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57)
그는 정자에 서 있는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자 탓에 그의 얼굴이 모두 보이진 않았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조금 전에 식당에서 뵀지만, 또 뵙네요. 좋은 저녁이에요.”
저녁이라기엔 시간이 지나 밤에 더 가깝겠지만.
하늘을 슬쩍 보았다.
라이칸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마법등 아래, 그의 얼굴이 모두 드러났다.
“마침 잘 됐군. 그대 생각중이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영애에게 줄 것도, 할 얘기도 있었으니.”
“아, 정말요?”
“그래. 하지만 이런 시각에 영앨 찾아가선 안 될 일이지. 그 애는 그냥 냅다 달려가라고 했지만…….”
래빗이? 하긴 래빗이 할 만한 소리긴 했다.
급하면 직접 나서야지! 하고.
‘줄 거란 건 아무래도 보약 얘기겠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라이칸이 린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으니까.
“린, 잠시만 자리를 비워 줄래요? 걱정되면 조금 떨어져서 보고 있어도 괜찮아요. 황자님께서 하실 이야기가 있으신 것 같으니.”
“…….”
린은 망설이는 기색이 다분했지만 라이칸이 얼굴을 찡그리자 곧 자리를 피했다.
고요한 풍경 속,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바람에 흔들리는 하늘색 머리가 밤하늘과도 잘 어울렸다.
“음, 갑작스러운 얘기지만 황자님.”
“이름.”
“하하. 네, 라이칸 황자님.”
나는 웃음을 머금었다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사실 저 구해 주셨을 때 황자님 모습을 본 순간, 제가 꿈이라도 꾼 줄 알았지 뭐예요?”
그랬지. 이 땅에 있을 리가 없는 라이칸에다 래빗까지 보이니, 내가 너무 열심히 싸워서 헛것이라도 본줄 알았지.
“그도 그럴 게 황자님은 이 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남자를 보았던 건 대부분 래빗의 황량하기 짝이 없던 정원에서였다.
꽃도 한 송이 없이 그저 풀만 무성하던 곳이었지만 이 남자만 등장하면 꽃이 만개한 것처럼 화사해졌지.
그 때문인지 이 남자를 보면 자연히 생명력이 넘치는 하늘과 숲을 떠올리게 됐다.
정작 본인은 세상의 모든 불만을 안은 듯 까칠하고 날카로운 얼굴에, 생명력과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런데 정작 이렇게 눈 속에서 서 계신 모습을 보니 제 생각이 틀렸구나 싶어요.”
어쩌면 수도에서 겨울을 지냈다면 래빗의 눈 쌓인 거처를 배경으로 한 채 봤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타셨어요.”
눈처럼 새하얗던 피부는 아주 조금이지만 그을린 채였다.
보기 싫은 건 아니고 더 건강하게 보였다.
또한 이렇게 셔츠 단추까지 몇개 느슨하게 푼 상태니, 묘하게도 퇴폐적이기도 했다.
“열심히 했으니까. 그대를 위해서.”
“…….”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말했다.
“보약 얘기시죠?”
“그런 것 같나.”
그는 정자에 서 있었고, 나는 계단 중간에 서 있었다. 라이칸이 한 계단 내려왔다.
“라이칸 황자님께서는 뭐든 열심히 하시는 것 같으니까요. 특히나 그게 래빗 황녀님이 바라시는 일이라면.”
“틀린 말은 아니군. 그래, 난 아마…… 그 애가 원하면 대부분의 일을 해 줄 테지. 하지만 그게 내가 이토록 열심히 힘썼던 모든 이유는 아니다, 영애.”
“…….”
“먹는 건 그대이지 않나.”
라이칸이 한 계단 더 내려오는 대신에 잠시 자리에서 멈췄다.
[스킬 ‘몸에 나쁜 건 날아가라!(lv.1)’가 활성화 중입니다!]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어째서인지 안개에 휩싸인 듯, 한동안 많은 걸 잠시 모른 채로 살았던 것 같지만.
“이제는 모두 들었다만. 그대는 이곳 북부 대공의 약혼녀라지.”
“……네.”
올려다본 남자는 정말이지 내 취향이었다.
“그대는 괜찮은가?”
“무엇을 말씀일까요?”
“장차 앞으로 그대의 남편이 될 자가 이성을 잃고 그대에게도 검을 든다는 것.”
나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음, 여기서 대공님이 저를 공격하진 않았다는 말은 근본적인 답은 되지 않겠네요.”
“…….”
어떤 대답도 하지 않던 라이칸이 말했다.
“그대, 대공을 사랑하나?”
묵직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
황성에서 보았을 때와 다르게 그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 나왔다.
“……사랑이, 그대가 아직은 사랑이 아니라면 나는 청하고 싶은 것이 있다.”
여기서 이 남자의 말을 막아야 할까?
나는 고요하게 올려다보았다. 울렁이는 기분을 숨길 수는 없었다.
너무 뻔한 걸 모르고 있었다.
“이곳은 위험하고, 난 그대를 향한 위험을 좌시할 수 없다.”
