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25)
* * *
“사시오! 오늘 잡은 블루 케마 도마뱀의 꼬리요!”
영주성 밖으로 나오자 와글와글한 도시의 거리가 나를 반겼다.
성과 마을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탓에 우리는 금세 사람들 사이에 낄 수 있었다.
“거리에 사람이 많네요.”
“아, 닷새에 한 번 큰 장이 열리는데 바로 오늘이에요, 아가씨.”
“앗, 아스. 호칭요.”
아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난감한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달린.”
“네, 아스.”
대공님은 시녀 두 사람과 함께 나가는 조건으로 성 밖 유람을 허락했다.
나야 나쁠 것이 없는 조건이었므로 바로 수락했고.
아무튼 우리는 거리에 녹아들 수 있게 옷도 갈아입은 상태였다.
“달린! 달린! 이곳은 사냥꾼들이 돌아오는 날이 곧 시장이 열리는 날이에요. 보통 5일에 한 번꼴로 돌아오거든요!”
“뭔가 감동적이네…….”
“네?”
“아니에요.”
우리 래빗 황녀님에게 ‘롤린’ 소리만 듣다가 온전한 이름으로 불리니 감동인 동시에 조금 허전하네요.
이게 바로 래빗 금단현상인가.
귀여운 래빗, 보고 싶다.
내 안에서 엠버넷 씨가 동의한다는 듯 희미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럼 저 장부터 구경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린, 넌 좀 진정해. 왜 아가씨보다 네가 더 신났어?”
“아, 왜. 나도 오랜만에 보는 거란 말이야.”
툭탁거리는 두 사람은 의외로 검 실력이 출중하다고 들었다.
괜히 대공님이 직접 붙인 인물이 아닌 모양이었다.
시녀라고 소개해서 당연히 귀족가 규수일 줄 알았는데, 사실은 검 좀 잡아 본 언니들이라나.
그걸 듣고 나니 든든해졌다.
“그나저나 영지민 사는 곳이 아주 코앞이네요. 이런 건 중앙이랑 달라서 신기해요.”
보통 영주성과 마을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는 사냥터나 정원 같은 것을 만들어 놓거나 초소를 세우고 해자를 둘러 놓아 성만 외따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반면에 북부는 상대적으로 성과 마을 간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웠다.
“아, 그건 몬스터의 습격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끔 ‘마나홀’ 현상이 생기면 마을 한복판에 몬스터들이 나타나기도 하거든요.”
“마나홀 현상요?”
자연 상태에서 비정상적으로 대량의 마나가 모이면 산과 마을 사이에 일종의 자연적인 포탈이 생기는데, 여기로 몬스터들이 나타나기도 한단다.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거야?
난 경악했다.
‘괜히 살벌한 동네가 아니었네…….’
왜 특무단 기사들이 강한 자들만 살아남는다느니, 애들도 걷기도 전에 검부터 잡는다느니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환경이 이랬구만.
“아스! 이게 웬일이냐. 네가 성에서 다 나오고! 대공 전하께서는 잘 지내시고?”
“오오, 린!”
마침 우리가 들어간 대로에 아스와 린의 지인들이 있었는지, 커다란 곰 가죽을 판매하던 사람과 옆에서 훈제 고기를 만들던 사람이 아는 척했다.
“그런데 옆에는…… 누구야?”
자연히 내게로 시선이 향한 순간 둘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이크, 그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지기 전에 얼른 로브를 푹 뒤집어썼다.
“허어, 아무리 봐도 중앙인인데? 설마 이번에 대공 전하께서 데려온…….”
“이 사람아! 데려온이 아니라 모셔 온!”
“아, 뭐…….”
곰 가죽을 팔던 사람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뭔 피죽도 못 얻어먹은 새끼 눈토끼처럼 생겼어?”
