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38)
‘정말 신이라서 보통 여우와는 다른 느낌이네.’
여우라면 어릴 때 동물원에서 보았던 게 다였지만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고 있자니 조그만 강아지를 품에 안은 것처럼 기분이 편안해졌다.
“혹시 네 친구에 대해서 더 자세히 물어봐도 될까? 어떤 사람이었어?”
-응! 내 친구, 내 동료. 너도 이제 내 친구친구야!
“으응, 고마워…….”
……래빗 이후로 이런 귀여움은 처음인데.
혹시 북부에서 얘 데려가도 되나? 설마 그랬다가 북부가 무너지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내 친구, 어느 날 여기 나타났어. 음, 음, 인간 시간으로 200년 전쯤!
“200년 전…….”
그럼 나랑은 상관없겠네. 너무 옛날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경청했다.
둑스의 말은 이러했다.
어느 날 자신이 보호하는 땅에 이질적인 영혼의 냄새가 나서 나갔더니, 그 친구가 있었단다.
그리고 친구는 스스로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했단다.
친구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둑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둑스는 그 사람을 도와서 대륙을 돌아다녔다고도 했다.
‘가만, 이 신 북부 밖에서 돌아다녀도 된다는 거야?’
“넌 이 땅을 보호한다면서 밖으로 나가도 돼?”
-이 땅이 위험할 땐 돌아올 수 있어!
“아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그 친구는 자기 자신을 뭐라고 말했어? 혹…… 스스로를 ‘빙의자’라고 했어?”
-빙의자? 아니! 컁! 그런 말, 처음 들어!
“음, 그래? 그럼 ‘환생’이란 이야기는? 들어 봤어?”
-키잉, 그런 얘기도 안 했어.
환생도 빙의도 아니다. 그럼 남은 가능성은 하나인데.
‘차원 이동.’
혹시 그 사람은 육신까지 완전히 이 세계로 옮겨 온 걸까?
‘이 신이 말하는 것을 봐서는 이쪽인 것 같고.’
나는 허공을 한번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그럼 있잖아, 그 친구는 어떻게 집에 돌아갔어?”
둑스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봤다.
혹시나 대답해 주지 않을까 봐 초조했지만 아기 여우는 너무나 쉽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 순간이었다.
찌지지지지직!
[안 돼요.]
나는 그대로 여우를 떨어트리고 귀를 막았다. 으윽, 너무 시끄러워!
[빙의자 님은 저랑, 계약하셨잖아요?]
[다른 존재에게 호감은 괜찮지만…… 한눈팔면 싫어요.]
나는 머리를 파고드는 고통을 참으며 이를 깨물었다.
[나랑 한 계약이 먼저지, 안 그래?]
붉게 물든 요정의 창.
언젠가 래빗의 납치를 거부했을 때 보았던 새빨간 창이었다.
몸이 절로 덜덜 떨렸다. 누군가 억지로 두려움을 주입한 것처럼.
‘거지 같은 XX.’
그러나 나는 누군가 주입한 이 공포에 순순히 당하는 대신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맛을 느끼며 씩 웃었다.
“아, 너 쫄린 거지?”
[…….]
여우가 내 발치에서 캉캉 짖고 있었다.
곧 요정의 창이 파지지직 스파크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고통이 서서히 사라진다.
내 입술에서 주르륵 무언가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붉은 피였다.
‘아하, 답을 안 하시겠다?’
나는 손등으로 피를 닦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요정이 당황했다.
나는 이 사실을 가슴 깊이 묻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도발하고 정보를 듣고 싶었으나 요정이 더는 이런 대화를 용납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나는 하아, 숨을 내쉬었다. 폐가 아팠다.
-인간! 인간! 괜찮아? 다른 신이 개입했어! 내가 차단했어!
“응, 괜찮아……. 근데 방금 너 뭐라고 말한 거지? 네 동료가 집에 돌아간 방법.”
-응, 그거, 말했는데? 뭐냐면…….
“아냐 아냐, 말하지 마. 더는 아프기 싫거든.”
따로 건강 수치 알람은 못 봤지만 피를 토할 정도면 건강 수치가 내려갔을 것 같다.
거기다 요정과 거래할 요소를 찾은 거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날려 버릴 수는 없지.
“혹시 둑스라고 부르면 되려나?”
-응! 넌 불러도 돼! 친구야!
“그래, 고마워. 있잖아, 둑스, 여긴 어디야? 넌 날 어디로 데려온 거고?”
-여긴 네 꿈속, 내가 놀러 왔어! 공간은 내 거!
“아하……. 내 꿈이고 공간만 네가 만든 곳이라 이거지.”
나는 입술을 완전히 닦고는 쪼그려 앉았다. 현기증이 살짝 났지만 곧 괜찮아졌다.
“그럼 혹시 아까 우리 대화를 방해한 존재가 누군지 알아?”
-응, 요정?
“아하, 요정? 너도 그렇게 불러?”
-응!
