위를 전혀 느끼지 않을 수가 있지.’
나보다 훨씬 얇고 가벼운 차림의 린과 아스가 대단해 보였다.
저 앞에 보이는 세 사람의 옷도 비교적 얇은 편이었다. 한 사람은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어라, 제타르 경이잖아?
그 옆에 있는 사람도 꽤 익숙했다.
‘저 사람, 가르카였지?’
퀘스트 대상 중 한 명인 ‘외성 수비대장’ 가르카였다. 커다란 덩치는 여전히 압도적이라 못 알아볼 일은 절대 없을 듯했다.
“으하하하하!”
가까이 다가가자, 한창 호탕하게 웃고 있던 가르카가 웃음을 멈췄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정문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나운 시선은 아니었다.
‘흐음, 신뢰도가 현재 제일 높은 사람이었지? 요정, 신뢰도 수치.’
[퀘스트(서브) - ‘친해지길 바라, 안 친해지면 쟤가 죽음!’
진행 상황:
1. 외성 수비대장 ‘가르카’ : 44/50
2. 내성 수비대장 ‘칼리’ : -20/50
3. 제1마법사 ‘리바’ : -15/50]
흐음, 그 사이에 가르카와 마법사 리바의 신뢰도는 더 올랐잖아?
가르카의 경우 조금만 더 올리면 클리어 할 수 있을 수치였다.
반면에 내성 수비대장 칼리의 수치는 더욱 내려갔다.
‘흠, 이건 소문에 영향을 받은 거일려나.’
대체 세 시간 만에 소문이 어디까지 퍼진 거야?
마침 제타르 경도 나를 알아보고 반가운 얼굴을 했다.
“아, 영애. 다시 뵙습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잠시 산책하러요. 다시 만나 반가워요, 제타르 경.”
제타르 경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마지막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가르카에 가려져 반 정도만 보였는데 타이밍 좋게 자리가 바뀌며 전체 실루엣이 드러났다.
“크으, 반갑소이다. 예비 대공비 전하를 뵙소!”
세 번째 사람에게 집중하기도 전에 커다랗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를 푹 찔렀다.
돌아보니, 가르카가 아주 반가운 낯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와, 가까이서 보니 더 크네, 이 아저씨.
40대 정도로 보이는 가르카는 주먹코에 각진 턱을 가진 사람. 이곳까지 오면서 가장 흔하게 본 것과 같은 인상이었다.
체격은 말했듯이 아주 크고 다부졌다.
“가르카, 호칭이랑 뒷말이 하나도 맞지 않잖나. 존대를 쓰지 않고 뭘 하는 거야?”
“하하하, 진짜 대공비 전하가 되면 내 아주 깍듯이 모시지!”
가르카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주아주 기대하고 있단 말이오, 예비 대공비 전하! 북부인에게 즐거운 일에 대한 기대감이란 따뜻한 안주만큼이나 소중하지!”
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진 못했는데, 일단 웃어 주기로 했다.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하네요. 반갑습니다, 가르카 경. 아니, 외성 수비대장님이라 부르면 좋을까요?”
그러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흐음? 내 예비 대공비 전하께 소개는 따로 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오만.”
“맞습니다. 하지만 대공님께 가신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허, 좋은 얘기는 아니었겠군?”
“전혀요, 몹시도 충성스럽고 든든한 분들이라고 하시던걸요.”
[인물 ‘외성 수비대장(가르카)’의 신뢰도가 올랐어요! 48/50]
“크흠, 듣기 좋으라 하시는 말이라도 기분은 나쁘지 않소만.”
“에이, 그랬다면 제가 어떻게 단숨에 가르카 경을 알아볼 수 있었겠어요? 대공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자세히 알려주셨는걸요. 또 제가 앞으로 쭉 뵐 분들이니 얼마나 멋진 분들인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보아라, 내가 바로 그 살벌한 육아물 오빠 앞에서 살아남은 주둥아리란다.
[스킬 ‘사기꾼의 혀(lv.2)’가 활성화됩니다!]
“북부에서도 손꼽히는 아이바타라 출신의 멋진 전사시라 듣기도 한걸요.”
물론 대공님은 가신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