여기서도 토끼야? 그놈의 토끼.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저씨, 실례예요. 이분은 예비 대공비님이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조용히 나온 거니 다른 분들에게 아는 척은 하지 말아 주세요.”
“뭐, 알겠다…….”
“전하의 명이에요.”
“알겠대도, 끄응…….”
곰 가죽을 팔던 사람은 한참을 의심의 눈길로 나를 살피더니 슬쩍 찝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하나만 물어보면 안 되겠냐? 아침부터 이상한 얘기가 들리던데, 사술을 쓰는…….”
“아저씨!”
“예끼, 이 미친놈아!”
아스와 옆에서 훈제 고기를 팔던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나는 하하하, 그저 작게 웃었다.
“괜찮아요, 아스.”
어느새 검까지 빼든 아스를 진정시켰다.
으음, 이 언니 손이 참 빠르시네. 언제 뽑은 거야? 너무 빨라 나는 보지도 못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소문이 밖에까지 흘러 나갔네?’
본디 여론이란 사람이 많이 뭉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이걸로 확실히 알겠다. 누가 꽤 진한 악의를 가지고 아주 열성적으로 내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걸.
내가 보통 마음에 안 든 게 아닌 모양이네.
뭐, 이 사람들 입장에선 그럴 수 있겠지만.
“아가씨, 아니, 달린!”
“괜찮아요. 사실 제가 중앙에서 갑자기 오게 된 것도 맞고, 북부의 분위기 상 외지인이 단시간에 섞이기란 쉽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는걸요.”
나는 곰 가죽을 팔던 남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남자가 나를 보며 움찔했다.
“안녕하세요, 달린 에스테예요. 이번엔 그냥 놀러 나온 거라 달린이라 불러 주세요.”
“커흠……. 뭐. 크흠, 거 연약해 보이는 그, 중앙의 귀한 아가씨?”
곰 가죽을 팔던 남자가 뺨을 긁적였다.
중년 남성의 시선이 한참이나 내 얼굴과 로브 쪽을 훑었다. 이내 커다란 손으로 벅벅 제 목을 긁었다.
“험담을 하려던 건 아니고 뭔 요상한 소문이 돌아서 말이야…….”
“그럼요.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으니 영지민 여러분도 저에 대해 궁금하셨을 수도 있죠.”
“뭐, 이건 알겠네. 그, 귀한 아가씨가 일단 사술을 쓸 정도로 사악해 보이진 않구만. 난 사냥꾼이라 감이 좋아.”
이 말엔 눈을 슬쩍 깜빡였다.
제타르 경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여기 사람들은 감으로 판단하는 일이 많은가?
“무슨 오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수습되길 바라겠소. 아니, 바라겠습니다?”
“놀러 나온 거니 편히 말씀하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그러자 나를 보던 곰 가죽 아저씨가 표정이 좀 더 풀어졌다.
“그래, 뭐 그렇다면야. 한마디 좀 해도 되겠나? 왜 이리 작고 말랐어? 중앙에선 밥을 안 주나? 좀 팍팍 먹고 그래. 밥! 네 고기 좀 줘 봐!”
“니 고기냐? 내 고기지.”
옆에서 훈제 고기를 팔던 사람이 툴툴대며 고기를 내줬다.
“이거야 원, 열여섯 살짜리 내 딸보다 여려 보이니 걱정이군. 북부는 아주 춥다고, 귀한 아가씨.”
“아, 그건 나도 동감이야. 살을 팍팍 찌우라고.”
음, 어떡하면 내가 중앙에서는 보통 키에 평균 체격이란 걸 알릴 수 있을까.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저, 고기가 너무 큰데요?”
“아, 먹어, 먹어! 이 정도는 먹어야 키가 크지!”
아니, 그러니까, 먹어도 안 큰다고요.
막 거대한 고기를 받으려 얼떨떨하게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뿌우우우우-!
거대한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생경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시장 끝 저 멀리서부터 소란스러움이 몰려들었다. 뭐지?
