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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10화 (110/281)

◈110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27)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였다.

‘아니지, 이제부터 한동안 익숙해져야 할 천장이지.’

내가 머무르는 방의 천장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데 몸이 몹시도 무거웠다.

[상태 이상 [열병]이 진행 중이에요. (╥_╥`) 남은 시간: 1:43:23]

숨이 뜨거웠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상태 이상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건 기절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단 건가?

우선 이런 상태 이상은 처음인데…….

지금까지는 그나마 ‘기절’이라거나 ‘멀미’ 수준이었다면 ‘열병’은 이름부터가 병이었다.

‘그만큼 사용한 힘이 대단했다거나, 아니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힘이었다는 건가?’

코볼트 킹을 쓰러트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위험하다 못해 목숨의 위협마저 느낀 순간 몸속에 느껴졌던 거대한 힘.

분명 ‘래빗’의 힘이라고 했어.

내가 래빗의 능력을 쓸 수 있다니. 거기다 래빗이 전생부터 가지고 있었던 로아타 황제의 힘이라니.

래빗은 정말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거구나. 내 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힘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흐릿해진 시야로 누군가 보이는 것 같았다.

곧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다시 감겼다.

“아직 일어나지 못하셨지?”

“응, 아직이야. 그런데…… 이걸 어떻게 말씀 드리면 좋을지…….”

“됐다, 영애께서 건강을 회복하시면 내가 직접 말씀 드릴게. 그동안 넌 조용히 있어.”

귀에 익은 목소리. 제타르 경의 목소리였다. 함께 들리는 건 아스의 목소리였다.

두 사람은 남매라고 했지.

내게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소리를 내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이놈의 열병은 언제까지 가는 거야?

그래도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눈이 슬며시 떠질 것 같은데…….

“바깥 상황은 어때?”

“어떻긴, 그리 좋진 않지……. 일단 영애께서 빨리 일어나 직접 말씀하셔야 할 텐데. 계속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잖아.”

“흑마법사?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근데 칼리 님은 계속 그렇게 주장하고 계신 거야?”

“그렇지. 본인이 직접 봤다고 하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코볼트가 잔뜩 쓰러져 있었다고 하잖아. 거기다 같이 나갔던 다른 기사들도 봤다고 하니. 코볼트 킹이 끼어 있던 것도 문제야.”

마지막 순간, 칼리가 내게 무어라 외쳤었지?

그 멋진 언니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역시 사술을 쓴 것이지! 이, 이, 갓 태어난 눈표범처럼 연약한 꼴로…… 모두를 현혹했던 거구나!”

아, 그렇지.

이렇게 말하며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고도 했던 거 같다.

뭐, 나한테 관심 좀 가져 주면 좋지. 어차피 난 그 언니 호감, 아니 신뢰도를 올려야 하는 입장이니까.

“우선 난 나가 볼게. 후우, 지금 대공 전하를 말릴 사람이 없으니…….”

“말리지 말라고 그래, 오빠. 어차피 전부 헛소리나 지껄이는 것들 아냐? 아직 밝혀진 것도 없다며.”

아스와 제타르 경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눠 준 덕택에 상황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아가씨께서 얼마나 무해한 사람인지는 고작 며칠 봤을 뿐인 나도 다 알겠어. 그리고 우리 집안 감 몰라?”

“무슨 말인지 알지. 하지만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아. 대공 전하의 대응은 이 소문에 힘만 실어 주고 있으니…….”

“그래 봐야 힘에 굴복하겠지.”

정리하자면 아마 내가 쓰러진 뒤로 아스와 기사들도 도착했고, 내가 만들어 놓은 광경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나저나 거기에 대해선 뭐라고 설명해야 한담.

그런데 왜 대공님은 찾아오지 않았나 싶었더니.

“잠깐 평화로웠다고 전하의 힘을 잊은 게 틀림없어. 다들 반쯤 죽어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지 마라. 마나홀 또 터졌는데 나갈 인원 없으면 너나 내가 갈 수밖에 없어. 그럼 아프신 영애는 누가 지켜?”

깽판 치시는 중이구나…….

억지로 힘을 주어서 눈을 떴다. 서서히 찾아온 빛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내 작은 신음에 대화 소리가 딱 그쳤다.

“아가씨!”

“영애!!”

으음, 언니들 그리고 제타르 경. 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면 미안한데 머리가 울려요…….

다시 신음하자,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다들 목소리를 낮췄다.

“정신이 드시나요,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뇨……. 안 괜찮은 것 같아요…….”

내 목에서 형편없이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열병 한번 리얼하네 진짜.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몸이 무겁고 뜨거운 게 문제였다.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질 않네.

“혹시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어요……?”

“그…….”

“반나절입니다, 아가씨.”

망설이는 린을 대신해 아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제타르 경은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이런, 저는 얼른 나가서 눈을 뜨셨다고 알리겠습니다.”

반나절이면 그렇게 오래 지나진 않았네.

하루를 꼬박 채우고 일어나기라도 했으면 곤란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번 메인 퀘스트는 시간이 여유롭지 않은 편이었다.

“미안하지만 나 좀, 일으켜 줄래요?”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누워 있으려니, 갑갑하고 숨이 좀 막혀서 그래요…….”

