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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30화 (130/281)

◈130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7)

나는 그의 품에서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의 존재가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했다. 당황했기 때문인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아래에서 올려다본 얼굴은 여전히 유려했기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한순간이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시선이 스쳤다. 변함없는 눈이었지만 어쩐지 온도가 다르다고 느꼈다.

“꽉 잡아라, 영애.”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보단 눈앞의 몬스터들이 먼저였다.

크와아아악!

거대한 발톱을 가진 앞발이 뎅겅 잘려 저 멀리 날아간다. 그저 한 번 베었을 뿐인데, 놀랍도록 강한 힘이었다.

‘이 사람, 몬스터 잡으러 국경지대에 갔던 거 아니었나?’

어째서 북부에, 그것도 바로 여기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키에에엑!

그러는 동안에도 라이칸은 나를 안은 채로 잘도 몬스터를 잡았다.

‘진짜 잘 싸우네.’

심지어 내 쪽으로는 핏방울조차 튀지 않아 감탄했다.

-인간!

어느새 둑스가 내 발밑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내가 손을 뻗자, 얼른 내 품으로 쏙 들어왔다.

아기 여우는 라이칸을 보며 으르릉댔다.

-낯선 냄새! 컁!

‘괜찮아, 둑스. 이 사람은 내 편이야.’

귀를 쓰다듬으며 말을 건네자, 둑스가 라이칸의 옷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마구 비볐다.

-인간, 아깐 방금 너무 위험했다……. 나는 힘 많이 못 줘! 인간, 내 힘을 줘도 쓰지 못해!

‘으응, 미안해.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나는 상처투성이 손을 바라보다 은근슬쩍 소매 사이로 숨겼다.

라이칸이 나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다시 앞을 보았다.

카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몬스터의 발톱이 잘려 날아간다.

“……못 본 사이에 새 애완동물이 생겼군.”

“아, 이 아이는…….”

무려 신님인데요. 지금은 힘을 잃어서 이런 앙증맞은 모습이지만…….

“그것까지 죽지 않게 보호하느라 바빴겠군.”

-캬앙!

나는 발끈하려는 둑스를 잡고 얼른 입을 열었다.

“애완동물이 아니라 제 친구예요. 귀엽죠?”

“……귀엽군.”

“아, 역시 황자님도…….”

“그쪽 말고 다른 쪽 얘기한 건데.”

“네?”

라이칸이 다시 고개를 돌렸기에 다음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그의 귀가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럼 새로 귀여워하는 친구가 생긴 건가? 그 애가 실망하겠군.”

이윽고 라이칸이 가장 가까이 있던 몬스터를 완전히 쓰러트림과 동시에 내게 속삭였다.

낙엽처럼 쓰러지는 몬스터를 멍하니 바라보다 시선을 들었다.

‘아니, 라이칸 이 사람, 이렇게 강했어……?’

황실의 피를 이은 만큼 대단한 검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육아물에서는 전투를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이 남자와는 매번 래빗의 육아(?) 건으로만 마주했던 탓에 실력을 볼 일도 없었다.

‘그런데 잠깐, 지금 라이칸이 뭐라고 했지?’

시선이 마주치자 새하얀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뺨에 튄 피가 눈에 띄었다.

푸르른 하늘 아래, 그가 보일 듯 말듯 웃음 지었다.

“그 황자님…… 지금, 뭐라고 하셨죠?”

“아, 울음소리로 시끄러운가. 그 애가 보면 실망하겠다고 말했다.”

그걸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었다.

왜, 지금 이 근처에 래빗이라도 있는 것처럼 얘길 하는 거지?

그 순간이었다.

크롸라라라락!

독수리 머리를 가진 몬스터가 달려와 포효했다.

날개는 없었지만 타조처럼 굵은 다리를 가져 몹시도 빨랐다.

‘히익!’

금방이라도 라이칸이 서 있는 곳을 덮칠 것 같건만 라이칸은 태연했다.

둑스가 내 품에서 머리를 들었다.

검조차 들지 않는 그의 모습에, 바짝 긴장하여 나라도 나뭇가지를 들어야 하나 생각했다.

서걱!

이도 잠시 3미터에 달하는 몬스터가 눈앞에서 천천히 쓰러졌다.

쿵!

쓰러진 사체 뒤로 조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색이 익숙했다. 은발, 아래로 내려갈수록 고운 하늘빛을 품은 머리카락.

조그만 손에 야무지게 쥔 딸랑이를 본 순간 나는 입을 벌렸다.

‘래빗?!’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조그만 황녀님이었다.

“후, 뵬 것도 아닌 것이, 꼭 뎡치만 더럽게 쿠지.”

거대한 몬스터를 단 한칼에 쓰러트린 모습은 마치 환상으로 보았던 로아타 황제를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래빗은 이쪽을 보는가 싶더니 곧바로 쪼르르 달려왔다. 순식간에 다가오더니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치사하다!”

래빗이 외친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옆에서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말이지?”

“그로케 먼저 달려가 버리는 게 어디 있나? 내가 뎨일 먼져 인사하려 했는데!”

“다급했다.”

“뉴군 급하지 않았냐!”

래빗이 발끈 화를 냈다.

