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24화 (124/281)

◈124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1)

스승이 인사하자, 데생트 또한 얼른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뵙네요. 제1마법사님 맞으시죠?”

“오, 그렇다네. 아니, 그렇습니다! 허허허.”

지난번엔 날 못마땅해하다 못해 마법으로 술수를 쓴 것도 보았건만. 눈에 띄게 달라진 태도였다. 기꺼운 일이었다.

“꼭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요!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 좀처럼 허락을 해 주시지 않아서 말입니다, 허허허. 이 늙은이가 얼마나 예비 대공비 전하를 보고 싶었는지!”

어라, 이것 보게. 은근히 호칭도 바꿔 부르시네?

나는 생글생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하, 그렇군요. 아직 대공님께 따로 전달받은 바는 없지만 언제든 찾아와 주세요. 저도 마법에 관심이 많거든요.”

“오오, 그렇단 말이오? 그럼 지금이라도……”

“스승님.”

“아, 흠흠. 알겠다, 이놈아. 그전에 이 늙은이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괜찮으신지요?”

“네, 물론이죠.”

그러자 리바가 어째서인지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 미안함이 스쳤다.

“이 늙은이가 예비 대공비님을 오해했습니다. 크흠, 죄송하군요. 처음 뵈었을 때 워낙 영혼의 느낌이 그, 음, 특이하다? 아니, 오묘해서 말이오. 그래서 이후 흑마법사란 소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지 뭐요.”

“……아, 제 영혼이요?”

“네. 당신의 영혼은 조금…… 뭐랄까, 마력을 통해 들여다보니 묘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지요.”

사과하기 위해 꺼낸 이야긴 듯했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침 품 안에 안긴 이 아기 여우, 둑스도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임을 알아봤다.

혹시 이것과 관련 있는 걸까? 마법사들은 내 영혼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어?

‘관심이 가는데.’

하지만 리바는 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대신에 얼른 화제를 바꿨다.

“크흠, 크흠, 예비 대공비님.”

“달린이라 불러 주세요. 에스테 영애도 좋구요.”

나는 싱긋 미소했다. ‘아직은 식을 올리기 전이니까요.’라고 말하자 리바가 납득했다는 듯 끄덕였다.

“흠흠, 이름을 부르는 건 대공 전하의 분노를 사 이 늙은이의 생명줄이 짧아질 것 같으니, 에스테 영애로 하지요. 늙었어도 오래 살고 싶은 건 마찬가지니 말이지요……. 큼큼. 그나저나 에스테 영애, 혹시…… 지금 안고 계신 이 붉은 여우가 그, 지금 막 퍼진 소문의 주인공이지요?”

리바의 눈이 슬쩍 아래를 향했다.

“어머, 벌써 소문이 퍼졌나요? 이제 정오가 지났는데……. 네, 맞아요.”

……아니, 여긴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곳이야? 무슨 소문이 실시간 검색어보다 빠르냐고!

‘뭐, 이번엔 득을 본 것 같으니.’

리바는 물론 옆에 있는 데생트까지 과할 정도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둑스는 현재 내 품에서 새근새근 잠든 상황이었다.

“오오 세상에, 이 늙은이가 생전에 위대한 둑스의 전령을 또 한 번 마주하게 될 줄이야! 크흡, 그저 감격스러운 일이로군요.”

리바가 눈가를 훔쳤다.

“이 영지의 홍복입니다…….”

[인물, ‘제1마법사(리바)’의 신뢰도가 대폭 올랐어요! 45/50]

어라라, 잠깐. 이 할아버지 설마 지금 우는 거야?

“거기다 이 늙은이가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성소의 복구까지. 정말이지, 마법사들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군요. 고맙습니다, 에스테 영애.”

[인물, ‘제1마법사(리바)’의 신뢰도가 대폭 올랐어요! 50/50]

주름진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보다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 눈에서 이 영지를 향한 애정이 느껴졌으니까.

이건 내가 감히 뭐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전 한 게 없는걸요. 제가 그 일을 해낸 건 분명 위대한 ‘둑스’ 님의 뜻이셨을 거예요. 하지만 감사합니다.”

겸손해 보이려고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사실이 그래서 그렇게 얘기한 것뿐이었다.

한데 이 할아버지가 이젠 눈물을 글썽였다.

……뭐야, 이 영지 사람들 사실 눈물샘이 좀 약한 거 아니야?

[인물 ‘제1마법사(리바)’의 신뢰도가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MAX/50]

[퀘스트(서브) - ‘친해지길 바라, 안 친해지면 쟤가 죽음!’의 조건 달성! (현재 달성도: 67%)]

“그렇습니다, 둑스의 뜻이라……. 영애가 이곳에 오신 것도, 머무르는 것도, 어쩌면 영애의 존재조차도 둑스의 축복일지도 모르겠군요.”

“어…….”

“사실 최근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미 보셨겠지만 최근 마나홀 발생률이 급증하여서 말이지요……. 분수대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게다가 둑스 님의 전령이라는 붉은 여우까지 나타났으니. 이 늙은이는 안심이 됩니다.”

[축하합니다! 퀘스트 초과 달성으로 특별 보상이 주어집니다!]

나는 요정의 창을 흘끗 보았다가 다시 리바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르카처럼 신뢰도가 50 이상을 넘어 MAX에 다다르니 특별 보상을 주는 건가.’

뭘 주려는 거지?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제 눈을 닦아 내고는 이번엔 인자한 얼굴로 미소했다.

