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53)
“……죄송합니다, 한마디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칼리의 설명으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믿고 다정하게 대해 준 제타르 경과 친위대, 아스와 린은 뭐란 말인가.
“…그래요, 됐어요.”
그러나 지금 그녀의 태도를 보고도 거짓이라고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신뢰도가 재조정되었습니다!]
[퀘스트(서브) - ‘친해지길 바라, 안 친해지면 쟤가 죽음!’
진행 상황:
내성 수비대장 ‘칼리’ : 33/50]
[경이로운 상승 속도에 요정이 감탄합니다! 특별 보상!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올랐어요! (❁◝(⁰▿⁰)◜❁)*✲゚* 현재 건강 수치: 40]
후, 그래. 이해했다.
그 옛날 한국의 독립운동을 이끌던 사람들도 각기의 신념에 차이가 있어 조국에 충성했던 방식이 달랐던 것처럼, 이 사람들에게도 차이가 있었던 거겠지.
“……이런 변명 몇 마디로는 이해되지도 잊히지도 않을 일이란 걸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셔도 따르겠습니다.”
칼리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오해가 풀렸으면 됐어요. 나라도 의심이 드는 상황이었을 테니까.”
“화내지 않습니까?”
“조금 전까진 나긴 했는데,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어요. 이젠 정말로 믿는 거잖아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리됐든 저리됐든 일이 잘 풀렸으니 됐지, 뭐. 더는 의심을 하지 않겠다 선언한 셈이니까.
나는 싱긋 웃었다.
[인물 ‘내성 수비대장(칼리)’의 신뢰도가 대폭 올라갑니다! 43/50]
일이 잘 해결되었다면 그걸로 됐다.
아, 물론 내가 성인군자라서 모두 이해하고 용서한 건 아니다. 이 언니의 사과를 일단 받아들인 건…….
이 언니를 통해서 얻을 게 있어서란 말이지.
“날 믿겠다고 한 사람에게 화를 낼 정도로 성격이 나쁘진 않아요. 다만, 칼리 경이…… 날 성 밖 몬스터들 사이로 던졌던 사람들과 한패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날 해치려 한 세력을 언급하자 칼리가 움찔했다.
‘역시, 이 언니는 뭔갈 알고 있어.’
지금까지 지나치게 날 의심했던 사람이었다.
북부 사람들이 완고하고 고집이 센 편이긴 하지만, 그런 점을 이용해 뒤에서 이들을 세뇌하듯 조종하던 사람이 있었다.
총관 ‘아르테반’이 있는 세력 말이지.
“나를 내성에서 밖으로 던져 버리라는 명을 내린 건 총관 ‘아르테반’인가요?”
“……이미 거기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사실 칼리가 명을 내린 주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성에서 마나홀이 터졌을 때, 칼리를 비롯한 내성 성벽 근처에 있던 기사와 병사들은 몬스터를 막아 내기에 바빴다.
다만, 칼리도 그가 나를 밖으로 던져 버리라 한 걸 알고 있었을까?
“사실 그날 그렇게 당신을 밖으로 이동시켜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변명 같지만, 정말입니다, 예비 대공비님.”
칼리가 쓴 약을 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당신을 죽이려는 시도가 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단 점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날 죽이려 했다는 건 몰랐다, 이거죠?”
“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많은 것을 오해하였고, 그로 인해 그자들에게 동조했으니 저를 죽이셔도 괜찮습니다.”
죽이긴 뭘 죽여요. 언니 아직 나한테 신뢰도 더 올려 주셔야 하거든요?
그리고 누군가 죽는 걸 보는 취미는 없다. 죽이고 싶지도 않고.
“뭘 죽여요. 제 말을 따라 주실 거면 앞으론 그 죽는단 소리 좀 하지 말아 주세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인물 ‘내성 수비대장(칼리)’의 신뢰도가 대폭 올라갑니다! 48/50]
“대신 아니, 대신이라기에도 부끄러우나 아는 것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칼리 이 언니가 진지한 표정을 하더니 하나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간 여론몰이를 했던 것이나 나조차 알지 못했던 세부적인 일 등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아르테반 그자는, 저같이 충성으로 똘똘 뭉친 이들을 더욱 교묘하게 부추기곤 했습니다.”
“회유했단 말인가요?”
“예. 회유에 능해 예비 대공비님의 미심쩍은 점을 부풀려 충신들을 제 편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구나. 저, 근데 언니.
……이제 와 갑자기 호칭을 그렇게 바꾸는 거, 좀 안 어색하신가요?
되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후딱 호칭을 고치시네…….
‘북부 사람들이 대쪽같다는 것도 사실 아닌 거 아니야?’
“거기까지면 됐어요. 그리고 경은…….”
나는 주저앉은 채 칼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멋있으시긴 한데, 다음엔 융통성을 조금만 더 발휘해 주시면 좋겠어요.”
