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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25화 (125/281)

◈125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2)

그러나 린은 ‘하긴 그렇죠’ 하고 쉽게…… 납득했다.

왜?!

‘이런 이유로 괜찮은 거야?’

“저희 대공 전하께서는 사실 대륙 제일의 미모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해합니다, 아가씨!”

“음, 그건 그렇죠.”

“잘 모르는 사람이나 맨날 너무 날카롭니 살벌하니 그런 소릴 하는 거구요.”

“아, 그것도 맞아요. 날카로운 얼굴이 얼마나 매력 있는데? 전 성격이 좀 더럽…… 아니, 성격이 까칠하고 차가워야 좋더라고요.”

“엇, 아가씨?”

“눈매도 이렇게 좀 올라가고, 처음 본 여자한테는 싸늘하지만 결국엔 사랑에 빠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도 모르게 내 취향이 그만.

“어, 음…… 말씀하신 성격이 대공님은 아니신 것 같…….”

“그렇진 않죠.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이상형이 하나뿐이겠어요? 저는 수줍음 많은 성격도 좋아한답니다. 특히나 제게만 수줍음을 타는 사람이요.”

“아! 그건 대공님이 맞으시네요!”

나는 대답 대신 싱글싱글 웃었다.

뭐, 대공님도 별반 다르진 않긴 하지. 내게만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하니까.

다른 사람에겐 시무룩한 얼굴로 칼을 들이대지만 말이지…….

그나저나 이상형 이야기를 줄줄 내뱉다 보니 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으나 곧 지워졌다.

“린!”

저 멀리서 내 친위대인 3사단 대원 중 하나가 린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상당히 다급한 표정이었다.

“엇 아가씨, 저 얼른 다녀올게요!”

“네, 다녀와요.”

이 정원엔 리바가 공들여 만든 마법이 걸려 있어 마나홀도 나타나지 않는단다.

잠깐은 괜찮을 거라며 린은 마지막까지 염려와 당부를 길게 남긴 뒤에야 그쪽으로 향했다.

볼수록 베키가 떠오르는 언니라니까.

‘근데 둑스는 어디로 간 거지?’

나는 정원 안쪽으로 걸어 다니다가 곧 둑스를 발견했다.

어째서인지 둑스는 정원 구석에 가만히 멈춰서 있었다.

‘둑스?’

둑스의 앞에는 웬 노인 하나가 넘어져 있었다. 난 화들짝 놀라 얼른 달려갔다.

“헉, 괜찮으세요?”

“으음? 응? 아, 고마워. 아가씨.”

예순? 아니, 일흔 살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였다.

접질렸는지 발목을 붙잡고 있기에 그 앞에 얼른 쪼그려 앉았다.

“다치셨나요? 의원을 불러 드릴까요? 아니, 마법사를?”

“흘흘, 괜찮아. 그냥 누가 밀어서 넘어진 거거든.”

“헉, 누가 밀쳤다고요?”

여긴 유교도 없, 아니, 없는 곳이지만. 아무튼 힘 없는 노인을 밀쳤다고? 이런 매너 없는 인간 같으니!

누군지는 몰라도 머리털이나 빠져라!

“으음, 그래. 아가씨는 알까 모르겠네. 저어기, 내성 수비대장 하는 기사 양반인데, 칼리라고. 날 밀치고 가 버렸지…….”

……으음, 칼리 언니 머리털은 조금만 빠지는 걸로.

“칼리 님이 대체 왜 할머니를 밀어요? 아니다. 어쨌거나 칼리 님이 잘못하셨네요.”

“흐응? 재미난 말이네, 그려. 보통은 이 노인네가 잘못해서 밀쳐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나이 많으신 분을 미는 건 잘못된 거죠.”

나는 숄을 벗어 할머니의 발목을 감쌌다.

“혹시 뭔가 죄를 저지르셨나요?”

“흐음, 아닌데.”

“그럼 칼리님이 더더욱 잘못하셨네요.”

일단 만져 봐서는 부어오른 곳은 없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 할머님 뼈가 꽤 굵으시네…….

나는 꼼꼼히 발목을 감싸고는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가 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걸으실 수 있으시겠어요? 부축해 드릴게요!”

“……부축? 미안한데 아가씨는 내 몸을 지탱하다 아가씨 뼈가 먼저 부러질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제 뼈를 걱정해 주시는 분이 많으신지. 아니에요! 이래 봬도 꽤 튼튼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도와드릴까요?”

할머니가 나를 빤히 보더니 이내 씨익 시원하게 웃었다.

이렇게 보니 눈매가 꽤 날카로운 할머니였다.

-컁, 인간, 인간. 왜 발목에 이거 감쌌어?

그때, 둑스가 말을 걸어왔다.

‘어? 그야 넘어져서 발목을 다쳤으니까?’

-다쳐? 아픈 거? 하지만 이 나이 든 인간, 다치지 않았는데?

‘……뭐?’

둑스가 컁! 하고 짖었다. 어쩐지 살짝 경계 어린 울음이었다.

-인간, 북부의 전사는 쉽게 다치지 않아.

그 순간 주름진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흐음, 들은 대로 아주 얇고 가는 팔이구려. 정말이지, 내 증손녀가 잡아도 똑 부러지겠어.”