“마나홀이다! 습격이야! 코볼트의 습격이다!”
마치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아스!”
“알고 있어요! 아가씨, 이쪽으로요! 린 너는 저쪽으로 가서, 마나홀 진원지를 살펴보고 나한테 보고해!”
“알았어!”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적응할 새도 없이 나는 아스의 손에 이끌려 달리고 있었다.
윽, 언니, 죄송하지만 제가 이렇게 빨리 뛰면…….
[저런, 갑자기 달리는 바람에 발목을 삐끗합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o(iДi)o 현재 건강 수치: 75]
내 이럴 줄 알았지. 발목에서 시큰거리는 통증이 살짝 올라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뛰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아스가 한 좁은 골목에서 멈췄다.
신기하게도 그곳엔 새하얀 빛을 뿜는 원이 바닥에 있었다. 그리고 웬 어린아이들이 그 원 안에 가득 있었다.
“아스, 성으로 가지 않아요?”
“아가씨, 마나홀은 동시다발적으로 생깁니다. 아마 영주성 성문 근처에도 생겼을 가능성이 높아요! 이럴 땐 여기 안전지대에 있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급하다 보니 아스가 호칭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마 이 하얀 원이 안전지대인 모양이었다.
“코볼트면 중간급 몬스터라 상대하기 어렵지 않지만 개체수가 많아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저는 그동안 얼른 특무단을 이쪽으로 데려오겠습니다.”
“그냥 같이 있어요. 위험하잖아요!”
“아가씨의 안전만큼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리고 아가씨, 저도 특무단 못지않게 강하니 염려 마세요.”
아스가 검을 고쳐 잡고는 내게서 떨어졌다.
나는 멀어지는 아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순식간에 변한 상황에 적응하기도 여간 쉽지 않았다.
일단 여기가 안전한 게 확실해서 나를 두고 간 거겠지?
고개를 돌리자 똘망똘망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언니, 언니, 아가씨야?”
“누나 누구예요?”
겁 없는 아이 몇이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허허, 살짝 웃었다.
“언니도 약해서 여기 있는 거야?”
“야, 보면 몰라? 우리 누나보다 훨씬 작잖아. 이 누나는 병에 걸렸나 봐!”
“아, 그렇구나!”
얘들아, 사람 앞에 두고 험담하면 못써요. 눈토끼 같은 언니의 마음이 아야 해요.
하얀 원 안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3황자 또래 정도로, 가장 큰 아이가 많아 봐야 여덟 살 정도로 보였다.
북부 사람들은 중앙 사람보다 체격이 큰 편임을 생각하면 실제 나이는 더 어리다는 소리였다.
‘그럼 난 일곱 살짜리 취급을 받은 건가…….’
“이거 놔, 나 갈 거라고! 우리 아빠가 검도 줬다고! 엄마가 휘둘러도 된다고 했단 말이야!”
“안 돼! 삼촌이 여기 있으라고 했잖아!”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원 안에서 소란이 일었다.
돌아보니 웬 조그만 아이 둘이 투닥거리며 다투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아이가 한 아이를 말리는 형국이었다.
“야, 안 된다고. 못 들었어? 우리는 아직 나이가 안 돼서 상대하면 안 된댔어!”
“어른들은 뻥쟁이야! 우리 형은 일곱 살 때 스몰렛을 잡았다고 했단 말이야!”
“너네 형아는 엄청 크잖아!”
아무래도 저 남자아이가 밖으로 나가려는 걸 그나마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 말리고 있는 것 같았다.
스몰렛이라니,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특무단 단원 중 하나가 말했던 몬스터 아닌가? 자기 아들이 일곱 살에 잡았다고…….
아무래도 여기 있는 유일한 어른으로서 중재해야겠다 싶어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어, 야! 디마! 안 된다고! 야!”
“어떡해!”
남자아이가 놀란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뛰어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