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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12화 (112/281)

◈112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29)

“네? 아뇨, 이건 그냥 어디까지나 가정을…….”

나는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멈칫했다.

그가 날 올려다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영애.”

깊은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잘 우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대공님의 표정이 절박해 보였다.

“알았어요, 영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할게요. 칼리를 그냥 두길 바라나요?”

“네에……. 저도 몸에 부담이 되어서 힘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얼굴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픈 건 난데, 본인이 열병이라도 앓는 것처럼 애처로운 얼굴이었다.

“뭐든, 뭐든 다 들어드릴게요.”

대공님은 이번엔 울지 않았다. 그러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끝내 참지 못한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엉엉 우는 것보다도 더욱 눈에 띄었다.

“죽는단 말, 절대 하지 말아 주세요…….”

“어, 죄, 죄송해요?”

“해마다 몬스터에게 죽는 사람이 늘어나 추모의 방식이 간결해진 북부에서도 죽음은 정말 슬픈 일이에요.”

“…….”

어쩐지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커다란 손이 머뭇거리며 내 손을 잡을 듯 말 듯 배회했다.

“대공님, 제가 이런 걸 숨긴 건…….”

“상관없어요. 나도 영애에게 광증을 숨겼으니까요. 하지만 안 되겠어요, 영애…….”

“네? 그, 뭐가요?”

“영애에게 친위대를 붙여 주고 싶어요. 영애가 어쩔 수 없이 이런 힘을 다시 쓰는 상황은 막아야겠어요. 이건 허락해 줄 수 있나요?”

눈물이 맺힌 채 잔뜩 찡그린 얼굴은 분명 간절히 요청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기분 나쁘진 않았다. 다만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 타이밍임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거절하는 것도 이상하지.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힘이라 했으니.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제야 대공님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친위대는 선별해서 바로 보내도록 할게요.”

“바로요?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영애, 지금이라면 일주일 동안 밤을 새더라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아요.”

일주일씩이나?

무시무시한 발언에 잠시 흠칫하다 말고 놀랐다.

어느새 거리가 무척 가까웠다.

“영애를 보는 동안엔 늘 이런 마음이에요.”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칼리에겐 따로 징계를 내리지 않을게요. 하지만 그 외에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이들이 있어서…… 따로 처리할 예정이에요. 흑마법이라니, 참 쓸데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작자들이 영애의 귀를 더럽혔어요.”

“어, 저는 괜찮은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들은 분명 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

그가 다감하고 무구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저기, 이름 모를 가신분들. 지금부터라도 입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마나홀은 어찌할 수 없겠지만, 정히 어려울 땐 영애를 위한 성을 하나 만들어 줄게요…….”

“성이요?”

“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그곳에서만 살 수 있게.”

천천히 대공님이 멀어졌다.

“걱정 마세요, 영애.”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 호감도가 대폭 올랐어요! (+7) 현재 호감도: 83]

새하얀 얼굴에 새하얗고 강아지 같이 순진한 미소가 방긋 떠올랐다.

“만드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수줍은 눈동자에 잠시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그는 다시 회의가 있어 가 보겠다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돌아갔다.

나는 그의 말을 한참 곱씹어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저기, 혹시 그거 ‘감금’은 아니죠……?

* * *

일은 예상보다 빠르게 처리됐다.

다음 날 오전.

“좋은 오전입니다, 영애.”

꽤 일찍 일어난 나는 엄선되었다는 내 친위대를 마주했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제타르 경?”

제타르 경, 그리고 특무대 3사단 단원들. 중간에 낯선 얼굴이 하나둘 보였지만 거의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네, 영애. 친위대로서 인사드립니다. 제가 친위대 대장입니다.”

아하.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편하다고 이렇게 배치해 준 건가 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치마를 잡고 다른 이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대공님께 이야기는 모두 들었어요. 제타르 경과 3사단 분들이 와 주셔서 저도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 드릴게요.”

“아닙니다. 으음, 저희가 지원한 거니까요.”

“아, 지원요?”

이곳까지 오는 긴 여정을 함께해서 이들도 정이 들었나?

이곳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아빠 부대 의리가 멋진데?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아, 좋게 이야기해 주시는 거죠?”

“아뇨, 정말입니다만…….”

경쟁이라니, 대체 경쟁할 게 뭐가 있다고요? 오히려 선뜻 나서기엔 어려운 자리 아닌가.

아니면 대공님의 압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으음, 어째서 믿지 못하시겠단 표정인지는 이해가 갑니다만 영애, 사실입니다. 특무단 내에서 뿐만 아니라 외성 수비대까지 나서는 바람에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외성 수비대라면 가르카 님의?”

“네, 가르카 그 작자가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입니다. 하지만 저희도 결코 질 수 없었습니다.”

제타르 경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애께서는 저희 단원의 아이를 구해 주셨으니 말입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디마라는 아이?”

“네, 당연히 기억하죠…….”

“그 아이가 바로 저희 단원 요르마의 둘째입니다.”

“맞습니다, 제 둘째 놈입니다.”

제타르 경 뒤에서 누군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덩치가 꽤 있는 기사였다.

특히나 함께한 여정에서 내 잠자리를 여러모로 신경 써 준 이였다.

자기 아이가 일곱 살에 스몰렛, 쥐 몬스터였나? 그런 몬스터를 잡았다고 자랑하기도 했었지? 기억난다.

