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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38화 (138/281)

◈138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55)

“……대공님, 아니. 휴고. 들려요?”

“…….”

“이번엔 제가 어떡해야 당신을 멈추고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까요?”

거대한 몸이 죽은 듯이 멈췄기에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나는 그의 품에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당신이 정신을 차리면 후회할 것 같아 막았어요. ……날 보며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

대공님이 래빗에게 피 냄새를 맡았다고 했었나?

어쩌면 영문은 모르지만 내가 다친 걸 먼저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달려오면서 피로 물든 내 옷과 내 모습을 먼저 보았을지도 모르고.

“죽는단 말, 절대 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코볼트 킹을 해치우고 쓰러졌다 일어난 날, 차마 울지도 못한 채 하얗게 질렸던 얼굴을 떠올렸다.

“전 죽지 않았어요, 대공님. 멀쩡…… 은 아니지만 괜찮아요. 여기에 있어요.”

“…….”

“그러니까 이제 저 치료받을 수 있게 같이 돌아갈래요?”

광증 증세가 나타날 땐 체온마저 내려가는 걸까?

차갑던 체온이 조금씩 조금씩 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와 함께 그의 어깨가 함께 떨려왔다.

가늘게 떨리는 숨.

그의 머리가 내 어깨로 톡 떨어졌을 때, 나는 마침내 안도의 숨을 토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 할 수도 있구나 싶었어요.”

떨림과 함께 엉망이 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천히 고개를 드니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잠꼬대처럼 무의식중에 나오는 듯 어딘가 몽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당신을 아프게 한 모든 것들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고 영애가 없다고 생각한 순간, 숨을 쉬고 싶지 않았어요…….”

앞을 멍하니 응시하는 눈에서 어느 순간 툭,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느, 틈에, 이렇게 사랑하게 된 것인지…….”

붉은 눈동자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느릿하게 고개를 내린 그가 나를 담았다.

더욱 아래로 내려오다가, 툭 이마와 이마가 맞닿았다.

“맞아요, 난 정상이 아니야.”

“…….”

“그, 그럼에도 난 영애 곁에 있고 싶어요.”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대공님이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그러다 살며시 눈을 떴다.

눈물로 푹 젖은 속눈썹이 보였다.

“이 순간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껴요, 영애.”

으음. 그렇게 거창하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이렇게까지 이야기해 주니 내 쪽에서 조금 머쓱해졌다.

칼리와의 일 때문에 죽을 뻔한 상황 같은 건 전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대공님의 폭주로 내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모를까.

건강 수치를 쓸 일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 대공님이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니 사실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나를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잔처럼 조심스럽게 대하는 이 남자의 모습을 보니 조금 생경하달지.

아니, 시야 안의 모든 것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마치 지금까지 눈꺼풀을 덮고 있던 유리막이 하나 벗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게 스킬의 효과인가.’

우선 여기에 대해서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공님이 손을 뻗어 내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연인을 향한 애처로운 구애의 몸짓 같았다. 동시에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재차 확인하듯이.

내 뺨에 얹힌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괜찮아요, 대공님. 정말로 괜찮아요.”

“…….”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누구도 죽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았어요.”

아직 이성이 완전히는 돌아오지 않은 걸까 봐 최대한 또렷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대공님. 이성을 잃었을 때도 저를 공격하지 않으셨어요.”

“……제가요?”

“네. 마치 저와의 접촉을 피하시는 것처럼 보였는걸요.”

난 배시시 웃었다.

대공님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말인가요? 정말?”

“네.”

그는 뜻밖에도 길을 잃은 아이같이 보였다. 그러나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그저 이런 일이 태어나 처음이라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으니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특무대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과 본인 스스로도 인정했듯 극복할 수 없는 광증을 그는 차차 이겨 내고 있었다.

이는 시스템이 예고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내가 성 밖으로 강제로 이동 당했을 때, 날 찾아온 대공님은 이미 홀로 심화 발작 2단계를 견뎌냈었지.’

동시에 나는 그를 보면서, 어쩌면 나 또한 이 지긋지긋한 요정을 이겨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얻었으니까.

“전 이렇게 생각해요, 대공님. 대공님께서는 그 모습을 피하고 아파하고 숨겨야 하는 추한 오점으로 생각하신 것 같지만…….”

