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59)
* * *
난 손안에서 가만히 아까 받은 약을 굴려 보았다.
라이칸은 이걸 물과 함께 삼키면 된다고 했다.
‘래빗이 준 보약은 건강 수치를 올려줬었지, 그럼 이 약도 그 수치를 올려준다고 보면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 바로 먹기보다는 나중을 위해 아껴 두는 쪽이 낫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건 게임에서의 ‘회복 물약’에 가까운 아이템일 테니까.
나는 고민 끝에 이걸 당장 먹는 대신 잘 보관해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약을 어떻게 보관할지도 문제긴 한데. 계속 손에 들고 있을 수도 없고. 기왕 게임 시스템 창 같은 게 나타난 김에 인벤토리 같은 건 안 주는 거야?
[요정이 친절을 베풀어요! 현재 빙의자님이 손에 쥔 약은 명약! 이전에 먹은 약보다 훨씬 효과가 좋습니다! 따란! ٩(๑• ₃ -๑)۶♥]
따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시 나타난 요정의 창을 지그시 노려보다 다시 약을 향했다.
‘인벤토리 창까지는 만들 능력이 없나 보지?’
요정은 답이 없었다. 순전 제멋대로 구는 거야 뭐 이젠 익숙하니까. 내가 꼭 저놈 XX를 굴리고 만다.
걷다 보니 어느새 방으로 들어서는 복도였다.
옆에서는 린이 조용히 함께 걷고 있었지만, 그녀는 조금 전부터 할 말이 있는 듯 내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라이칸이 돌아간 뒤로 이미 ‘무사하시냐, 별일 없으셨느냐.’ 하고 묻기도 했었다.
당연하겠지만 별일은 없었다. 아니, 다른 의미의 별일이 있긴 했지.
린은 아무래도 오늘 낮에 내가 큰 부상을 입었던 만큼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방으로 돌아가면 내보내기 전에 안심이라도 시켜서 보내야겠는걸. 어째 그냥 보내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안색이다.
그렇게 막 방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
방문 앞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대공님이었다.
훤칠한 키나 압도적인 덩치 때문에 서로간의 거리가 그리 가깝지 않음에도 한눈에 들어왔다.
그 또한 다가오는 나를 발견한 듯, 냉혹하던 얼굴이 한순간에 부드럽게 풀렸다.
“영애.”
“대공님.”
눈꼬리가 처져서 어찌 보면 아방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가 반갑게 느껴졌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어쩐 일이세요?”
그가 이런 시간까지 찾아온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지라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오늘 잡아들인 자들의 처벌을 이야기해주러 온 걸까?
‘그건 아침에 전해줘도 될 텐데?’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대공님 또한 눈을 깜빡였다. 그에게 의아함이 스쳤다.
“영애는 어딜 다녀오는 길인가요?”
“아, 저는 잠시 정원을 산책하다 왔어요.”
나는 잠깐 뺨을 긁적였다가, 이내 한마디를 더 붙였다.
“정원에서 황자님을 잠깐 뵈었구요.”
대공님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는 잠시뿐 다시 그의 얼굴에 온순한 미소가 맴돌았다.
“그렇군요, 황자님과 대화를……. 아, 나는 영애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 왔어요.”
“제게 이야기요?”
이 시간에 와서 하려는 거라면 좀 급하고 심각한 이야기일까.
린을 잠시 물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대공님이 먼저 입을 떼었다.
“……조심스럽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
“네. 뭐든 말씀하세요.”
그의 얼굴이 한순간 터질 듯이 빨개졌다.
“다, 당신과 밤을 함께 보내고 싶어요, 영애.”
“……아하, 밤을…… 네?”
……잘못 들었나? 그러나 고개를 드니 그 어느 때보다 붉게 익은 얼굴이 나를 반겼다.
스스로도 자신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 눈꼬리가 미약한 그렁그렁함마저 매단 채였다.
“……제가, 혹시 잘못 들었을까요? 그, 어, 지금 밤을 함께 보내자고……?”
그러나 대공님의 입에서 잘못 들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빨개진 채로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자, 잘못 듣지 않았어요, 영애. 제대로…… 들었어요.”
“혹시, 그 밤이 음, 어, 밤 동안 쭉 대화를 나눈다거나…….”
“아니에요.”
“그냥 한 침대를 쓴다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란 말이 끝내 나오지 않았으니까.
‘혹시, 요정 새끼, 아니 요정님. 설마 호감도를 올리면 이런 반응도 나오는 거였어?’
뒤늦게 요정을 찾았지만, 이놈은 언제나 그렇듯 멋대로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그제야 대공님의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저 가운? 이제 보니 너무 위험해 보여!’
