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37화 (137/281)

◈137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54)

생각할수록 육아물 쪽 퀘스트가 지금보다는 차라리 나았지, 걔는 메인 퀘스트 기한도 100일이었고 서브 퀘스트에도 며칠은 줬는데!

난 생각할 새도 없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대공님!”

“…….”

“휴고!”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이 가만히 서 있는 모습. 대신 몹시도 사납고 난폭한 기운이 느껴졌다.

꿀꺽,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

마치 먹이를 노리기 위해 엎드린 짐승을 본 것처럼 긴장감이 흘렀다.

광증이 발현한 모습은 이전에 북부 영지로 오는 도중 처음 본 뒤로 이번이 두 번째인데.

그리고 그때보다 더 심각한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전과는 다르게 이름을 불러도 미동조차 없었으니까.

그는 날 보고 있지 않았다.

“……역시, 죽여야 했어.”

차가운 얼굴로 마치 광증이라도 온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처럼’이 아니라 실제로 광증이 온 상태지.

피처럼 새빨간 눈이 칼리를 향했다. 아니다, 처음부터 칼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끙 다리를 붙잡으며 일어났다.

[스킬 ‘소환(lv.1)’이 활성화됩니다!]

[스킬 ‘빙의(lv.4)’가 활성화됩니다!]

[소환 대상 ‘신 둑스’(S급 영혼)의 힘을 받아들였어요!]

[5분간 사용 가능합니다! ※남은 시간: 04:59]

신기하게도 스킬을 쓰는 순간 다리에서 통증이 사라졌다.

툭툭 시험 삼아 바닥을 굴러 보아도 아프지 않았다.

“칼리 경, 내 뒤로 물러나요!”

“네? 하지만, 지금 영애 상태로는!”

“지금 대공님이 정상으로 보여요? 한칼에 죽고 싶어요?”

나는 쓰러지며 황급히 주워 든 나뭇가지를 앞으로 겨눴다.

동시에 막 다가온 대공님을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피했어?’

대공님이 내 공격을 받아치기는커녕 몸을 아예 피해 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오히려 내 쪽에 빈틈이 생겨 버렸다. 대공님의 실력이라면 곧바로 이 빈틈을 노리겠지!

이어질 공격을 대비해 다리를 움직일 때 였다.

그러나 대공님은 공격 대신 그대로 확 물러났다.

‘뭐야.’

나는 깜짝 놀란 동시에 얼른 다시 나뭇가지를 들고 쫓아갔다.

휘익!

안쪽으로 파고드는 공격, 팔이 닿을 듯하자, 대공님이 이번에도 피해 버렸다.

분명 반격할 수 있음에도 마치 나와 마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아주 멀리.

“……하?”

설마, 광증 상태에서도 날 공격하지 않고 피하려는 거야?

그렇다고 날 알아보는가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불러도 대답이 없었으니까.

다만 본능적으로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날 다치지 않게끔 노력하는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간지럽다가도 돌연 조금 쓰렸다.

이 사람이라고 이런 증상을 갖고 싶었던 건 아닐 텐데.

제 감정에 따라 이성마저 잃게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하다 하다 남자주인공과 검까지 맞댈 줄이야.’

나뭇가지에서 주황색 빛이 흘러나왔다.

엠버넷 경의 검기와는 또 다른 색. 둑스가 가진 힘이었다.

그러나 과연 북부, 아니 대륙 제일의 검이라 불리는 사람인 만큼, 그런 대공님을 상대로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걸 나는 금세 깨달았다.

거기다 그 상대가 지금처럼 나를 피하면서 칼리만을 노리고 있다면 더더욱.

‘피하기만 해서는 시간이 없어!’

……나를 피한다는 건, 혹시 닿았을 때 뭔가 변화가 있을 거란 소리 아닐까?

번쩍이는 깨달음과 동시에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주 조그만 뒷모습이었다.

“달린! 오째소 넌 잠깐 사이에 계속 다치눈 고냐?”

“황녀님!”

딸랑딸랑, 래빗이 아끼는 딸랑이 소리가 이토록 반갑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대공이 갑자기 피 냄새가 난다묘 달려갔눈데, 이게 대체 무순 일인 고냐? 왜 널 공격해?”

“아, 절 공격하는 게 아니라……! 어어, 황녀님 막아요!”

래빗이 더 말하는 대신 칼리를 향한 공격을 막았다.

동시에 내 등 뒤로 단단한 것이 닿았다. 고개를 들자 굳은 얼굴이 보였다.

“황자님.”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한 얼굴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몹시 괴롭다는 듯 일그러졌다.

“……영애, 나는 이런 광경을 보려고, 몬스터를 잡은 게 아니다.”

급한 상황 중임에도 잠시 말을 잃을 정도로.

“왜, 그대의 약혼자가 그대를 공격하지?”

“아, 공격하는 게 아니라…….”

“검을 든 것만으로!”

나는 움찔했다.

“그대는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야.”

쾅!

래빗의 딸랑이와 대공님의 검이 부딪치며 거대한 소리를 일으켰다.

나는 두 사람을 흘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둑스, 한 번만 더 결계를 쳐 줘. 저기 바깥에 있는 친위대랑 린과 아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능하겠어?’

-가능하다, 컁!

칼리와 결투할 때와 같은 투명한 막이 우리 주변을 감쌌다.

