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24)
제타르 경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런 일이 흔하다고 했다.
“이곳에선 강한 사람의 말이 곧 법입니다.”
“그렇군요…….”
와, 그나저나 저 두 사람 날아다니네, 날아다녀.
무엇보다 칼리를 보고 있으려니 엠버넷 씨가 절로 떠올랐다.
‘저기 제 안에 계신 엠버넷 씨, 듣고 계신가요? 이곳에는 엠버넷 씨 같은 사람이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수준이 상당하네요.
마침 엠버넷 씨의 대답이 돌아왔다. 희미했지만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뛰어난 전사들이에요.
엠버넷이 감탄했다.
아마 자신이 살아 있었더라도 과연 저 두 사람의 상대가 되었을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는데, 그건 좀 지나치게 겸손하신 게 아닐까요?
검을 모르는 나로선 고개를 갸웃할 뿐 반박할 말도 없었다.
“……영애, 방금 칼리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 네…….”
흐음, 나는 제타르 경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옆에 있던 아스와 린도 염려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여러분들 입장에서 저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니, 서로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런 부분은 충분히 각오했어요.”
그나저나 사술이라.
‘이거, 생각보다 꽤 퍼진 것 같은데?’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끝까지 염려하는 제타르 경을 잘 달래서 헤어진 뒤로 조금 더 산책을 이어가던 중 복도 2층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뭐? 그게 사실인가? 전하께서 중앙에서 데려온 여자가 흑마법사라고?”
“예끼, 이 사람아! 목소리를 낮춰!”
심지어 1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아니, 대체 여기 사람들은 목청이 얼마나 큰 거야. 환영하러 나왔던 사람들 목소리도 장난 아니더만.
슬쩍 돌아보니 린과 아스가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싱긋 웃으며 검지를 입술로 가져다 댔다.
자, 언니들 잠시만, 무슨 소리 하는지 좀 들어 볼게요.
“그, 우리 전하를 사술로 현혹했다고 하지 않나!”
“헉, 그게 사실이라면…… 실로 큰일이로군. 믿을 만한 정보인가?”
“아 글쎄, 말씀하신 분이…… 라잖아!”
“이런, 정말 큰일인데. 하지만 광증은 가라앉으셨다고 하던데, 이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닌가?”
“그럼 뭐하나! 흑마법사에게 정말로 세뇌라도 당하시면? 북부가 그대로 넘어가는 걸세!”
“그건 안 되지!”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 땅 전체를 준대도 사양입니다.
나는 추위에 코를 훌쩍이면서도 숨죽인 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혹시나 싶어서 꽤 외진 곳까지 나오길 잘했다.
굳이 이런 곳까지 사람이 오진 않겠지만, 만약 누군가 있다면 뭔가 내가 예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을까 했지.
‘지금처럼 빠르게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야.’
저들도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꽤 신나게 떠드는 것 같았고.
덕분에 나도 그들을 좀 더 관찰할 수 있었다.
옷차림이 칼리나 가르카가 걸친 것이랑은 좀 달라 보이는데. 문관에 가까워 보인다.
대공님 앞에서 인사했던 사람 중에 총관 아르테반이란 사람이 저런 옷을 입고 있었지?
흐음, 알겠다.
어느새 두 남자는 떠들 만큼 실컷 떠든 건지, 유유자적 멀어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난간에 슬쩍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나저나 여기서도 ‘세뇌’란 말을 들을 줄은 몰랐네.’
흑마법이라면 로판에서도 꽤 자주 나오는 소재지.
주로 악역들이 사용하는 걸로 등장하지만.
이미지부터가 시커멓고 악의 세력이 쓸 것 같은 느낌이니 말이다.
‘가끔 이를 비틀어 주연이 흑마법을 쓰게 한 소설도 있었지만, 일단 이 소설은 아닌 것 같으니 패스하고.’
사실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황실에서 지겹도록 들었던 게 ‘세뇌’ 운운하는 말인데, 여기까지 와서도 그런 소릴 들어야 한단 말이야?
이 세계 사람들은 왜 이렇게 계략이니 세뇌니, 음모를 좋아하는 거지.