“형인 첫째 아이가 워낙 출중하다 보니 디마 그놈이 신경이 많이 쓰였나 봅니다. 그날도 치기로 뛰쳐나간 거라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애. 목숨은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아뇨, 아뇨. 그 정도까지야…….”

“하하, 받아 주십시오, 영애. 북부인은 절대 목숨의 은혜는 잊지 않습니다.”

제타르 경까지 나서자 더는 할 말이 없게 됐지만.

그전에는 아직 도움이 필요한 세 살배기 조카를 보는 표정이었다면, 이젠 ‘우리 집에 딸내미가 하나 더 생겼다!’라는 시선 같아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제게 세 살짜리 딸이 생겼다 생각하고 지키겠습니다!”

“야, 딸이 뭐냐?! 영애, 저는 따님이라 생각하고 모시겠습니다!”

아니, 제게 아빠는 하나면 충분한데요…….

어쨌거나 나를 열정적으로 지켜 주신다니 나로서는 손해 볼 게 없었다.

앞으로 영지를 구경하다가 또 마나홀이 열린다면 그땐 그 힘을 쓸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심한 한기를 느낍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º·(˚ ˃̣̣̥⌓˂̣̣̥ )‧º·˚  현재 건강 수치 : 29]

시X, 눈물 난다…….

내가 다람쥐 알밤 모으듯 차곡차곡 모은 건강 수치가! 만땅까지 채웠던 건강 수치가!

‘망할 요정 XX야! 이딴 게 있다고 말이라도 하던가!’

[요정은 ‘나만의 로판’ 기능에 관여할 수 없어요! 요정도 유감스러운 일이었다고 이야기해요. (∘⁼̴⃙̀˘︷˘⁼̴⃙́∘)]

유감 같은 소리 하네. 선거 끝난 뒤의 정치인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퉤!

나는 삐딱하게 요정의 창을 응시하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영애? 어디 아프십니까? 산책은 취소를…….”

“아뇨, 아뇨. 잠시 마음이 심란해서요. 꼭 걸어야겠네요…….”

잘 가, 내 건강 수치……. 하지만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수치가 떨어졌다면 할 수 없지. 떨어진 대로 적응하는 수밖에!

지금은 직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때였다.

더는 악화되는 소문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를 짐작했을 때, 아마도 지금쯤이면…….

“제타르 경, 저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성 인근까지 싹 퍼졌죠?”

“예? 영애께서 그걸 어떻…… 아니,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충분히 해명에 힘쓰고 계시고…….”

“잘 해결되진 않았다는 거네요.”

“…….”

제타르 경이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저와 친위대는 영애의 결백을 믿고 있습니다. 영애께서 결단코 흑마법사나 사술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감사해요. 하지만 영지민들이 그렇게 생각해 줄지는 별개의 일이겠죠? 이해해요.”

나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빠 부대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아저씨들, 왜 이렇게 시무룩한 표정들이야?

“저는 괜찮아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충분히 이해도 하고 있고요.”

“하지만 영애…… 억울하실 텐데…….”

“아뇨, 뭐. 작정하고 여론 몰이하는 걸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라…….”

“예?”

하루에도 수십 번 휙휙 바뀌는 포털 연예 뉴스에 익숙한 전직 한국인 아니겠나. 그때의 경험에 따르면…….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난다.’

이 사람들, 아니 북부의 권력층은 대부분 무관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지.

무력은 출중하지만 이런 식의 체계적인 여론 몰이에는 대처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도 이해했다.

대공님이 열심히 잡아 족치시고 있는 것 같지만, 때론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도 있는 법.

“대공님께서 워낙 출중하시니까 이런 소문이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죠.”

북부 사람들은 대공님을 좋아한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숭배한다.

그렇기에 그의 옆에는 완벽한 반려가 있길 바라겠지.

한참은 모자라 보이는 중앙의 이름 모를 영애가 아니라 말이다.

아울러 이렇게 왜소하고 말라깽이이길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들어가자.’

이건 아직 신뢰도가 마이너스에 머물러 있는 칼리를 공략하기 위해서라도 중요했다.

소문이 퍼지면서 살이 붙을수록 칼리도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바꾸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 남은 메인 퀘스트 공략에도 좋지 않았다.

“제타르 경, 이건 나쁘게 말씀드리려는 건 아니고 그저 사실을 짚고 싶어 여쭙는데요, 북부 분들은 아무래도 타지에서 온 사람에겐 배타적인 편이겠죠?”

“예…….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이건 사실이니까요.”

제타르 경이 목덜미를 문질렀다.

“북부 역사상 경계를 맞대고 있는 타국이라거나 혹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 그리고 신전까지. 모두 좋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던지라 더욱 그렇습니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

“또 지금은 완전히 멸종됐지만 한때는 사람을 흉내 내는 몬스터도 있었던지라 낯선 이에 대해서는 일단 경계하고 보는 것이 관습처럼 뿌리내린 것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외지인인 나를 두고 하기엔 곤란한 말이었는지 그가 내 눈치를 살짝 보았다.

“네. 북부의 역사는 저도 조금 공부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 제 쪽에서 뼛속까지 북부인이 되어야겠네요.”

“예?”

“이곳에서는 위대한 짐승 ‘둑스’를 모신다고 알고 있어요.”

춥고 척박한 이곳에서 사람의 마음을 모으기 제일 쉬운 방법으로 종교가 있었겠지.

그 위대한 종교를 한번 보러 가 볼까.

“혹시 도시 내에 제가 ‘둑스’를 뵐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나는 생긋 웃었다.

“기왕이면 바깥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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