나는 린과 아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 위쪽에 상반신을 기댔다.

‘후, 어질어질하네.’

“제가 쓰러지고 나서 어떻게 됐어요? 아니, 아이, 그 아이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디마! 디마는 어떻게 됐나요?”

마지막까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긴 했으나, 무척이나 힘든 난전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아이가 다쳤을지도 몰랐다.

아스와 린이 서로를 한 번 쳐다봤다. 두 사람은 각기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디마는 괜찮습니다, 아가씨.”

“맞아요, 전혀 다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물론 자잘한 생채기가 나긴 했지만 넘어지면서 다친 거래요.”

“아……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들리세요, 엠버넷 씨? 아이는 무사하대요.’

그러자 가슴에서 희미하게 반응이 돌아왔다. 그리고 미약한 염려가 함께 느껴졌다.

아마도 엠버넷 씨가 내 몸을 걱정하는 듯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스킬의 대가인걸요.

“저 아가씨…….”

“아, 아스. 자꾸 물어서 미안한데,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어떻게 됐나요?”

이미 아스와 제타르 경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나는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그러자 아스는 난감한 얼굴을 하면서도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러나 아스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하아, 하아.”

한기가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대공님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영애!”

물인지 땀인지 그의 머리가 푹 젖어 있었다. 아니, 잠깐만. 그냥 젖은 게 아닌데?

뺨에 저거 피 아냐……?

울먹이는 얼굴에서 묘한 박력이 느껴졌다. 덩치 때문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표정이 굳어 갔다.

마침내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워졌을 때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뒤로 주춤 물러났으나 침대 헤드보드에 막혔다.

쿵!

금방이라도 나를 덮칠 것 같은 기세의 대공님이 내 앞에 멈추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대, 대공님?”

“영애, 이, 일어나지 마세요……!”

아니, 지금 같은 상황에 어떻게 일어나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리고 방금 무릎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요…….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 바로 달려왔어요.”

무릎마저 튼튼한 건지, 아픈데도 참는 건지 모르겠지만 대공님은 아픈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그저 급박한 표정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이불을 잡았다.

“아, 아픈 곳은요?”

“괜찮아요……. 그, 진정하세요, 대공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시리도록 새하얀 뺨에 검게 말라붙은 피와 아직 붉은 피가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무구한 표정을 할 수 있단 것에 잠시 오싹함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 붉은 눈에서 투둑투둑 눈물이 떨어졌다.

“여, 영애께서 다쳤다고…… 파악하지 못한 마나홀이 나타나 무수한 코볼트 떼를 마주하셨다고, 그래서 눈을 뜨지 못한다고 해서…… 나는.”

“대공님.”

“이러려고 영애를 이 영지에 데려온 것이 아닌데…… 어, 어째서 난.”

부우욱. 이불을 잡은 손이 그대로 천을 찢었다.

“내, 내 손으로 모든 걸 마, 망치는 걸까요?”

무서울 만도 한데, 무섭다기보다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가 흡사 유령을 마주한 어린아이처럼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쥬, 쥭지 마라. 살기로, 살기로 해쨔나!”

어째 래빗이 다친 나를 보았을 때의 모습이랑 겹쳐 보여서 낯설지 않았다.

“대공님. 저는 다치지 않았어요.”

그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

그는 움찔했으나 죄인처럼 내 눈을 보지 못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사실 이렇게 된 게 대공님의 탓은 아니잖아?

“실례할게요.”

나는 손을 뻗어 이 남자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미 뺨이 축축했고 금세 손을 함께 적셨다.

“보세요, 대공님. 전 다치지 않았어요.”

“아, 아픈 건…….”

“아픈 건 그냥 지병…… 이라 하기엔 그렇네요. 몸이 좀 약해졌나 봐요.”

그러자 대공님의 표정이 더욱 흐려졌다.

입을 달싹이는 것이 내게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흘끗 아스와 린을 보았다.

그녀들은 얼른 내게 인사를 하고서 등을 돌렸다.

곧 문이 탁 닫혔다.

“영애, 그럼 아픈 곳은 어떤가요?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에요, 지금은 그냥 몸이 살짝 무거운 정도라 괜찮아요. 지금 이렇게 대공님과 후우, 이야기도 잘 나누고 있는걸요?”

괜찮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는데, 뜨거운 숨과 함께 내 상체가 기울었다.

툭, 두꺼운 장갑을 낀 손이 나를 받쳐 주었다.

손끝이 내 얼굴에 닿았다. 아, 시원하네.

“미, 미안해요. 장갑 더러울 텐데…….”

“아뇨, 시원해서 좋아요. 괜찮아요, 대공님.”

사실 장갑에 피가 묻었을지도 모른단 사실이 조금 꺼림칙하지만 시원하니까 그냥 두자.

대공님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영애, 혹시 소문이 사실…… 인가요?”

그래, 왜 이 얘기가 나오지 않나 싶었지.

아직 머리가 띵했지만, 이전에 소문이 퍼지는 속도를 보아선 반나절 동안 어디까지 퍼졌을지 익히 짐작이 갔다.

아스와 린도 염려하고 있었으니.

“제가 흑마법사라는 소문은 당연히 사실이 아니…….”

“정말 대단한 호위 기사가 있는 건가요?”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서로를 보는 시선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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