‘독자일 땐 계략이니 세뇌니 주인공이 누명 쓰는 전개가 참 흥미진진했는데, 내가 당하니 미치겠네.’
그놈의 세뇌다. 정말.
황실에서도 신전이 래빗을 세뇌했다고 철석같이 믿어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저, 아가씨…….”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좋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떤 소문을 듣고 있는지는 대충 파악했다.
“돌아갈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발을 옮겼다.
물론 그 사이에 추위에 몸이 살짝 얼어 조금 비틀거렸지만, 걷는 데는 문제 없었다.
* * *
“성 밖을 보고 싶으시단 말씀인가요?”
다음 날 오전, 아침을 함께 들며 대공님이 되물었다.
어제저녁, 대공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대공님께 다시 한번 표정 연습을 시켜 드렸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기 전까지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었다.
“네, 혹시 가능할까요? 린과 아스가 오늘은 기온이 높아 바깥을 산책하기 좋다고 하더라구요.”
나는 대공님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슬쩍 눈을 피했다.
으음,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확실히 오늘은 날이 따뜻하긴 해요. 하지만 영애에겐 추울까 봐…….”
“계속 머물 곳이니 제가 좀 더 적응해야죠. 사실 훈련할 때도 약한 강도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리잖아요. 이런 기온부터 익숙해져 볼까 봐요.”
현재 대공님은 편안한 옷을 걸치고 계셨다.
문제는 이 옷이 가운형 옷이었는데, 앞쪽이 브이자 형으로 깊게 파여 보려고 하지 않았던 저분의 다부진 체격이 그대로 보였다.
‘……옷의 상태가 왜 이렇죠? 나보라고 이러는 건가요?’
새하얀 살갗이라거나 모양 좋게 잡힌 근육까지. 눈 둘 곳이 없어서 몇 번이나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뭐지, 이 사람.
이제는 이렇게 유혹하는 건가.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죠?
“그런 거라면…… 저도 함께 가면 좋겠어요, 영애.”
“아, 그것도 좋아요.”
“다만 제가 오전에는 손봐야 할, 아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오후에 함께 가면 어떨까요?”
잠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오늘도 양순하고 무구한 표정을 보며 숨을 삼켰다.
또 누굴 조지시겠다는 건지.
제발 칼리만 아니어라,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싱긋 웃으며 끄덕였다.
“아, 그럼 저는 오전에 먼저 나가서 살짝 둘러보고 있을 테니 대공님도 시간 맞춰 오시면 어떨까요? 영지가 넓어서 멋진 곳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멀리는 위험할 거예요.”
“아, 네! 영지 안에만 있을게요.”
어차피 저 위험한 외성 밖으로 나갈 생각도 안 했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대공님도 조금 시무룩해지긴 했지만 동의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가서 얼른 나갈 준비를 하려 했는데 대공님이 데려다주겠다며 졸졸 쫓아왔다.
쫓아온 것까지는 좋은데…… 또 이놈의 의상이 문제였다.
“저, 영애. 혹시 내가 영애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네에?”
“오늘 식사 내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커다란 강아지 같은 이 대공님은 내 이상을 눈치채고 그 원인에 대해 지레짐작한 채로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다행히 바로 눈물을 흘리진 않았는데, 어쨌거나 엉뚱한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동시에 내 쪽으로 상체를 조금 기울인 탓에 살갗이 드러난 맨가슴이 더욱 가까이에 있었다.
‘엄한 의상을 걸치셔서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근데 여기서 입을 다물었다간 광증 수치라도 오를까 무서워졌다.
“……오늘 걸치신 옷이 너무 취향이라서 쳐다볼 수가, 아니, 아니. 너무 멋있으셔서 쳐다볼 수가 없…….”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뭐’라고 생각한 것까진 좋은데, 지나치게 솔직했다.
괜한 소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얼른 입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대공님은 물끄러미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인지 이내 결심한 얼굴로 뺨에 발그레 홍조를 띄웠다.
“이런 의상을 좋아하시는군요. 알겠어요.”
늦어도 너무 늦은 것 같았다.
“앞으로 영애의 이상형이 될 수 있도록 이쪽으로도 노력할게요.”
……변태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