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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32화 (132/281)

◈132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49)

“저는 괜찮아요. 몇몇 분이 갑자기 나타난 저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하는걸요, 다들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지금까지 달린은 몇 번이고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을 처리하려는 휴고를 말렸다.

퀘스트를 위해서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다치는 걸 그리 반기지 않아 했다. 심지어 흉악한 소문을 낸 자였더라도.

그렇다고 휴고가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달린의 시선 밖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그와 측근들만 알 터다.

하지만 그가 너무 자비로웠던 모양이었다.

영애를 위해서라면 더 깔끔하게 조용하게 처리를 해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영애를 의심하는 것들은 살아있지 않았을 테니.

그는, 청소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니, 이 일로 그의 영주성에서 사람이 반 이상 사라져도 좋았다.

후회와 아쉬움을 곱씹던 휴고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앞에는 황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2황자가 있었다.

“차갑고 이성적이며 누구에게나 냉정한 사람이 좋은 것 같아요.”

그 순간 달린이 작게 속삭이던 이상형에 관한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본능에 가까운 감이었다.

날카롭게 생긴 얼굴과 푸른 눈.

이성적이고 차가운 성격.

그가 알고 있던 2황자의 정보를 곱씹을수록 휴고의 얼굴이 흐려졌다.

유약해 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눈빛은 살얼음이 언 듯 차가웠다.

달린 에스테는 황녀의 유모였다.

그렇다는 건 황자들과도 자주 보았을 터였다.

과연 달린이 이야기했던 이상형과 눈앞의 황자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휴고가 처연하게 시선을 내렸다.

기절한 달린은 대답 없이 색색 가냘픈 숨만 내뿜을 뿐이었다.

* * *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의 하늘은 새파랬다.

‘뭐야, 아침?’

나는 눈을 깜빡이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어째서인지 몸이 매우 가벼웠다.

어라, 스킬 후유증이 있는 거면 몸이 조금 뻐근할 건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아침이라니, 말도 안 돼. 혹시 아직 낮인가?’

아니, 하늘이 저렇게 파랗다니. 딱 이곳의 아침 하늘이잖아? 창문 너머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마지막으로 눈감았던 때가 이미 한낮이었다.

아니면 내가 한 시간 정도만 잠들었던 건가?

‘보통 상태 이상 지속 시간이 1~3시간 정도니까. 그럴 수도 있겠어.’

“이로났누냐.”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커다란 소파에 앉아 턱을 괸 래빗이 보였다.

아니, 꽃받침 하듯 턱을 괸 래빗이라니, 너무 귀여워!

핫, 이럴 때가 아니지.

왜인지, 래빗의 옆에는 아기 여우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심지어 래빗의 허벅지를 베개 삼은 채로!

‘카메라, 카메라가 필요해……!’

이 세계에서 만났던 이들 중 가장 귀여운 두 존재가 함께 있다니! 나는 고민도 모두 잊고 속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래빗은 내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차린 듯 태연하게 말했다.

“이 여우룰 보눈 곤가? 어젯밤 밤새도록 컹컹 짖우묜소 잠둘지 못하길래, 내 옆에 두고 토닥여 조따.”

“아…… 나이스! 가 아니라, 감사해요, 그런데 밤새도록, 이라니요? 설마 제가 하룻밤 내내 잤단 소리세요?!”

“구래. 푸욱 잤지.”

“말도 안 돼! 그럼 황녀님은요? 한숨도 안 주무신 거예요?!”

내가 경악하자, 래빗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곤 중요하지 않아.”

“중요해요! 성장기에 잠이 얼마나 중요한데! 학대야!”

“그게 아니더라도 나눈 쑥쑥 클 고야.”

“그야, 폐하께서 키가 크시니까 그럴 것 같지만…… 그래도요!”

“나한테 더 중요한 곤, 내가 그렇게 쑥쑥 큰 뒤에도 롤린 네가 건강히 내 옆에 잇눈 거야.”

“…….”

래빗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로 래빗이 북부에, 아니 내 눈앞에 있다는 실감이 났다.

내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 그리고 가장 소중한 사람.

어쩐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힘이 쭉 빠져서 등을 기댔다.

“끙……. 다시 뵙자마자 못 미더운 모습을 보였네요.”

“괜차나. 네 탓이 아닌 걸 아는걸.”

래빗이 눈을 깜빡였다. 내가 이렇게 골골댈 걸 알았다면서, 시선에는 걱정이 가득 어려있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다시 뵈니까 너무 좋아요.”

나는 작게 웃었다.

“이 말씀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었어요.”

“…….”

“반가워요, 황녀님.”

래빗이 턱을 괸 것을 풀며 딴청을 부렸다.

볼이 살짝 발그레해진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너눈 여전히 낯간지러운 소리룰 아무렇지 않게 해.”

