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33화 (133/281)

◈133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50)

래빗이 방 안을 휙휙 둘러보았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도 어째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기척이 왜 이리 많운 건지.”

“기척이요?”

래빗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구래. 복도를 비롯해 창문밖에도 사람이 있눈데, 다 널 호위하눈 사람둘인 거 같구냐.”

“아…….”

나는 바람이 부는 창문 밖을 응시했다.

‘친위대원이겠지?’

날도 추운데 안에서 호위하지……. 끙, 걱정된다.

래빗이 작게 한숨 쉬었다.

“사실 들판에서 롤린, 너룰 봤울 때만 해도 그대로 얼룬 수도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아하하, 네.”

“아직운 돌아올 수 없는 거겠지?”

그렇죠. 아직은 메인 퀘스트가 남았으니까.

“그래소 오빠놈에겐 일댠 말하지 않아따. 어차피 여기 됴착하게 되면 알게 될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래빗이 내게 당당하게 손을 뻗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조그만 손을 얼른 잡아주었다.

“무엇보댜 나눈 편견이 없다.”

“무슨 편견이요?”

래빗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생긋 웃었다.

“우리 롤린의 신랑감으로눈 너한테 제일 잘 하눈 놈이 최고야. 하지만 대공 그놈운 널 고생시킨 것에소 이미 탈락이다!”

“아……. 하하하. 대공님이 고생시킨 건 아닌데…….”

뭐, 주변에 좀 문제가 많은 건 인정하지만.

그러자 래빗의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커다란 눈동자에 아이다움 대신 잠깐 옛 황제의 깊은 시선이 스쳤다.

“보아하니 너눈 대공울 싫어하눈 건 아닌 것 같아 보인댜. 물론, 내 눈에눈 어느 놈도 차지 않아!”

그 말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음, 확실히 대공님이란 사람 자체가 싫었던 적은 없었다.

처음엔 광증 수치에 애도 먹고 난감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도 없었고.

‘적어도 남을 속이거나 음흉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물음에 항상 솔직하게 답을 하는 사람.

나는 때로 지나친 솔직함이 나를 당황하게 하더라도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을 좋아했다.

물론 이 대공님은 말을 하다가 끝을 맺지 않고 얼버무릴 때도 가끔 있긴 했지…….

“좋은 분이세요. 일단 여기서 불편한 거 없이 지냈고, 뭐 일이야 있었지만 대공님 잘못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레스터풀 백작가와의 일도 깔끔하게 해결해 주셨구요.”

“그곤 레스터풀 그놈들이 잘못한 거 아니었나? 그놈둘운 내가 혼내주겠댜.”

“아하하. 그건 사양하지 않을게요.”

사실 퀘스트랑 별개로 이 소설을 훌쩍 떠나버린 여주인공, ‘지젤’언니는 괘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거기다 찾을 길도 요원한 그 언니의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사실 이 동네는 대공님이 문제라기보단 대공님을 둘러싼 환경이 문제지.’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건 전혀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 감정이 지나쳐 상대가 바라지도 않은 일을 독단적으로 해치우는 데 있는 거지.

난 상처 없이 말끔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 몸이 개운한데 혹시 치료 마법을 써주었나요?”

“구래, 여기서 제일 마법울 잘한다는 할아범이 써주던데?”

아, 리바가 마법을 써주었나 보다.

여기까지 듣다 보니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저, 근데 황녀님 잠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황녀님은 대체 어떻게 북부까지 오시게 된 거예요? 분명…… 황제 폐하가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

황제뿐일까. 황태자도 알아주는 여동생 바보 아니었던가.

그 두 사람이 래빗이 위험한 길을 가도록 두지 않았을 것 같았다.

‘라이칸이야, 어찌 됐건 래빗에게 약하니까 조르면 들어줄 것 같은데.’

그 황태자는 하하하 웃으면서도 단호할 땐 단호한 인간이란 말이지. 차라리 그놈도 같이 쫓아왔으면 모를까.

“황녀님?”

래빗이 조용했다. 어째서인지 내 눈을 슬쩍 피했다.

“……설마, 황녀님 몰래 따라오신 거예요?”

“크흠, 모, 몰래는 아니야. 편지를 두고 왔다!”

“그걸 가출이라 하는 거예요!”

“난 그런 철없는 어린애가 아니야!”

“당연히 어린애시죠.”

이분이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야.

나는 경악해서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험할 줄 알고요!”

“그곤 아니지, 롤린 너도 지나간 길이댜. 물론, 나눈 산맥을 넘었지만!”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세요!”

래빗이 슬그머니 귀를 막았다. 아니, 황녀님이?

나는 미운 다섯 살을 보는 기분으로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요, 다치지 않으셨으면 됐죠. 사실 황녀님 능력으로 다치기도 어렵단 걸 알지만…… 그래도 전 걱정 돼요. 저는 황녀님 유모잖아요. 제겐 어린아이시라구요.”

“……알고 있어. 그리고 이몸한테됴 네가 중요해.”

래빗이 손을 꼼지락꼼지락거리더니, 이내 품 속에서 조그만 병을 꺼냈다.

