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58)
숨죽인 내 목소리는 몹시 작았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는 이 남자는 들었으리라.
“…….”
마치 아주 쓴 약을 먹은 듯 표정이 잠시 흐려졌으니까.
라이칸이 진심이라면, 가볍게 치부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이 요정의 창이 시킨 대로 할 수도 없었다.
그가 신음을 흘리며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절도 예상했지만 생각지 못한 대답이군.”
천천히 감정을 가다듬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대가 나를 좋아한다고, 아니…… 내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지.”
미소라고는 할 수 없는 쓴 표정이 그의 얼굴로 스쳤다.
“그댄 내 여동생에게만 진심이었어. 그 애만을 생각했을 뿐이야, 그렇지?”
“…….”
“나는 안중에 없었어.”
사실이다.
내 목표를 위해서는 래빗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이었고, 긴 이야기를 함께 헤쳐나가며 끝내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 안에 이 남자가 있었느냐 하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야기가 너무 빠르게 나타난 데다 숨 가쁘게 흘렀지.’
생명의 은인, 좋은 사람이라곤 생각하지만 나에겐 너무 과분해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신중하게 한마디 한마디를 내보이는 남자에게선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생겨버린 마음은 방향을 잃은 채 가슴에 남았다. ……부정도 해봤지. 이 말을 하는 건 그저, 이 또한 소용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라이칸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대를 좋아해.”
이 남자는 몇 번이나 고백하려는 걸까.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았다. 그리곤 걸음을 살짝 뒤로 물렸다.
이에 라이칸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난, 그대를 겁주려 하는 것이 아닌데…….”
“네, 알아요. 라이칸 황자님.”
나 또한 도망치려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직 제 말 끝나지 않았어요.”
그저 아직도 둥실 떠 있는 저 ‘고백을 거절하라’는 창을 피해 그의 얼굴을 더 명확히 보려 했음이다. 나는 푸른 창을 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 볼게요.”
“……뭐?”
“정말 진지하게, 라이칸 황자님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해볼게요. 그리고 그 고백도요.”
나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 남자가 언제부터 그런 애틋한 마음을 품었는지 나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명확히 안다. 당신의 진심은 고작 이 푸른 창 따위에 유린되고 무시당해선 안 된다.
“이토록 저를 생각하여 어렵게 뱉은 마음이라면.”
앞으로 남은 퀘스트를 생각하면 여전히 내 삶은 생존으로 바쁠 것이다. 그렇다고 저 푸른 창이 시키는 대로 가벼이 거절할 순 없다.
“저도 쉽게 대답하지 않을게요.”
나와 타인의 감정까지 요정 따위가 멋대로 하게 두지 않겠어.
“황자님께서 표현해주신 마음의 깊이 만큼 고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을게요.”
내 선택은 수락도 거절도 아닌 보류였다.
결국엔 요정의 창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은 셈이나, 요정의 창은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감정마저 좌지우지하려던 작금의 행태가 잊혀지지 않아 꺼림칙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도로 돌아가서 답변드려도 될까요?”
“그건…….”
나는 하늘을 잠시 보았다.
북부의 하늘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내겐 이 하늘을 더는 바라볼 수 없는 날이 곧 올 것이다.
“제가 황자님께 대답을 드리는 날에는, 그 대답에 제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드릴게요.”
이 남자는 똑똑한 사람이었으니, 내 말뜻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잠시 눈을 크게 떴던 라이칸이 곧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가끔, 그대가 치사하다 생각할 때가 있다.”
“…….”
“이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드니.”
안다. 그가 어떤 심경일지. 하지만 퀘스트에 대한 것을 알릴 수는 없었기에 나로서는 이 말이 최선이었다.
“알았다.”
이윽고 푸른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래빗 황녀님과 먼저 돌아가시면 수도에서 뵐게요.”
퀘스트와는 상관없이 나는 이곳에 30일만 머무르다 3황자 탄신일에 맞춰 돌아갈 예정이었다.
“사실, 래빗 황녀님을 이곳에 데려온 거…… 상당히 무리하신 거죠?”
래빗이 황실에서 받는 대우를 안다. 황제와 황태자에게 어떤 존재인지도.
그런 래빗을 몰래 데려오기란 여간 쉽지 않았을 거였다. 지금 당장 두 사람에게서 폭풍 같은 연락이 쏟아지고 있다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짐작이 크게 틀리진 않은 듯 라이칸이 설핏 찡그렸다.
“그대가 어떤 생각을 한 건진 몰라도, 그 정도는 아니다.”
“황실에서 연락이 없었단 말씀은 안 하시네요.”
“……그대는 정곡을 잘 찌르지.”
“네, 그래서 사실 황자님의 미움을 받은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나는 첫 만남을 떠올리며 설핏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적은 없어.”