다만, 이건 봄볕 같은 설렘과는 조금 달랐을 뿐.
“대공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라이칸이 멈췄던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한 계단 더 내려왔다.
“……그대는 황자비가 될 생각은 없나.”
하지만 사람은 취향이라고 해서 모든 걸 내맡길 수도, 그렇다고 또 그것만으로 교제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라이칸 황자님은 저를 좋아하세요?”
그의 눈동자가 파문이 인 호수처럼 잠시 흔들렸다가, 이윽고 깊어졌다.
“좋아한다.”
그가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눈동자로 일렁임이 스쳤다. 그것이 더욱 커진다.
“아니.”
그의 흔들림은 역설적으로 그의 얼굴을 더욱 굳건하게 보이도록 했다.
결심을 굳힌 그는 이 순간 커다란 나무 같았다.
“은애한다, 영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나는, 이런 위험 속에서 고작 더 건강하게 만들자고 그곳에 다녀온 게 아니었다. 나는…….”
“황, 황자님?”
“난, 후회해. 그대를 그렇게 보낸 것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떠한 일에도 까칠하고 날카로울 것 같은 남자의 새파란 눈에 미약하게 일렁이는 물기를 보였으니까.
잠시만요, 잠시만요. 댁이 여기서 울면 안 되지!
나는 상황도 잊고 계단을 올랐다.
“우, 우는 거 아니시죠?”
아니라고 해! 고백을 떠나서 내 취향의 얼굴이 우는 건 그만 보고 싶다!
더는 보면 안 될 것 같단 말이다!
한 계단을 두고 손을 뻗었다. 까치발을 들자 겨우 그의 뺨에 손이 닿았다.
그는 흠칫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곧 천천히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이번엔 내 쪽에서 멈칫했다.
“……내가 먼저 그댈 보았어.”
그가 이렇게 말하고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고는 제 얼굴을 살짝 돌렸다.
하얀 뺨이 잠시 붉게 물들었다.
“이런 말은 그만두지. ……그 애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소리라 하더니, 실로 그렇군.”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의 차가운 손이 무심하게 툭 닿았다. 푸른 눈동자가 날 향했다.
“……곁에 있고 싶다, 영애.”
그윽한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난, 안 되겠는가?”
곧 내 안에서 무언가 정리되어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현재 두 번째 이야기에서 인물 ‘라이칸’의 역할은 ‘서브 남주’입니다.]
이윽고 등장한 것은 터무니없이 장난스러운, 그래서 이질적인 소리였다.
서브 남주.
이야기 속에서 절대 여자주인공과 이어지지 못하는 남자 캐릭터를 이르는 말.
이 순간 요정이 말하는 여주가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빙의자 님은 그의 고백을 거절해 주세요! (◍˃̶ᗜ˂̶◍)ノ” ]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허공에 떠 있던 발이 다시 땅을 디딘 듯한 기분이기도 했다.
고요하게 시선을 내렸다가 들어 올렸다.
‘그래서, 그 권유를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귓가로 키득, 작은 웃음소리가 스쳤다.
[요정이 웃어요.]
[요정이 ‘아무것도요?’ 하고 대답합니다.]
나는 고요히 앞을 응시했다. 귓가로 스친 요정의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이제 놈은 감정까지 좌지우지하려 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괘씸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난 시선을 들어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이런 감정을 숨긴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여러 고민이 스친다.
“라이칸 황자님.”
의아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이 남자가 날 좋아한다? 왜? 무엇 때문에?
당연한 의문이었다. 내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알아차리기 어려운 남자는 아니었다.
한 번쯤 의심해볼 수 있었던 요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난 어째서 지금까지 이 남자가 보낸 소소한 신호들을 눈치채지 못했는가?
여러 가지가 섞인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그저 취향이란 이유만으로 만날 수는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내 삶이 아직 불완전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연애라니. 아니, 못할 건 없는데 조금 멀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내 신세야.’
엄청나게 내 취향인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이런 고민이라니.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우선…… 말씀 감사드려요.”
너무나 고요한 탓에 내 목소리는 아주 선명하게 울렸다.
“사실 저는 저조차도 저를 아끼지 않았던 때가 있었어요.”
정확히는 죽지만 않으면 일단 어떻게 되든 좋으니 살아만 보자.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조금 다치더라도 살아남으면 그만이라 생각하니까.
“그건 그대의 병 때문인가?”
“아마도요.”
정확히는 내게 걸린 사명 때문이지.
“죽을 뻔했으니까요.”
물론 이 신체는 처음에 거의 죽어가고 있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 저를 이토록 깊이, 그리고 좋아해 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음. 기쁜 마음이에요. 정말로요.”
이 또한 진심이었다. 그간 살아남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때로 살아남기 위해 내 건강을 던져야 할 때도 있었다.
“제가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그것도 이미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에서 당신이 이렇게 책장을 벗어날 줄 몰랐다.
당신을 고정한 액자틀을 벗어난 곳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다고 해야겠지.
나는 짧은 시간 날 스쳐간 수많은 고민 끝에서 결국 수락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죄송해요, 지금 당장 대답할 순 없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