“……그리고 너무 화내진 마라.”

병을 내 손에 안겨주었다.

“이걸 가져다 주고 싶운 거였우니까…….”

래빗의 말에 따르면 유통기한이 짧은 재료들로 만든 약은 총 2개.

그 중 하나는 래빗이, 다른 하나는 라이칸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사이좋게 나눠서 들고 왔다고.

“직접 주고 싶었오, 그리고 보, 보고 싶기도 했고…….”

쭈뼛쭈뼛 병을 안겨주는 조그만 손을 바라보다, 얼른 붙잡았다. 그리고 손을 놓고 팔을 벌렸다.

“안아드릴까요?”

아기 황녀님은 사양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안아본 황녀님은 여전히 조그맣고 따뜻했으며, 내게 안심을 안겨 주었다.

“……쟈꾸 자리룰 비우진 마라.”

“죄송해요. 다음엔 자리를 비우지 않도록 노력해볼게요.”

황녀님 무릎을 베고 있다가 졸지에 데굴데굴 구르게 된 아기 여우가 하품을 하며 폴짝 뛰어와 함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인간, 뭐냐 컁! 나도! 이 몸도!

래빗이 내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건 얼룬 먹어야 한다고 했댜. 내일까지라고 했지만 지굼 먹어랴.”

“혹시 이거, 막 먹으면 졸리거나 하진 않죠?”

“그론 기능은 없다고 들었눈데?”

아 그럼 다행이다. 나는 병의 뚜껑을 열고 바로 꿀꺽 마셨다.

[빰빠라밤밤! ‘신비의 명약’을 마셨습니다!]

[빙의자님의 건강 수치가 대폭 오릅니다! ₍՞◌′ᵕ‵ू◌₎♡   현재 건강 수치: 37]

‘허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약을 먹었을 뿐인데, 건강 수치가 오른다고?

‘뭐야, 진짜 보약이잖아?’

놀란 것도 잠시 나는 곧 침대를 데굴데굴 굴렀다.

“써! 써요! 으윽, 너무 써!”

“쯧쯔, 롤린, 몸에 좋운 약운 입에 쑨 법이다.”

“나이 든 사람 같이 말씀하지 마시고 거기 물 좀 주세요, 으엉!”

잠시 후, 래빗이 건넨 물을 병째로 비우고서야 난 겨우 정신을 차렸다.

‘헉, 헉. 정말 너무 감사한데……. 두 번 먹고 싶은 맛은 아니다.’

문제는 라이칸이 가진 약이 하나 더 있다는 건데…….

아니, 유통기한이 남은 약이 2개라는 거지, 실상 더 있다고 했잖아?

난 건강 수치를 위해 잠깐의 고통을 견뎌야 할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당연히 견뎌야지! 사람이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생존이 우선이다.’

래빗은 웩, 헛구역질하며 울상을 짓는 나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황녀님 어디 가세요?”

“움, 가봐야 할 것 같댜.”

“어디를…….”

래빗이 태연하게 말했다.

“둘 듕 한 놈이 죽눈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네?”

누가 죽어요?

“아직까지 대공 그놈이 네게 필요한 거게찌? 그 ‘계시’라는 것에.”

래빗은 특별한 설명 없이 작게 속삭이고는 문 쪽을 한번 보았다.

“음, 네 맞아요.”

“그래 알게따. 나눈 나가소 회의룰 하러 가야겠댜. 사실, 아까 오라고 했눈데, 네가 깨어나눈 걸 보기까진 가지 않겠다고 했어.”

“어…….”

“네가 일어났다눈 소식도 알려야지.”

……아니, 대체 이 어린 황녀님을 끼워서 할 회의란 게 어떤 회의인 거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래빗의 표정이 마치 전쟁을 앞둔 장군의 그것처럼 진지해서 차마 더 묻지 못했다.

“그 회의가 황자님이랑 대공님이 계신 회의예요?”

“그로타.”

“아니, 그럼 저도 같이 가야 하지 않나요?”

“아직운 안대. 조금 더 쉬어.”

“어어, 황녀님!”

래빗은 나를 눕히고는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물론 내 몸으로 래빗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서 풀썩 쓰러지다시피 했지만.

내가 일어나면 래빗이 다시 쓰러트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인간, 재밌는 놀이인가? 컁!

둑스가 신이 나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롬 푹 쉬고 있소라. 금방 다시 오게따!”

“어어…….”

곧 타닥타닥 발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기 황녀님의 박력에 못 이겨 눕기는 했는데.

사실 지금 상황은 폭탄이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사태 아닌가?

‘누워있을 때가 아니지.’

무엇보다도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후, 얼른 메인 퀘스트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스와 제타르 경을 비롯해 이곳 사람들도 다들 친절하고 다정해서 나름 정이 들었다.

그럼에도 래빗이 있고 가족이 있는 수도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대충 옷을 껴입고 문을 열자,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들리지 않으십니까? 어렵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들었다. 그래서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았나?”

슬쩍 고개만 내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아스도 있었고 친위대원들도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 앞에는 칼리, 이 언니가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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