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34화 (134/281)

◈134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51)

“글쎄, 여기 계시는 것 자체가 대공 전하의 명을……!”

“무슨 일이에요?”

친위대원이 말하다 말고 우뚝 멈춰섰다.

일시에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놀라서 흠칫했다. 엄마야, 심장 떨려라.

“아가씨!”

가장 먼저 달려온 건 아스와 린이었다.

린은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일어나신 거예요? 몸은요? 몸은 어떠신가요?”

“방금 막 황녀님께서 일어나셨다고는 말씀해주셨지만, 다시 잠드셨다고 했는데……!”

린과 아스는 사실 여기 와서 제일 정든 사람 중 하나였던지라, 그렁그렁한 눈에 나는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다.

“네, 괜찮아요. 황녀님께서 누워있으라고 배려해 주셨지만 그 정도는 아니어서요.”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칼리가 나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불편한 표정으로 미간을 팍 찡그렸다.

워, 찡그려도 멋있긴 한데, 이 언니가 어쩐 일로 제 발로 날 찾아왔을까.

“아, 다름이 아니라 칼리 경께서 영애와 꼭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당연히 안 될 일입니다, 대공 전하께서 황녀님 외에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내 칼리, 이 언니가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여기서 기다렸다만.”

나는 다시 실랑이를 시작하려는 대원에게 손을 흔들어 멈춰 세웠다.

“저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칼리의 어깨가 움찔했다.

“여기선 못하는 얘긴가요? 아니면, 제가 흑마법사란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

칼리의 어깨가 이번엔 아주 크게 출렁거렸다. 헛기침마저 했다.

그녀는 내가 직접 언급을 할 줄 몰랐다는 듯 놀란 눈이었다.

사실 마침 나도 이 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좀 지지부진했던 퀘스트 진도를 나가고 싶기도 했고.

‘황자님과 대공님 쪽은 래빗이 갔으니까 잠깐은 괜찮겠지?’

치정 싸움이니, 죽은 놈이 생기면 안 된다느니, 래빗의 발언이 매우 마음에 걸렸지만.

설마하니 황녀이자 아기 앞에서 싸우진 않을 거란 믿음이 생겼다.

싸웠다면 이미 내가 눈을 뜨기 전에 사달이 났겠지.

“여러분 잠깐만 칼리님과 산책 좀 할게요.”

“안됩니다!”

“안돼요, 영애님!”

당연하겠지만 친위대를 비롯해 아스와 린 모두 반대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아, 대화는 둘만 해도 좋지만 우릴 지켜봐도 좋아요.”

곧 내가 대안을 제시하자, 모든 사람이 움찔하면서도 받아들였다.

내가 워낙 단호하게 말을 한 탓이었다.

이 사람들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 떠올린 걸 바로 실행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곧 나는 칼리와 둘만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와 향한 장소는 이전에 칼리를 처음 보았던 장소였다.

복도와 더불어 복도 옆으로 공터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공터까지 다다랐을 때 몸을 돌려 칼리를 응시했다.

아마도 2층에선 친위대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을 터였다.

‘요정, 신뢰도 창. 칼리만 보여줘.’

[퀘스트(서브) - ‘친해지길 바라, 안 친해지면 쟤가 죽음!’

진행 상황:

내성 수비 대장 ‘칼리’ : -47 / 50 ]

흐음, 못 본 사이에 많이도 내려갔네. 난 심드렁하게 보고는 시선을 올렸다.

“자, 이젠 편히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죠?”

묘하게 단호한 내 말에 칼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내 태도 변화를 그녀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말씀을 하고 싶은 건가요? 아까 말했듯 제가 흑마법사란 이야기를 하고 싶으셔서요?”

“그건…….”

칼리, 이 언니가 입을 달싹이더니, 이내 표정을 굳혔다.

[인물 ‘내성 수비 대장(칼리)’의 신뢰도가 내려갑니다! -48/50 ]

“그건 지금 스스로가 흑마법사라 시인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그저 물어본 것인데……. 어째 칼리 경은 확신하시는 태도네요.”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신이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과 결과는 말이 되질 않아.”

나는 작게 웃었다.

하기야,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을 생각하면……. 내가 이곳 영지민이어도 쉬이 믿긴 어려울 수 있지.

“그래요, 기적이 연속되면 믿기 힘든 거, 충분히 이해해요. 그래서 저도 어떻게 잘 참고 넘겨보려 했거든요.”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역시나, 몸이 가뿐하다.

“칼리 경이나 기타 저를 싫어하거나 못마땅한 분 눈에는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흐를 수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려 했단 말이죠…….”

칼리를 비롯한 북부 사람들은 완고하다.

다른 말로는 고집이 세다. 신념이 강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이 신념을 위해선 목숨마저 쉬이 버리는 존재들이다.

내가 있던 세상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지.