“……네? 하하. 증손녀가 혹시 몇 살일까요?”

“세 살. 아주 귀여운 말썽꾸러기지.”

기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정말 갓 태어난 눈표범 새끼 같은 아가씬데…….”

나이가 지긋한 눈이 나를 향해 휘어졌다.

“죽기엔 아깝겠어.”

눈을 깜빡이는 것과 동시에 목에서 차가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게 대체 뭐다냐. 아니, 무슨 상황이야?

판단은 빨랐다. 이런 순간에 목에 느껴지는 서늘한 물건이라면 위험한 것일 테니까.

“누구신가요? 제게 원한이 있으신지요?”

침착한 내 목소리에 할머니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호오, 놀라지 않으시구려?”

“생각보다 강하게 키워져서요.”

요정 새끼가 날 그렇게 키웠습니다. 참 유감스럽게도 말이죠.

[요정이 뿌듯해해요! °˖✧◝(⁰▿⁰)◜✧˖°]

혈압도 올려 주고 말이죠. 닥쳐, 이놈아.

“흐음, 그렇단 말이지……. 일단 뭐,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오.”

할머니가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그녀의 손은 텅 비어 있었다.

목을 만져 보니 차갑고 얇은 것이 느껴진다.

고개를 숙이니 꽝꽝 얼어붙은 손수건이 목에 둘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북부에선 말이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전사에겐 무기가 된다오. 그렇게 키우고 키워지지.”

“……저를 죽이려고 하신 게 아닌가요?”

“그럴 리가? 내가 왜 아가씨를 죽여? 무서운 아가씨로구먼.”

“하지만…….”

나는 더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죽을 뻔했다면 돌발 퀘스트가 떴을 거야.’

보통 죽음의 위협을 당할 때 돌발 퀘스트가 떴다. 암살자를 마주했거나 황태자가 나를 죽이려 들었을 때처럼.

혹은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가 진행 중이란 알람이 떴겠지.

확실히 그 스킬을 얻은 뒤로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 예민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렇구나. 제가 오해했나 봐요.”

나는 스르륵 표정을 풀며 생긋 웃었다.

“그런데 왜 죽기엔 아깝다고 하셨어요?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어요, 할머니.”

“흐으음.”

할머니가 턱을 문지르더니 이내 날카로운 눈매를 접으며 마주 미소했다.

“그야 아가씨가 이 북부에 살기엔 적합하지 않아 보여서 한 말이지. 약하고 연약한 것들은 금방 아프거나 죽고 마는 혹독한 환경이니 말이야.”

“그렇구나. 좀 더 따뜻하게 입고 다녀야겠어요. 조언 감사해요.”

한차례 소동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기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깨달았다. 이 할머니가 지금 상황을 일부러 이렇게 만들고 있다는 걸.

뭐 하시는 분이지.

어쨌든 우선 의사라도 불러야겠다 싶었다.

“그럼 일어날까요? 바닥이 차요.”

“뭐, 일어는 나겠다만 아가씨 부축을 받기엔 아가씨 어깨가 빠질 것 같구먼.”

“사람의 어깨는 그리 쉽게 탈구되지 않아요.”

“아닌데, 쑥쑥 잘 빠질걸?”

그렇게 말하면서 할머니가 내가 내민 손을 잡았는데, 하마터면 그대로 엎어질 뻔했다. 뭐야, 무슨 힘이 이렇게 세?

“쯧쯔, 보시게. 아가씨는 여기 살기엔 연약하다니까.”

“아하하, 힘이 세시네요…….”

결국 내 도움을 받지 않고 쑥 일어난 할머니는 생각보다 더 정정해 보이셨다.

아니, 그보다…… 왜 이렇게 키가 크셔?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허리가 살짝 굽었음에도 나보다 훌쩍 큰 키였다.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작기도 참 작구먼. 우리 마을 로라보다 작겠어.”

“아하하. 그 로라도 설마 세 살은 아니겠죠?”

“열네 살이지. 좋은 사냥꾼이야.

아무래도 나는 이 영지에서 내 나이로 보이긴 그른 모양이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걸으실 수는 있으세요? 부축…… 은 무리겠네요.”

“뭐, 걸을 수는 있을 것 같네. 조금 절뚝여서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일단 친위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모셔 가야겠다 싶어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는 내가 어디로 간다고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별말 없이 함께 걸었다.

싱긋 웃어 보였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스쳤다.

‘이 할머니, 다치지 않았다고 했지. 근데 절뚝인다, 라…….’

-인간, 인간!

그때 둑스가 내 발치에서 폴짝 뛰며 꼬리로 내 다리를 마구 쳤다. 나는 둑스를 들어 올렸다.

안고 보니 둑스가 입에 이름 모를 풀을 물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둑스, 뭘 물고 있는 거야?’

-약초! 나이 든 인간이 인간 뼈가 부러진다고 했다! 그건 인간에겐 심각한 부상이야! 이거 먹어!

‘아하……. 고마워. 아직 뼈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말이야.’

나는 둑스의 입에서 약초를 받아 들고는 잠시 쳐다보다 약초를 반으로 나눴다.

“저, 할머니 이거 가져가세요. 뼈에 좋은 약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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