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31)
‘광증 수치!’
나는 얼른 손을 뻗었다. 그의 뺨을 쥐고 내 눈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변엔 들리지 않게 작게 소리쳤다.
“휴고!”
“아…….”
“전 괜찮아요. 저 사람이 조금 바빴나 봐요, 그렇죠? 잠깐, 잠깐. 제타르 경, 어디 가세요!”
“아, 영애. 신상만 알아 보고 오겠습니다.”
“가지 마세요!”
제타르 경이 멈칫하더니 대공님 쪽을 보았다.
“사람이 많잖아요! 걷다보면 길에서 부딪칠 수도 있죠. 다들 진정하세요.”
대공님이 무구하게 눈을 깜빡였다.
“영애, 하지만 저는 잘못해 놓고 사과도 하지 않는 자를 제 영지민으로 둔 기억이 없어요…….”
히익!
“오늘부터는 그런 사람도 하나쯤 있다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나는 그를 보며 생긋 웃었다.
“대공님 뺨이 따뜻하네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몸도 따뜻하다던데, 정말 그런가 봐요.”
발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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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착하다. 대공님이 참자. 참아 보자, 응?
“……영애가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래도 이것만은 하게 해 주세요.”
“네. 저분을 쫓아가지 않는 거라면 뭐든지요……. 엇?”
말을 끝내기 무섭게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그가 나를 안아 올린 거였다.
“여기 길은 영애에게 위험해요.”
“누구든 넘어질 위험은 안고 살아요, 단…….”
“그럼 내 걱정이 지, 지나친 걸로 할게요.”
높다, 높아. 이 시야에서 보는 세상은 이렇구나. 대공님이 큰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감탄했다가 입을 열었다.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너무 눈에 띄어요.”
“……하지만.”
“시무룩해하지 마시구요.”
그는 머뭇머뭇하며 나를 내려놓을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이야, 대낮부터 뜨겁구만, 형씨들?”
“크으, 나 젊을 땐 말이야. 더 뜨거웠어!”
“아가씨 쪽이 너무 작고 어린데? 아! 둘 다 어린가?”
당연하겠지만 이런 모습은 시선을 끌었다.
낭패였다. 저런 말을 듣고 대공님이 화내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황급히 그를 보자, 그는 발그레 뺨을 물들였다.
“여, 영애, 저희가 잘 어울린대요…….”
……아, 좋으시구나.
반면 정말로 시선을 끌게 되자, 내 쪽에서 시선 울렁증이 발생했다.
저기요, 저는 과제 발표도 싫어했거든요?
대공님이 내려 주자, 한 번만 좀 내려 주자.
“단…… 내려 주세요, 네?”
난 한 번 더 재촉하고서야 겨우 바닥에 내려올 수 있었다. 사실 주변의 시선보다도 한마디가 더 유효했던 것 같다.
“이렇게 위에 있으니까 더 추운 것 같아요, 단…….”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잽싸게 내려 준 것이다.
후, 이제 내려왔으니 다시 가면 되겠지? 생각하는데, 어깨 위로 따뜻한 것이 내려앉았다.
그의 망토였다. 그런데 이번엔 무겁지도 않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뒤에서 나를 안은 탓이었다. 겉옷 안에 내가 폭 들어갔다.
“그럼 잠시 몸을 녹이는 건, 괜찮을까요?”
다감하고 그윽한 목소리가 내 귀에 내려앉았다.
“영애 몸이 너무 차가워요. 잠시만요.”
등에 닿는 탄탄한 감각에 솜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어, 음, 네…….”
저, 이 남자 숙맥 아니었나?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휩쓸린 기분.
시선을 돌리자 나랑 눈이 마주친 제타르 경이 얼른 시선을 돌렸다.
“크흠, 사이가 좋으십니다…….”
“맞아요, 두 분 보기 좋으십니다!”
어째서인지 데생트가 마법 지팡이를 살살 흔들더니, 우리 주변에 봄바람을 일으켰다.
따뜻하긴 한데…… 쪽팔렸다.
영화 세트장에서 기계가 만든 바람을 맞는 배우라도 된 것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말이다.
“뭐야, 뭔데?”
“몰라. 청혼이라도 하나 보지?”
“허어, 공개 구혼을 하는 젊은이가 있어? 거 참, 상남자로구만.”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으음, 이런 곤란한 기분은 처음인데.
“그러고 보니 영애, 황녀님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네? 네?”
“보약…… 아니, 아니에요. 저도 제대로 이해를 못 해서…….”
그가 무어라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몰려드는 인파에 시선이 쏠린 나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슬쩍 벗어나 걷기 시작했다. 더는 못 참겠다. 난 시선 울렁증이 있다구요.
다행스럽게 그가 나눠 준 체온에다 쪽팔림에 열이 확 오르더라.
얼마 가지 않아 제타르 경이 얘기했던 분수대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열이 가시지 않아 전혀 춥지 않았다.
“와…….”
분수대에 도착하는 순간 감탄이 튀어나왔다.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분수는 부서졌지만 딱 보아도 신성함이 느껴졌다.
‘저게 위대한 짐승 ‘둑스’인가 보네.‘
메인으로 보이는 석상은 형체도 거의 남지 않았다. 그저 짐승의 발처럼 보이는 것만 겨우 남은 정도?
그 탓에 원래 형태가 어떤 짐승인지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신성해 보이기도 했다.
“거, 줄 서시오!”
“이쪽이요, 이쪽.”
“양초를 싸게 팔고 있소이다!”
그럼에도 분수 주변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 있었다.
다들 손에 양초나 가죽 같은 걸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서 아차 싶었다.