라이칸이 조금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먼저 돌아가세요, 어찌 됐건 저희는 빠른 시일 내로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내가 두 번째 메인 퀘스트를 실패하지 않으면, 퀘스트를 완수한 덕분이든 3황자 탄신 일 때문이든 결론적으로 다시 보게 될 터다.
“……그러지.”
라이칸은 어째서인지 순순히 대답하더니 조심스레 상체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대가 나를 잊지 않아 준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더니, 일순 늘 까칠하고 서늘하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마치 제 말이 이제야 부끄러워졌다는 듯.
……뭐지, 이 갑작스러운 절경은?
난 눈을 깜빡였다. 이런 얼굴은 잊으라 해도 잊지 못할 것 같은데.
“저, 황자님 이건 놀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궁금한 건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와서 부끄러워지신 거예요?”
“…….”
그가 입을 가로막았다.
‘진짜였어?’
라이칸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
“아니라기엔 얼굴이 빨개지셨어요.”
“중계하지 않아도 안다! 그저…….”
“……그저?”
차차 흰 피부가 울긋불긋 물들어가더니, 기어이 귀마저 새빨갛게 물들었다.
“너무 적나라하게 진심을 말한 것 같아……. 그대가 도망이라도 갈까 염려한 것, 뿐이다.”
뭐지. 이 까칠하던 황자님이 갑자기 엄청나게 귀엽게, 아니, 큐트하게 보이는 기분은?
정말이지 라이칸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이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뿐이다, 알겠나?”
“으음, 네 알았어요.”
“대답이 성의가 없어 보인다만.”
“그럴 리가요, 지금 라이칸 황자님의 얼굴을 아주 똑똑히 기억해놓고 있는걸요.”
“……놀리지 않는 게 아니라 놀리는 게 맞았군.”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보다 보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긴 했다.
“그럴 리가요. 오해세요.”
나는 그제야 평온함을 되찾고 생긋 웃었다.
“조금 늦은 말이지만 래빗 황녀님도 라이칸 황자님도 여기까지 와주셔서 기뻤어요.”
“혹시 외로웠던 건가?”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그렇다기엔 제타르 경과 친위대, 아스와 린 같은 이들이 무척이나 잘해주었으니까.
“그냥 친구들이 와주니까 기쁜 거죠.”
“……노파심에 말하는 거다만, 영애 난 방금 그대에게 고백했단 걸 잊지 않아 줬으면 한다.”
그거야 당연하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그저 친한 친구며, 지인이 이 먼 곳까지 와준 기분이 특별했다는 거지.
“걱정 마세요.”
나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푸른 창을 보았다.
‘요정의 창을 어긴 시점에서 이 창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까.’
내가 라이칸의 고백의 답을 보류하면서 수락도 거절도 아닌 형태가 됐다.
요정이 만약 이 상황을 퀘스트에 ‘실패’했다고 간주한다면 내가 아닌 라이칸에게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퀘스트를 거부했던 내게 래빗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협박했던 것처럼.’
지금 당장은 어떤 행동도 취하고 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지.
그러니, 이 남자를 두 번째 이야기에서 메인 무대인 북부 영지에서 떨어트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자 귓가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이.
그러나 이어지는 경고는 없었다. 라이칸이 위험에 처할 거라는 협박도.
나는 속으로 비릿하게 웃었다.
오냐, 그렇게 웃어 봐라. 네가 더는 웃지 못할 순간이 반드시 올 테니까.
나는 이 생각을 숨긴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춥네요, 그럼 돌아갈까요?”
막 돌아서려는데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라이칸이 나를 앞서 계단을 내려오더니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한가지 이야기가 남았다.”
“음? 고백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
라이칸이 살짝 찌푸렸다.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어쩐지 조금 뚱한 표정이었다. 뭐지, 이것도 스킬의 영향인가. 이 남자가 어째 전보다 더욱 귀여워졌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저런 말투 쓰니까 래빗이랑 판박이네.’
나는 이 말은 굳이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라이칸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더니, 곧 내 손바닥 위에 무언갈 올려놓았다.
조그만 씨앗같이 생긴 형태의 물건이었다.
“이거, 혹시 보약인가요……?”
“맞다.”
래빗이 주었던 걸 떠올렸더니 역시나 정답이었나 보다.
“어쨌거나 이 북부까지 온 표면적인 목적은 이거니까.”
“감사해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참 늦은 질문인데…… 황자님 얼굴에 난 상처요, 혹시 몬스터를 상대하다가 다치신 거예요?”
“알아주니 기쁘군.”
“네?”
“알아주길 바라서 이렇게 왔다.”
음, 당당하시네. 나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이유네요.”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생각해주면 그걸로 좋겠지.”
“생각 이상으로 능숙하게 꼬시는 것 같군요.”
“…….”
“아, 얼굴은 솔직하시네요.”
“……그만하지.”
결국 제 얼굴을 가린 라이칸이 항복을 선언했다.
나는 웃음을 머금었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눈이 쌓인 풍경이었지만 어쩐지 춥진 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