“그럼요, 진심이니까요.”

나는 그제야 주변을 살필 정신이 생겼다.

둘러보니 아무도 없이 방엔 나와 래빗 뿐이었다.

“혹시 시녀룰 찾눈 고라면 내가 내보냈댜. 내가 지키고 있겠다고 해써.”

듣자 하니 린과 아스는 래빗의 요청에 다른 곳에 가 있다고.

아무래도 본인의 성에서도 곁에 누굴 두는 걸 좋아하지 않다 보니 그리한 모양이었다.

난 우선 가장 걱정되는 점을 물었다.

“그, 대공님이랑 2황자님은요……?”

기절하기 전에 두 사람이 마주쳤던 건 기억나는데,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거기다 하룻밤이나 지났다니…….

그러자 래빗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툭 태연하게 말했다.

“치정 싸움 듕이다.”

“……네?”

치정 싸움?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잠시 멍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재조립되었다.

엄, 그러니까…… 대공님이랑 황자님.

대공님이 황자님을 두고 오해라도 하신 건가?

“혹시, 대공님이 그, 황녀님께 위협을 하거나 한 건 아니죠?”

“아니? 갱장히 정듕했댜만. 모야, 그놈이 널 위협하눈 건가?”

“아뇨아뇨, 전혀요! 그런 사람은 아니세요. 혹시나 해서요!”

“전혀 그로치 않았오. 나랑 오뺘 놈에게눈 무례하거나 그론 건 없었댜.”

엄, 그럼 뭐지?

대공님이 오해할 요소가 어디에 있던 거지?

“근데 왜…… 치정 싸움 중이란 말이 나온 거죠?”

치정 싸움이라면 그거밖에 없잖아.

나랑 2황자님 간에 뭔가 있다고 오해했다, 이거 아닌가?

난 고개를 갸웃했다.

래빗은 크고 예쁜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으음 신음을 뱉었다.

“치둉 싸움이니까 그러케 말한 건데…….”

“그러니까 어째서요?”

볼을 부풀리는 것이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래빗은 조금 더 고민하더니 얼굴에 가져다 댔던 손을 떼어냈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둑스가 부스스 눈을 떴다가 다시 툭 눈을 감았다.

아우, 귀여워서 집중이 안 되네.

“우선 잘 둘어, 롤린.”

“네. 황녀님.”

“내 오빠놈운 네가 약혼한 쥴 몰라, 아니 혼인인가?”

으음, 일단 아직 식은 올리지 않았으니까 혼인은 아니고 약혼이죠. 아직은. 그리고 그 혼인도 아마 올릴 예정은 없지만.

일단 이건 제쳐 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놈운 국경지대에서 몬스터룰 잡아 왔어. 정확하게 보약 거리둘을 다 잡아 왔지.”

“아…….”

대단하시네. 역시 육아물 오빠는 여동생을 위해 뭐든 해내는구나.

정작 그 일을 시킨 래빗마저도 목록 중 몇 마리는 정말 잡기 어려울 거라며 혀를 찼던 것 같은데 말이다.

“돌아온 오빠놈의 표정이 참 볼만 해찌.”

상황인즉 이러했다.

라이칸이 엄청나게 고생해서 재료를 모아왔다.

근데 돌아오니, 먹을 사람이 없어졌던 거다. 그 사실을 안 라이칸이 황당해했다고.

‘음, 그럴 수 있지.’

문제는 라이칸이 잡아 온 재료 중에는 빠르게 손질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이건 바로 손질해서 만든 즉시 마셔야 효능이 있다고 한다.

‘아, 설마 그럼 보약 주러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야?’

나는 조금 황당해서 눈을 깜빡였다.

아니지. 재료에 유통기한이 있다고 하니까…….

기껏 힘들게 잡아 왔는데 쓰지도 못하고 기한이 지나 폐기하면 얼마나 허무하겠어.

이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을 보내도 될 텐데, 어찌 황자님에 황녀님까지 직접 나서신 거예요……?”

“누굴 보내둔 우리보댜 빠르진 못 했울 걸.”

“음? 마법으로는 안 되나요?”

래빗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마법으로눈 전하지 못하는 재료가 있눈 데다가, 북부까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마법진은 없댜고 했댜.”

하긴 나도 마차를 한참 타고 마법진을 이용했었지.

“무엇보다 오빠놈운 네게 직접 보약을 주고 싶어했오.”

“아하, 확실하게 전달되기를 바라셨구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이 시키신 일이라 그런지, 일 처리가 정말 확실하네요. 라이칸 님은 황녀님을 정말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

“황녀님?”

래빗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모……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운 아니라고 생각한댜.”

“네?”

그거 말고 또 무슨 이유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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