어쩌면 그 자신과 그가 속한 곳의 기준으로는 그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요.”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하자, 붉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대공님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할 듯 한참을 달싹였다. 그 사이사이 눈동자로는 많은 것이 일렁거렸다.

“역시, 영애. 당신은…… 저와.”

대공님의 손에 아프지 않을 정도로 힘이 들어간다.

“언제까지 그렇게 붙어 있을 셈이지?”

낯선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슬슬 저것, 아니, 저쪽도 정상으로 돌아온 듯한데?”

시선을 돌리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라이칸이 보였다.

흔들리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아, 하고 소리 냈다.

그제야 잠시 보이지 않았던, 특무대 단원들이 보였다. 그밖에 함께 달려온 병사들이나 시중인들도 함께.

……보는 눈이 엄청 많았지, 참.

나는 슬그머니 떨어졌다.

그러자, 대공님의 눈동자에 잠시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나를 잡는 대신 순순히 놓아 주었다. 대신 라이칸 쪽을 한 번 보는 것 같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하군요, 2황자님. 그리고…… 황녀님.”

다리로 무언가 찰싹 달라붙는 온기에 고개를 내렸다.

‘래빗, 그리고 둑스!’

한쪽 허벅지/는 래빗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다른 쪽 종아리에는 둑스가 털을 부빗 비비고 있었다.

‘헉, 이렇게 황홀한 풍경이라니…….’

나는 잠시 다른 이들도 잊고 입을 틀어막았다.

래빗이 날 향해 고개를 들었다.

“롤린, 흐음, 이제 저놈됴 정상으로 돌아왔고, 문제 없눈 거겠지?”

“네? 네.”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발작 2단계를 막아 냈습니다! (3/3)]

[인물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1) 현재 호감도: 98]

오, 마침 말이 나오기 무섭게 요정의 창 또한 반가운 소식을 알렸다.

또 다른 2단계 발작은 대공님 홀로 참아냈다. 그것 또한 날 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목 하나로 참아낸 것이었다.

[남은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의 발작은 1회, 3단계 ‘최종 발작’입니다. o(*゚∇゚)ノ]

나는 찌푸렸지만. 뭘 또 이걸 해맑게 소개하고 있어.

동시에 깨달았다.

‘메인 퀘스트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어.’

과연 시간 내로 완료하는 게 가능은 할까 싶었던 미션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어렵다고만 생각했지.

나는 고개를 돌려 대공님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사람. 그간 가장 애를 먹였던 인물인 칼리를 보았다.

“들어게찌, 대공! 우리 롤린이에겐 휴식이 피료하다!”

“아, 저는 그렇게 피곤하지…….”

“쓰로질 것 같다고 한다!”

……제가 언제요.

나는 래빗에게 무어라 하는 대신 작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대공을 바라보는 래빗의 시선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신기하네. 라이칸이 대공님에게 분노했던 걸 떠올렸다. 래빗 또한 날 향해 검을 들었다고 화를 잔뜩 낼 것 같았는데.

물론 그런 감정이 없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망설이는 느낌이었다. 마치 자신이 화를 내도 되는가 고민하듯이.

“옳은 말씀입니다. 영애, 얼른 들어가요.”

“아, 네.”

대공님이 몸을 돌리다 말고 멈칫했다.

“그 전에 칼리.”

“……예.”

칼리가 기다렸다는 듯 무릎을 꿇었다.

대공님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시무룩한 얼굴에서 조금씩 표정이 지워졌다.

잠깐 다시 폭주라도 오는 걸까 싶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네 죄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대공님 저…….”

“영애, 영애만 괜찮다면 칼리를 이 북부에서 영구히 추방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구 추방은 사형을 제외한 가장 무거운 형벌이라 들었다.

특히나 북부에 대한 자부심이 어마어마하게 큰 북부인일수록 추방되는 것을 수치스러워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형보다도 더한 중벌로 여길 정도라고 한다.

‘아마 죽이려 들지 않는 건 내가 말려서 같긴 한데.’

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안 돼요.”

저 언니는 할 일이 남았다고.

“하지만 영애, 칼리는 영애에게…….”

“저라고 무작정 착한 사람이라서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칼리 경은 앞으로 저를 죽이려 했던 자들을 직접 색출할 거예요. 그렇죠?”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칼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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