요정은 따로 말을 붙이지 않았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건가.
“그럼 너랑 같은 신은 아니야?”
-같으면서도 달라. 왜냐면…….
다시 한번 둑스의 목소리가 차단되었다. 요정의 농간이겠지.
그러더니 귓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또한 요정의 것이겠지.
‘이 가증스러운 새끼.’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그렇구나. 제대로 안 들려서 아쉽다. 혹시 넌 얘 못 이겨?”
-으응, 못 이겨. 저건 너무 세고 나랑 조금 달라!
“음, 아쉽네…….”
-나, 안 약해!
“그럼 그럼, 이 땅을 수호하는 위대한 신님인데 어떻게 약하겠어. 존경해.”
그러자 아기 여우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초롱초롱 빛났다.
-정말? 나 존경해? 멋져 보여?
컁컁! 아기 여우가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냈다. 귀엽게만 보였다. 슬쩍 배를 간지럽혀주자 간드러지는 울음이 튀어나왔다.
“그럼, 존경하지. 엄청 세잖아?”
-맞아, 나 세!
귀를 뒤로 위로 쫑긋쫑긋하면서 캉캉 짖고 눈을 휘며 웃었다.
“그래, 아주 강해 보여. 그래서 말인데, 나 궁금한 게, 그럼 넌 실체가 없는 거야?”
-실체? 너희 인간 같은 육체 말이야? 그건…… 낑, 만들 수는 있지만 지금은 못 해. 아직 회복이 덜 됐어.
30년 전에 많은 힘을 사용하긴 한 듯 본신인 ‘거대한 짐승’의 모습은 할 수 없다고 했다.
한다면 다른 모습을 해야 한다는데 그건 하찮아서 하기 싫다나.
혹시 지금 이 여우 모습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떠올랐는데, 이거 잘하면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리고 신은 영혼에 가까워!
“아하, 영혼…… 말이지?”
-응!
역시나. 나는 내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여우를 향해 해사하게 미소했다.
‘엠버넷 씨, 혹시 지금 계세요?’
곧이어 가슴 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몬스터의 등급이나 기사들의 역량을 보실 수 있으셨죠. 혹시… 눈앞의 영혼도 한번 봐 주실 수 있겠어요?’
잠시 뒤 답이 돌아왔다.
-미안해요…… 불가능해요, 달린. 저건, 아니 저분은…… 제 역량으로는 도저히 쳐다볼 수도 없어요.
‘아하.’
그렇단 말이지.
“있잖아, 둑스. 너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지? 친구랑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응! 너 마음에 들어. 영혼 색도 이뻐!
“네가 날 친구로 삼아 줬으니까 나도 널 친구로 맞이하고 싶어.”
-정말?
“응, 너 밖으로 나갈 수는 있다고 했지? 나랑 같이 갈래?”
나는 보드라운 털을 만지다 한 친구를 떠올렸다. 이렇게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가진 아기님을.
“내 친구 중에 너처럼 작고 강한 친구가 있는데, 소개해주고 싶어.”
-강해? 강해?
“그,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강할걸?”
나는 아기 여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네 영혼을 부를 수 있게 해 줘.”
아기 여우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하늘을 향해 컁컁! 울었다. 곧 ‘좋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 그리웠어, 가 버렸으니까……. 네가 해 줘, 키잉. 해줄 거야, 친구?
“응, 그럴게.”
여우는 내게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대로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원한다면 네 가장 좋은 친구가 될게.”
여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뺨을 비볐다.
[스킬 ‘소환(lv.1)’을 획득합니다!]
[빙의자 전용 스킬 - 소환(lv.1)
등급: 레전드리(S)
빙의자만의 고유 기술, 어떤 위대한 영혼이나 소환수든 모두 소환할 수 있다.
단, 레벨이 낮을수록 불안정하다.]
난 눈을 찡그렸다. 눈앞에 요정의 창이 주르륵 떴다.
새로운 스킬? 허, 엄청 좋아 보이는데?
‘신기하네. 빙의 스킬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겨울의 땅 위대한 짐승의 신 ‘둑스’의 영혼과 계약했습니다. ᕕ( ᐛ )ᕗ]
[지나치게 거대한 영혼입니다! 소유 대신 계약 관계로 바뀝니다!]
[영혼의 등급은 추후 확인 가능합니다!]
여우에게서 붉은빛이 흘러나와 내 이마로 스며들었다. 여우의 붉고 보드라운 털만큼이나 따뜻하고 포근한 빛이었다.
-……인간, 이상해. 이상한 힘이 느껴져.
“어어?”
-너는 왜 이런 골치 아픈 계약을 했어?
아기 여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나와 요정의 계약을 눈치챈 것 같았다.
하하, 그게 참. 내가 바란 건 아니었어.
죽기 싫어서 한 거였거든…….
“그렇지? 나도 골치가 아파. 그러니까 네가 많이 도와줘.”
나는 생긋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멋진 신님.”
아기 여우가 활짝 웃으며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