자세히 보니 가운 한 겹만 입은 것 같았다. 갈라진 사이로 언뜻 그의 가슴이 보이는 성싶었다.
침착, 그래, 침착하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막 고백을 받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생각해보겠다 답한 참에, 이번엔 현재 약혼자 씨의 몸으로 말해요, 같은 유혹이라니?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달싹이기만 했다.
물론, 이 남자는 내 약혼자였다.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알고 있을 터다.
다만, 우리의 계약은 여전히 건재했다.
“음, 대공님, 어, 그…….”
내가 어물어물 말을 흐리면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하필 린과 눈이 딱 마주쳤다.
“꺅…….”
지금까지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린은 입술을 가로막은 채로 엄청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참지 못하고 작게 비명을 지른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그 상태로 나를 한번, 대공님을 한번 번갈아 본다.
어어, 언니. 그거 아니야. 아니라고.
‘오늘 밤에야말로 역사를 쌓으시는 건가요?’ 같은 표정 하지 마시라구요!
“아, 죄,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서 물러나겠습니다!”
“잠시만요, 린. 저기…….”
“그, 돌아가면서 친위대 분들에게도 얘기해둘게요!”
“네?”
뭐를? 뭐를 얘기하는데?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그러니까 그 방해받을 만한 일은 안 할 거라고! 그러나 그녀는 속세를 떠나는 스님인 양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누가 뛰어난 검사 아니랄까 봐 무척이나 잽싼 몸놀림이었다.
어느새 나와 라이칸의 만남을 보고서 걱정하던 얼굴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나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을 보고 끙, 얼굴을 부여잡았다.
앓는 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이대로라면 내일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는 거 아니야?’
이런 건 해명하기도 쉽지 않을 건데……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 남자가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대공님을 하늘처럼 따르는 이들은 철석같이 믿을 터다.
후, 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미안해요, 영애.”
맑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귀를 두드렸다. 대공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음이 앞서서 그만…….”
“아니에요, 음, 그러니까, 어, 농담…… 그래, 농이셨던 거죠?”
“농은 아니에요.”
“…….”
아니, 여기서 농이라 하면 서로 넘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런 쪽으론 눈치가 없으신지, 아니면 굳이 모른 척하고 싶지 않은 건지.
아마도 후자인 것 같았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하고 싶은데, 어째 방으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함께 들었다.
나는 방문을 열길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이런 말을, 영애를 담는 말을 가지고 장난 같은 걸 하지 않아요. 절대로.”
“음, 네……. 알고 있어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건. 그러니까, 슬쩍 넘어가려는 제 의도를 모른 척하신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
그가 온순한 눈망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잠시 깊어졌다.
“……진심이었어요, 영애. 나는, 영애만 좋다면…… 함께 밤을 보내고 싶어요.”
대공님이 한걸음 다가왔다. 그림자가 한발 앞서 나를 덮었다.
“이 밤뿐만 아니라 다음날도 한 달 후도, 그리고 수없이 많은 밤이 모인 세월을 함께 하길 바래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잠시 복도를 보았다.
“아무도 없어요, 영애.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요. 다들 물러났어요.”
“……네.”
그러니 편히 말해도 좋다는 답이리라.
과연, 방으로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간절한 대공님을 보고 있으려니 역시 여기서 대화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공님…… 저희,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우리의 계약을 입에 담았다.
“그 계약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에…….”
“맞아요, 영애.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보고 싶었어요.”
다가온 대공님이 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살짝 떨리는 입술이 내 손등에 내려앉았다.
중앙에서야 흔히 쓰이는 인사였지만, 북부에서는 보기 드문 행위라서일까.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영애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거라면 뭐든 이용해보고 싶었으니까요.”
……뭐를요?
혹시 그게 몸인가요? 아니면 얼굴?
설마 둘 다?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탁월한 선택이셨네요.’
나는 속으로 내 망할 취향을 욕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이대로 유혹에 넘어가 그를 받아들여서야 후폭풍을 어찌 감당하겠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자신 없으니 여기서는 물러나는 게 맞았다.
막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퀘스트(메인) - ‘북부 대공 프로듀스! 계약 결혼을 완수하라!’
내용: 2) 완전한 ‘북부 대공’이 된 남자주인공과 클라이맥스 장면을 연출하세요!
선정 장면 : 계약 결혼의 끝을 알리고 헤어짐을 통보하는 여자주인공과 여주인공을 가지 못하게 붙잡고 마음을 고백하는 남자주인공]
……뭐?
[예시 장면이 환상으로 펼쳐집니다!]
뭐? 왜? 왜 하필 지금??
그러나 내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눈앞으로 환한 빛이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