결계 안에 있는 건 나와 라이칸, 대공님과 대공님을 막고 있는 래빗, 그리고 칼리뿐이었다.

아군까지 공격하는 상태니까, 사람은 최소한만 있으면 충분해.

래빗과 라이칸, 그리고 둑스의 힘을 빌린 나까지면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맞아요, 전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죠.”

내 목소리는 고요했다. 곧 시선을 들어 싱긋 웃었다.

“하지만 라이칸 황자님, 대공님도 원해서 저런 상태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음, 주제넘게 이렇게 생각해 달라 말씀은 드리지 않겠지만…….”

사실 대공님이 정말로 귀찮거나 밉지 않았던 건, 이 사람이 나랑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눈을 떠 죽지 않기 위해 요정이 시키는 대로 퀘스트를 수행하는 나. 내 의지라곤 없이 강제적으로 해야 했던 일들.

그리고 원치 않게 광증이란 증세를 가져 감정을 억제하지 않으면 강제적으로 이성을 잃고 아끼던 수하를, 아군을 해치는 대공님.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안타깝다고 생각했지.’

난 조금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저도 아픈 거 싫어요, 황자님.”

“…….”

“그치만 그럼에도 움직여야 할 때가 있었고, 그래서 이전에 래빗 황녀님을 구할 수 있었어요.”

나는 나뭇가지를 고쳐 쥐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대상이 대공님이 된 것뿐이에요.”

“……영애는.”

라이칸이 입을 달싹였다.

“그럼 영애는 누가 구해 주는 거지?”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웃었다.

래빗이 워낙 잘 막아 주고 있던 탓에 이런 대화도 하는구나 싶어서.

“황자님께서 구해 주실래요? 우리, 친구라면서요.”

“…….”

“아니면 우리 래빗 황녀님께 구해 달라고 할까 봐요.”

농담을 툭 던지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저 좀 도와주세요, 황자님. 어떻게든 대공님을 제압해야 해요.”

“……그러지. 붙잡기만 하면 되나?”

“네. 일단 황녀님이랑 같이…….”

[퀘스트 ‘친해지길 바라, 안 친해지면 쟤가 죽음!’ 보상, 새로운 스킬이 주어집니다!]

[스킬 ‘몸에 나쁜 건 날아가라!’를 얻었어요!]

[스킬 - ‘몸에 나쁜 건 날아가라!’(lv.1)

등급: 유니크(AA)

사용 시, 건강 수치 +3, 현재 가진 모든 상태 이상과 강제 상태를 모두 무효화한다.

하루에 1회 사용 가능하며, 레벨에 따라 하루에 쓸 수 있는 횟수가 증가한다.

※단, 랜덤 확률로 패시브 스킬을 일시 종료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소유한 패시브 스킬: ‘눈치는 약에 쓰자’)]

[스킬 ‘몸에 나쁜 건 날아가라!(lv.1)’가 활성화됩니다!]

[저런, 랜덤 확률 당첨! 모든 패시브 스킬이 해제됩니다!]

라이칸이 내 손을 잡았다.

‘……어?’

어째서인지 이전보다 그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저 애가 아직 막고 있을 때, 한마디만 하지. 난, 언제든 영애를 도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친구로서가 아니야, 영애. ”

“…….”

“우린, 친구가 될 수 없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상황이 나를 빠르게 일깨웠다.

‘뭐야, 이거.’

눈을 감았다 뜬다.

“화, 황녀님! 황자님과 같이 대공님을 제압해 주세요!”

“아라따! 오빠 너눈 오른쪽을 맡아라!”

나는 칼리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잡고 달렸다.

대공님이 칼리만 쫓아 움직이니 일종의 미끼였다.

엉켰던 머릿속은 달리면서 점차 풀어졌다. 그래, 지금은 저 대공님의 광증부터 해제하고서 생각하자.

배드 엔딩까지 겨우 5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달린! 팔울 잡우면 되는 곤가?”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요!”

대공님은 확실히 정말 뛰어난 검사였지만, 래빗과 라이칸, 그리고 공격이 불가능한 내가 합세하자 조금씩 빈틈을 보였다.

그렇게 래빗과 라이칸이 각기 좌우를 점령했을 때.

나는 대공님의 어깨 너머, 저 막 바깥에서 달려오는 사람을 확인했다.

‘둑스, 이제 결계를 해제해 줘!’

-알았다, 컁!

컁컁, 아기 여우의 울음소리와 함께 결계가 사라진다.

나는 가까이 있는 이를 목청이 터져라 불렀다.

“리바! 대공님의 다리를 제압해요! 당장!”

내 말이 울려 퍼지기 무섭게, 땅에서 나무줄기가 솟고 빛으로 된 끈 같은 게 나타나더니 대공님의 다리를 묶었다.

대공님이 잽싸게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라이칸이 한쪽 팔을 잡고 래빗이 검을 쳐내 날려 버렸다.

“달린!”

알고 있어요. 나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눈이 마주친 대공님이 움찔 멀어지려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스킬이 발동한 후 대공님 쪽도 더 선명하게 보였다.

표정이나, 눈빛 같은 것이 더욱더.

분명 광증을 앓고 있을 터인데, 왜 길을 잃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지.

“대공님, 아니 휴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손을 뻗었다. 그대로 그를 감싸 안았다.

다리를 붙잡은 마법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 치던 몸이 일시에 멈췄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