이 언니는 내 손을 물끄러미 보다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살려 주신 만큼, 조언 뼈에 새기겠습니다.”
[인물 ‘내성 수비대장(칼리)’의 신뢰도가 대폭 올라갑니다! 50/50]
[인물 ‘내성 수비대장(칼리)’의 신뢰도가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MAX/50]
[퀘스트 ‘친해지길 바라, 안 친해지면 쟤가 죽음!’이 완료되었어요!]
[퀘스트 보상이 주어집니다. 추가 보상 정산 중입니다!]
[보상 - 빙의자 님의 건강 수치가 10 오릅니다! ヾ(๑ㆁᗜㆁ๑)ノ” 현재 건강 수치: 50]
오, 집 나갔던 건강이 꽤 많이 돌아왔다.
나는 만족스러워져 씩 웃었다.
“아니, 뼈에 새기진 마시구요……. 이거 봐, 지금도 융통성이 없잖아요!”
“…….”
아니 그렇다고 왜 또 시무룩해 하세요?
알고 보니 이 동네 사람들, 사실은 겉만 무섭게 생겨서는 속이 여린가.
“음, 농담이니까 그렇게 심각해지시진 마시구요. 절 밖으로 이동시켰던 놈들 잡는 걸 도와주시면 오늘 제게 덤비신 것도 용서해 드릴게요. 어때요?”
난 내가 먼저 덤비라고 나섰던 주제에 뻔뻔하게 말했다.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칼리가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침음을 삼켰다.
여지껏 잊고 있던 상처가 존재감을 드러낸 탓이다. 하필 허벅지를 다친 탓에 다리를 펴기가 어려웠다.
“음, 의원 좀 불러 주실래요?”
나는 둑스를 불러 주변에 처진 결계를 해제하게 했다.
-컁, 해제했다!
해제하기 무섭게 고개를 들었는데…… 이게 웬걸.
2층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야 할 친위대와 아스, 린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간 거지?’
그때였다.
눈앞에 새파란 창이 떠올랐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으음?!’
[비상 상황! 진행 중이던 퀘스트가 재개됩니다!]
[퀘스트(서브) - ‘네가 미쳐 가는 소리가 들려!’
현재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이 2단계 ‘심화 발작’을 앞두고 있습니다! 3분 뒤 발작합니다!]
뭐? 이게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나는 아픔도 잊고 발을 디뎠다. 나를 부축해 주던 칼리가 깜짝 놀라 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뭔데, 무슨 일인데. 어디 적군이라도 쳐들어왔어?
‘아니, 그럴 리 없지……!’
현재 대공님이 가장 신경 쓰는 존재는 바로 나.
그리고 가장 신경 쓰는 것도 나와 관련된 일.
‘혹시, 아르테반이 그새 뭔가 일을 저질렀나?’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내 다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허벅지. 거기다 앉아 있었던 탓에 옷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큰일 났다.’
멀리서 보면 흡사 피 칠갑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설마……. 그래, 그 설마 같은데.’
아프긴 해도 못 견딜 만큼 고통이 크진 않아서 간과했다.
[알려 드려요, 광증 시작까지 1분 전!]
“아가씨!”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멀리서 달려오는 이들이 보였다.
나는 그보다 앞서 칼리의 손을 잡아당겼다.
“예, 예비 대공비님?”
“아니, 뭘 또 이 순간에 길게 부르고 있어요! 그냥 달린이라고 해요, 영애라고 하든가!”
나는 그녀의 팔을 꼬옥 붙들었다.
“이건 다 당신 자업자득이에요!”
“예? 그게 무슨, 예비…….”
“됐고,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요! 그냥 꽉 붙어 있어요!”
이미 스킬을 써 버렸는데, 또 한 번 쓸 수 있나?
[요정은 가능하다고 말해요! 스킬 ‘빙의’의 레벨이 오르면서 하루에 2번 사용 가능해졌어요! o(*゚∇゚)ノ]
[하지만 지나친 스킬 사용은 건강 수치를 소모하니 주의하세요!]
좋아, 그렇단 말이지. 요정이 참으로 간만에 쓸모 있는 말을 했다.
[알려 드려요, 광증 시작까지 30초 전!]
“칼리 경, 진짜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요. 난 경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아요, 알았죠?”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이건 혹시…….”
나는 칼리의 말을 끝까지 듣는 대신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내게 달려오는 친위대원만 보였지만…….
“칼리 경!”
나는 그녀를 떠미는 동시에 함께 쓰러졌다.
쾅!
우리가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검이 꽂혔다.
익숙한 검이었다.
“대공님!”
눈앞으로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새하얀 얼굴, 거기엔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2단계 ‘심화 발작’이 시작되었습니다, 제한 시간 내에 막지 못하면 그대로 배드 엔딩으로 이어집니다! 남은 시간: 09:58]
젠장, 이놈의 퀘스트들은 시간을 적절히 넉넉하게 주는 법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