“넌 나와 다리 길이부터 다루지 않우냐! 배려가 없눈 놈 같우니!”

음, 아무래도 나를 보자마자 두 사람 다 뛰어온 것 같은데, 라이칸이 먼저 도착한 듯했다.

“너까지 나서지 않아도 될 거라 판단했다.”

라이칸이 한 팔로 나를 안은 채로 다른 손으로 황야를 가리켰다.

“네가 달려오지 않아도 나 혼자 처리가 가능하지 않나. 위험에 뛰어들 필요는 없었어.”

“멋있눈 척하지 마라, 속 보인댜!”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래빗이 라이칸을 살짝 노려보며 눈을 감을 것같이 확 찡그렸다.

“롤린이한테 잘 보이려눈 개슈작을…….”

“그만하지.”

보자마자 투닥투닥 싸우는 두 남매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제야 래빗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롤린!”

“네, 황녀님. 오랜만이에요.”

래빗의 얼굴에 분노가 사라지고 반가움과 함께 환한 웃음이 어렸다.

“롤린, 오째서 얼굴이 반쪽이 되었지?”

“엄,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먹긴 잘 먹었거든요. 근데, 오랜만인데도 여전히 제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애칭이다!”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태도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이 두 사람…… 못 본 사이에 엄청 친해졌네.

“어, 못 뵌 사이에 두 분 많이 친해지셨네요?”

“누가 친해져? 저 놈운 요기까지 오는데 쓸모있눈 수단이었울 뿐이다.”

래빗이 한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라이칸 쪽에서 헛웃음 소리가 느껴졌다.

“그렇게 속닥이는 척해도 내 귀엔 다 들린다만.”

사실 래빗을 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인사가 늦었네요.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황자님.”

나도 모르게 내 허리를 잡은 라이칸의 팔을 붙잡자, 라이칸이 움찔하는 것 같았다.

난 생긋 웃었다.

이 날카로운 얼굴도 오랜만에 보니 참 반가웠다.

“저희도 오랜만이죠?”

“……그래.”

아,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는데.

“인사부터 제대로 올려야 할까요?”

“되었다. 영애는 이제…… 올리지 않아도 좋아.”

라이칸이 미묘하게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조각처럼 반듯한 옆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변함없는 미모네…… 음?

‘뺨에 못 보던 상처가 있잖아?’

아마 생긴 지 시간이 좀 지난 듯 아물다 만 상처였다.

아팠을 것 같은데……. 상처에 대해 말을 꺼내려는 순간 래빗이 끼어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안고만 있울 거냐?”

“뭐, 뭐?”

래빗이 뿔이 난 표정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안고 있울 거면 빨리 마챠로 데려가던가. 우리 롤린운 추위를 많이 탄단 말이다. 얼어붙운 눈토끼가 되면 책임질 고냐?”

“……데려가려 했다.”

마차라니? 아무것도 없는데?

의문을 가지는 순간 뒤에서 드르륵 바퀴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사륜마차가 보였다.

“황녀님!”

“황자 전하!”

마차 주변으로 기사들이 잔뜩 달려오고 있었다.

“1조! 전방의 몬스터부터 처리하도록!”

“옛!”

그들은 우리 상황을 보더니, 반 정도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몬스터 쪽으로 달려갔고 나머지 반은 우리에게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께서 말리시기도 전에 달려가셔서…….”

“됐다. 너희로는 말릴 수 없었을 테니.”

라이칸이 나를 내려 주었다.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잠시 휘청거렸다.

‘윽, 스킬을 너무 오래 썼나.’

팔을 잡아주는 단단한 손에 기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울먹이는 아기님이 바로 앞에 있었다.

“달린! 괜찮느냐? 아푼 것이야? 추워? 오디가 아파!”

“끄응, 아니에요, 황녀님. 조금 지쳐서 그래요. 그리고 춥진 않아요.”

나는 어깨에 걸친 망토를 잡고 흔들어 보였다.

얼어붙은 들판 한가운데 떨어져도 춥지 않았던 건 이 마법 걸린 망토 덕분이었다.

“북부에서 절 신경 많이 써 줬거든요. 특히나 옷은요.”

이렇게 말하다 말고 달려온 황실측 기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인지 그들은 나를 보고 움찔하더니 시선을 피했다. 미묘한 표정들이었다.

왜 그러지?

“그나저나 황녀님, 황자님. 어째서 두 분이 여기 계신 거예요?”

“나야말로 묻고 싶군. 어째서 성에 있어야 할 영애가 이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거지?”

“이놈, 아니 오뺘 놈의 말이 맞다. 어찌 된 고냐, 달린!”

“…….”

“그 새, 아니, 그 놈둘이 널 괴롭히눈 고냐? 대공놈이야?”

“아니에요. 그, 대공님은 잘해주셨어요.”

이야기하려면 사정이 긴데 말이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꽤 흘렀어.’

“황녀님, 황자님. 죄송한데, 자세한 말씀은 영주성에 들어가서 드려도 될까요? 제가 조금 급해서요.”

대공님께 별일은 없겠지?

요정의 창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땐 자세히 중계를 해 주지 않으니 불안했다.

내게 다정했던 제타르 경과 친위대, 아스와 린의 얼굴을 떠올릴수록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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