아, 뭐라도 챙기는 걸 깜빡했네.
“아가씨, 공물은 제가 준비해 왔습니다.”
“아, 고마워요. 아스.”
센스 있고 유능한 시녀님 덕분에 나는 한 손에 공물을 들고 차례를 기다렸다.
내 옆으로 대공님이나 데생트, 제타르 경까지 나란히 선 것을 보고 있으려니 웃음이 났다.
다 큰 어른들이 날 벽처럼 둘러싸고 있다.
“영애?”
“아, 단. 죄송해요. 당신이 이렇게 줄 서서 함께 기다리는 걸 보니 웃음이 살짝 나서요.”
이 영지의 주인인 그가 과연 자기 영지 안에서 지금처럼 차례를 기다리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하기야 생각해 보면 나도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지.
“데이트 같네요. 아, 이게 북부식 데이트가 맞으려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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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게 웬 떡이람. 나는 대공님의 풋사과같이 싱그럽고 붉어진 뺨을 보며 생긋 웃었다.
“밖에서 보니 더 잘생기셨어요.”
그가 눈을 굴리더니 가벼운 딸국질을 했다.
“여, 여, 영애는 항상 예뻐요…….”
“으음, 절 또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시네. 단도 항상 잘생기셨어요.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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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대공님?”
“영애…….”
대공님이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잠시 쓸어내리더니, 이내 살며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손, 잡아도 될까요?”
이번엔 내가 움찔할 차례였다.
커다란 손과 빨개진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어, 네……. 그, 정도는 허락받지 않고 잡으셔도 돼요.”
“…….”
“엄, 그래도 되는 사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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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엥? 왜 이렇게 호감도가 후하시지.
뭐지, 이렇게 잘 오르니까 왠지 무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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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저기요?
갑자기 그가 입으로 장갑을 벗더니, 이내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자, 장갑은 차가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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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 90 달성!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헐, 이게 뭐야.
저기요, 요정님? 듣고 계신가요, 요정님? 제가 말했던가요, 사랑한다고! 착하게 살았더니 요정님이 선물을 주신 건가요?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소폭 올랐어요! (❁◝(⁰▿⁰)◜❁)*✲゚* 현재 건강 수치: 35]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폭주 위험도가 하락합니다! (-10%)]
사랑합니다! 요정님!
또 수치가 하락하면 아마도 돌변해 욕할 것이 분명한 나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민들레 홀씨보다도 가벼운 사랑을 외치며 요정을 찬양했다.
‘너 이눔 시키. 지금만은 사랑한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주변에서 나를 흘끔거리는 시선이 많아졌다.
제타르 경과 아스가 나름 나를 향한 시선을 막아 주려 했던 것 같지만 무리였다.
아무래도 내 외모는 이들 사이에서 많이 튀는 편이었다.
몸집도 작지만 특히나 머리카락 색이 문제였다.
북부에서는 분홍색 머리를 결코 찾아볼 수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이미지를 바꾸러 온 마당에 변장 마법을 쓸 수도 없으니.’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을 즈음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비로소 거대한 분수대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우와…… 가까이서 보니까 더 멋지네.’
“아가씨, 제단에 양초를 놓으시면 됩니다.”
“아, 고마워요.”
막 제단에 양초와 함께 가죽을 놓으려는 순간이었다.
탁!
거친 마찰음과 함께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미쳤군, 어디서 중앙인 따위가 신성한 제단에!”
“아…….”
큰일 났다.
눈앞에 화가 잔뜩 난 웬 영지민 아저씨가 보였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중앙인이라고? 정말이야! 중앙인이잖아?”
“뭐지? 이 시기에 중앙인이라니, 설마…… 아! 나 본 적 있어.”
누군가 소리쳤다.
“대공 전하께서 데려온 여자다!”
“흑마법사?!”
으아아, 저 금기의 단어를! 나는 황급히 대공님을 보았다.
“감히 대공 전하를 사술로 세뇌한…….”
말보다 몸이 빨랐다.
“안 돼요!”
나는 그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사실 매달린 것에 가까웠다. 짐승처럼 사납게 가라앉은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나를 보는 순간 조금 가라앉긴 했지만…….
“영애, 놓아 주시면 안 될까요?”
“차, 참으세요, 단!”
“영애, 하지만 저는 영지에…….”
“…아, 안 돼요. 안 돼요.”
“유언비어가 퍼지지 않게끔 막을 의무가 있는걸요.”
“아, 그럼요, 영주로서 그러실 수 있죠. 하지만.”
“아뇨, 영애. 영주가 아니라.”
대공님이 살풋 웃었다.
“당신의 남편으로서요.”
순간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나 초인적인 순발력으로 간신히 그를 붙잡았다.
혹시나 해서 제타르 경과 아스 쪽을 보았다.
‘으아아아!’
대공님과 마찬가지로 명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마! 여기서 댁들이 나서서 제압하면 여론이 더 나빠진다고요!
“나서지 마요!”
그 순간이었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돌발) - ‘신자가 되어 보자!’
저런, 도착하자마자 안 좋은 소문과 악화된 여론으로 고생하는 당신!
본래 밑바닥에서 뒤집을수록 더욱 시원한 법이죠.
눈앞의 ‘분수대’를 원래의 모습대로 만들어 여론을 뒤집어 봅시다!
내용: ‘둑스’의 분수대를 원래대로 만들기
실패 시, 악소문 확정, 음모와 여론 조작의 원인을 찾기 어려워집니다.
보상: 건강 수치 8, 악소문 제거,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광증 수치 –2, ‘둑스’의 호감
기한: 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