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32)
이건 또 무슨 미친 퀘스트야?!
황당함이 앞섰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지만, 어버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젠장, 이딴 퀘스트를 주는 요정의 머리를 뜯어 보고 싶다, 진짜!’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저 분수대를 복구하라고 했지. 이걸 내가 어떻게 복구해? 난 마법사가 아니라고!
그럼 엠버넷 씨 때처럼 마법사 영혼이라도 소개시켜 주던가!
아니, 그보다 데생트가 마법사들도 복구하지 못했다고 했잖아. 그런 걸 내가 어떻게 하는데!
‘엠버넷 씨, 죄송한데, 엠버넷 씨도 안 되겠죠?’
혹시나 해서 물었다. 당연히 안 될 걸 알면서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답이 돌아왔다.
다정하고 선량한 엠버넷 씨는 그 와중에도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아니, 아니에요. 이게 무슨 기사님 탓이에요.
문제는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거, 거절은 못 하나? 방법은 없는데, 실패 시 패널티가 너무 커!’
막 30초가량이 흘렀을 뿐인데 주변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지금 당장 선택해야 했다.
시간을 더 끌었다간 성난 영지민들이 폭언을 하겠지. 그러면 참지 못한 우리 쪽 사람이 나설 것 같았다.
최악의 결과는 대공님의 광증 수치가 오르고 폭주로 이어지는 거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저런, 돌발 퀘스트는 거절할 수 없어요! (╬ Ò ‸ Ó)]
뭐, 왜!
[대신 패닉이 온 빙의자 님을 위해 방출하는 꿀팁! 신 ‘둑스’는 호기심이 많아요! 그리고 사람을 좋아합니다! 맛있는 고기도 좋아해요!]
저기요, XX! 도움이 안 되잖아! 그게 지금 무슨 도움이 되는데?
“거 미안하지만 저리 가시오, 우리의 성소가 그쪽 때문에 부정 탈라!”
비교적 온순한 말이었지만 내 옆에서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소리 난 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검 장식이 부서진 것이 보였다.
대공님의 눈동자에 불길한 빛이 스친 것도 같았다. 으아아아!
난 제타르 경과 눈을 마주했다. 경의 시선 또한 심상치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염려하는 듯했다.
‘왜 경까지 맛이 간 건데요!’
무슨 생각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지만, 여기서 대공님이 쑥대밭으로 만들게 둘 수는 없잖아!
그래, 차분히 다시 생각해 보자,
요정 저놈이 헛소리는 해도 팁 따위로 장난을 치지는 않았다. 말도 안 되어 보이지만 저런 퀘스트가 나온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야. 성공할 가능성도 반드시 있단 소리다.
나는 대공님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이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 또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생각보다 목소리는 의연하게 나왔다. 그러나 내 머리는 분주히 움직였다. 남은 시간은 약 1분 30초 정도.
……지금 막 뭔가 떠오르긴 했는데, 이게 과연 통할까?
그래, 인생은 한 방! 지금부터는 퍼포먼스다!
“중앙에서 온 데다, 오자마자 이런저런 소문을 달고 다니는 여자가 예비 대공비라고 나타나다니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당연히 탐탁지 않았을 테고.”
“영애!”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대공님과 눈을 마주했다. 살짝 고개를 저은 뒤 생긋 웃자, 그가 멈칫했다.
“하지만 여러분, 저는 그저 이곳을 수호하시는 위대한 신께 인사를 드리러 왔을 뿐이에요.”
“그래서?”
“그래, 그게 뭐 어쨌다고! 그건 댁 생각이지, 우리의 신성한 분수에 당신 같은 사람이 손대게 둘 것 같아?!”
“이곳이 진정 신성한 장소라면 저처럼 부정한 자가 만졌을 때 신께서 천벌을 내리시지 않을까요?”
“뭐?”
“아니면, 위대한 짐승의 그 위대함을 믿지 못하시나요? 만약 제가 정말 사술로 훌륭하신 대공님을 현혹했다면 이 도시를, 북부 전체를 보호하는 ‘둑스’께서 좌시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대놓고 반박하는 자들은 없었다.
대대로 체단 대공가는 이곳의 토속신, ‘둑스’와 동일시되어 왔다. 신과 긴밀하게 연결된 파트너 혹은 동료 뭐 그런 걸로 말이다.
이런 정보까지 기록해 둔 우리 리제의 보고서는 역시나 완벽했다. 무서울 정도로 말이다.
‘사랑해, 리제!’
여기서 내게 반박한다는 건 곧 대공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영지민들도 이를 잘 아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반론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말을 꺼냈더라도 지금 대공님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거냐고 되물을 작정이었지만.
“그저 인사를 하고자 하니, 둑스께서 옳고 그름을 가려 주실 거예요.”