‘무식한 놈이 잘못된 신념을 품으면 답도 없다’고 말이다.

칼리, 이 언니가 무식하다는 소린 아니다.

다만, 어딘가 단순하고 우직한 이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신념을 품었을 땐, 웬만한 방식으로는 뒤집기 어렵단 걸.

이번에 강제로 이동을 당하며 톡톡히 느꼈다.

“그래서 저도 방법을 바꾸기로 했어요.”

“뭐?”

나는 품 안에 안긴 둑스를 내려다보았다.

‘둑스, 부탁이 하나 있는데.’

-컁?

‘혹시 분수대에서 너랑 나랑 잠시 만났던 공간이나 꿈에서 네가 만든 공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잠시만 이 사람과 나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어?’

혹시나 가능할까 싶었는데, 둑스가 흔쾌히 수락했다.

-가능하다, 컁!

오, 이런 능력도 있다니. 좋은데?

앞으로 잘 써먹어야겠다.

나는 신호하면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칼리 경은 저의 어떤 점이 가장 의심스럽죠? 제가 흑마법사라고 확실하게 의심하게 된 계기라거나 결정적인 요인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칼리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녀가 싱글 웃는 내 표정을 한번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코볼트 킹. 그건 절대 혼자서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거기다 오십여 마리에 이르는 코볼트까지 함께 있었지. 그런데 당신에게선 마나도 기도도 느껴지지 않아. 검을 잡아 본 몸이 아니야.”

“아하. 그 기적을 믿지 못하겠다. 즉, 제가 절대 그 정도로 검을 잘 다루지 못할 테니, 사술을 썼다, 이렇게 생각하신 거군요? 그게 결정적인 계기라면야…….”

잘됐다. 다른 요인이라면 좀 더 애를 먹을 뻔했는데 말이야.

“거기다가 할머님마저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현혹시켰지. 그러므로 네 능력은 사악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닌가?”

“흐음, 뭐……. 거기까지 생각하셨구나.”

완고하다 못해 똥고집이네. 본인 할머니 말도 믿지 않았단 말이야?

심지어 그 할머니는 내 능력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사람인데 말이지.

난 주먹을 꾹 쥐었다.

‘둑스, 지금이야. 우릴 가려줘.’

곧 주변으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둑스의 힘일 터였다.

칼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건지,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주변이 투명하네.’

-하지만 바깥에선 아무도 못 본다, 컁!

‘응 고마워.’

난 몸을 돌려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왔다.

그동안 칼리는 지금 뭘 하냐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도 이제 설득은 안 할게요. 대신 북부는 북부의 방법이 있다죠?”

나는 나뭇가지를 겨누며 생긋 웃었다.

“덤벼요.”

언니, 덤벼. 그냥 보여줄게.

“제가 이 자리에서 칼리 경을 쓰러트리면 모든 것이 해명되겠네요.”

칼리를 쓰러트린다고 해서 과연 모든 것이 말끔히 해결될까? 확신하진 않는다.

다만, 난 깨달았을 뿐이다.

아, 내가 화가 났구나.

좀 지긋지긋해졌달까.

요정놈의 술수에 목숨을 위협당한 것이야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거기다 앞으로 남은 이야기들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요정은 이미 내 안에서 나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요정과는 다르지 않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생각도 할 수 있는데.

타당한 논리 없이 그저 계속 미워하고 술수를 부리니 좀 짜증이 났다.

이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는 해도, 내 눈엔 그저 대공님의 의사조차 무시한 광신도나 다름없었으니까.

‘어차피 날 이동시킨 마법사야 내가 살아 돌아온 이상 금방 찾을 테고, 합당한 응징도 받겠지.’

그러나 대공님 손에만 맡길 생각은 없었다.

내가 직접 해결한다.

“설마하니, 사악한 힘을 쓰지만 신체는 약해빠진 흑마법사 하나 이길 자신 없어서 꽁무니를 빼는 건 아니겠죠?”

요정을 악우 삼아 성장한 나의 어그로력은 대단했다.

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리던 칼리의 태도가 한순간에 변했다.

“아니면, 이 흑마법사에게 현혹되어 빠졌다는 대공님이 어떻게 반응하실지 두려우신 건가요?”

“그만하지 못해? 감히, 누굴 입에……!”

“그럼 검으로 말하세요.”

나는 고개를 까딱, 느릿하게 기울였다.

“팔이 아픈데, 언제 오실까요?”

자, 언니. 조금만 아파보자고.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사람이 잠시 회까닥 돌았을 땐, 매가 약이라고 하더라고.

‘엠버넷 씨.’

이번엔 둑스의 힘 대신 내 안에 잠들어있던 기사님을 불렀다.

둑스의 힘은 짐승의 힘에 가까웠기에, 이런 1대1 대결에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리고 나는 우리 기사님을 믿었다.

‘부탁할게요, 좀 조져주세요.’

귓가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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