“앞으로 오랜 시간 잘 부탁드리지요.”

오랜 세월을 보낸, 연륜 있는 이의 시선이 나를 그윽하게 담았다.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이 시선.

“정말 안심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마나홀’을 끌어들이는 도구가 하나 사라져 고민이 컸는데 말이지요…….”

“스, 스승님!”

“왜, 이놈아. 내 감동을 방해하지 말거라!”

“거대한 마나홀이요?”

“아, 네. 마나홀 중에서도 특히 규모가 큰 마나홀을 이르지요. 이 영지의 마법사들은 그것이 나타나는 주기에 맞춰 거대한 마나홀을 끌어들이는 도구를 사용해 영지 바깥으로 끌어냅니다.”

“거대한 만큼 많은 몬스터가 나와서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몬스터가 나오기도 해서 말이지요.”

리바가 하늘을 슬쩍 보았다.

“거대한 마나홀은 마나홀들이 다발적으로 나타날 즈음에 나타납니다. 슬슬 나타날 주기가 되어서 만들어 두었더니 이놈의 수하들이 어떻게 관리하는 건지, 사라져버렸다지 않습니까.”

리바가 표정을 굳혔다.

“보통 큰일이 아닙니다, 떼잉.”

“아하하, 스승님. 이렇게 기밀을 다 말씀하셔도…….”

“뭐 어때, 이제 대공비님 아니시냐?”

신뢰도가 달성되어서 좋은데, 이 할아버지 조금 부담스러운 스타일인 것 같아.

“이야기 좀 하면 어때서! 내가 요즘 아주 골치가 아파, 엉? 산맥 쪽의 결계는 왜 또 깨진 거냐!”

“모,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일부러 깨트린 것 같긴 한데, 순찰한 쪽의 보고로는 그것이 산맥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고…….”

“어느 미친놈이 산맥을 통과해? 산맥 맞은편은 국경지대잖아!”

“그렇죠……. 밀정이라기엔 너무 대놓고 일을 벌여서……. 흔적도 꽤 오래됐고 해서 일단 몬스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흐음, 이 사람들도 일이 많은가 보네.

리바가 이마를 벅벅 문지르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휴, 멍청한 놈들 때문에 이 노인네는 그만 가 보아야겠군요. 반가웠습니다. 다음에 한번, 이 늙은이가 찾아가도 될는지요?”

“물론이죠.”

마침 나도 궁금한 부분이 있으니. 다음엔 꼭 영혼에 관한 걸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리바가 멀어졌다.

“이상하네요…….”

“아스? 왜 그래요?”

리바가 사라지고 나서 줄곧 침묵하던 아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굳은 채였다.

“아뇨, 아가씨. 그냥 이상해서……. 제가 알기로 거대한 마나홀을 끌어들이는 도구가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던지라.”

“그러게 굳이 훔쳐 갈 물건도 아니잖아? 가지고 있어 봐야 습격만 받을 거고.”

거기다 쓰지 않더라도 몇 달 내로 기능을 잃고 사라지는 일회용 도구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긴 했지만…….

‘우선 당장은 나와 관련 없는 일 같으니. 일단 기억만 해 둘까.’

* * *

그날 해 질 무렵, 나는 대공님의 요청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다.

식사 시간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기에 그사이 영주성을 좀 더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돌아다니면서 내 악소문을 퍼트린 주범이 누군지 한번 찾아볼 요량이었다.

겸사겸사 칼리 그 언니가 보이면 달려들 준비도 되어 있다.

‘이제 신뢰도 퀘스트에서 남은 건 칼리뿐이야.’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보다 서브 퀘스트가 적은 편이다.

대신에 하나하나가 꽤나 난이도가 높달지. 아니다. 그래도 목숨을 위협받았던 건 덜 했나……?

잘 모르겠다.

‘결국 황태자나 암살자 손에 죽을 뻔했냐, 몬스터 손에 죽을 뻔했냐, 차이 같은데 말이지.’

모피로 꽁꽁 싸매고 걷는 동안 둑스는 내 품에 노곤노곤하게 가르랑거리며 안겨 있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신이 나서는 뛰어내렸다.

컁!

아기 여우가 정원을 마구 뛰어다니며 컁컁 울었다.

-인간, 눈이다, 눈! 눈!

‘넌 여기에서 지겹게 본 게 눈 아니니?’

-하지만, 컁! 눈은 좋다!

‘그래, 그래.’

어째서인지 정원에는 사람이 적었던지라, 눈에는 발자국조차 찍혀 있지 않았다.

콕콕 찍힌 아기 여우의 발자욱만 가득한 눈밭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저기, 아가씨.”

“응? 린? 왜요?”

“음, 그게 말이죠……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꼭, 꼭 한번 여쭙고 싶었어요!”

“네. 물어봐요.”

아스는 젠타르 경이 불러 자리를 잠깐 비운 참이라 옆에는 린뿐이었다.

“제가 꼭 한번 여쭤보고 싶었는데, 대공 전하께서 함께 계실 때나 아스가 있을 땐 못 물어보거든요. 전하께선 무섭고, 아스는 잔소리에다 때리기까지 하니까…….”

“하하, 뭐든 편히 얘기해 주세요. 뭔가요?”

“네, 아가씨는 대공님의 어떤 부분에 반하신 건가요!”

“……네?”

나는 잠깐 당황했다.

아니, 여기서 침묵이 길어지면 안 돼!

“어…… 얼굴?”

당황해서 진심이 튀어나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