그리고 느낀 건데, 이곳 북부 사람들은 뻗대거나 강하게 나오는 사람은 더욱 강하게 대하면서, 약하고 가녀린 것에는 오히려 불편해하기는 해도 대놓고 뭐라고 못 하더라?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약자에게 무르다는 건 아니고, 대체로 그렇다는 거다.
“설마 제 모습을 보시고도 저 분수대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지요?”
내가 손목을 들어 보이며 살랑 흔들자, 대부분이 혀를 찼다.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크흠……. 다, 당신이 흑마법이라도 쓰면 어쩌라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럼 둑스께 천벌을 받지 않을까요?”
니네 신이 그렇게 대단하시다며? 모든 말을 이 말로 끝내 버렸다.
남은 시간은 약 40초.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행히도 대공님의 얼굴은 고요했다.
……설마 지금 여기 있는 영주민 얼굴을 외우고 있던 건 아니겠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영주민들은 나를 노려보면서도 슬그머니 길을 비켜 주었다. 내 말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해 보였다.
아스는 양초를 건네는 대신 나를 졸졸 쫓아 오더니 나를 따라 분수대 앞에 멈춰 섰다.
“아스, 양초를.”
“아, 네!”
“아스, 저 분수대에 물이 조금 있네요?”
“아…… 매일 아침 영지민들이 채워 둡니다. 하지만 다음 날에 사라지구요.”
작은 소리로 묻자 아스 또한 속삭임으로 답했다.
‘이거, 수틀리면 퀘스트만 실패하는 게 아니겠는데.’
흘끗 뒤를 돌아보니 잔뜩 긴장한 제타르 경과 요르마 경이 보였다. 대공님은 이제 염려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긴장이 넘치는 것이…….
‘이대로 돌아가도 욕만 먹는다.’
어쩌겠어. 이미 결정한 거, 못 먹어도 고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난 빠르게 신발을 벗었다.
내 행동을 본 주변 이들이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건가?’ 하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치마를 걷어 올렸다.
“영애!”
으음? 고개를 돌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악하거나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눈을 피한 사람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젊고 나이 들고 할 것 없이 다.
왜 저래? 겨우 종아리까지 보인 걸 가지고.
남은 시간은 20초. 저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첨벙!
“영애!”
“아가씨!”
“헉! 미, 미친 건가?”
이게 잘 관리한 유적에 함부로 들어간 꼴이란 거 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퀘스트를 주는 건 언제나 다 이유가 있어서였지
말했듯 리제의 보고서에는 별별 정보가 다 있었다.
그중에는 ‘둑스’ 앞에서 갖춰야 할 예의나 제례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물이 너무 차갑습니다!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 ˃̣̣̥᷄⌓˂̣̣̥᷅ )/ 남은 건강 수치: 32]
[경고! 동상에 주의하세요!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떨어지고 말았어요! 남은 건강 수치: 28]
맨발로 다가가 신성한 짐승의 발등에 손을 얹고 기도할 것.
그러나 몹시도 춥고 사나운 계절 때문에 북부에서도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이뤄지는 제례였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거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남은 시간은 10초. 나는 손을 뻗었다.
‘윽, 석상이 너무 높아!’
그러나 어떻게든 해내야 했다. 나는 가져온 양초를 겨우 석상의 발치에 놓고, 가죽을 석상의 발등에 덮었다.
“위대한 짐승 ‘둑스’시여!”
발에 감각이 없다!
“중앙에서 내려온 미천한 자가 감히 인사를 드리옵니다.”
나는 간신히 짐승의 발에 맨손을 얹었다. 석상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당연했다. 이곳은 1년 내내 겨울인 곳이었으니까. 손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부디 제 결백함과 함께 당신을 향한 신앙을…….”
알아 달라고 해야 하는데, 입술이 달달 떨렸다.
아, 젠장. 남은 건강 수치가 너무 간당간당한데.
수치가 20대로 내려가면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기절 확률이 올라간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대, 아니 단 님!”
“놔!”
뒤에서 대공님의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퀘스트 시간이 모두 소진되었다.
이가 딱딱 부딪친다. 너무 추워…….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캉?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캉캉!
마치 조그만 짐승 소리 같은…….
나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이상했다. 손이 더는 차갑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검을 뽑은 대공님과 영지민 앞을 막아선 제타르 경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그들 모두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고개를 든 동시에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윽, 내 눈!
[돌발 퀘스트 - ‘신자가 되어 보자!’가 완료되었어요!]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빛에 나는 잠시 래빗이 쓰던 힘을 떠올렸다. 내가 봤던 것 중 가장 신성한 힘은 그 애가 쓰던 힘이었으니까.
천천히 눈을 다시 떠 보니, 나는 희한한 곳에 서 있었다.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뭐지?
눈앞에서 새하얀 빛이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무언가 형상을 갖췄다.
그 모습은 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