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43화 (143/281)

◈143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60)

눈을 떴을 때, 나는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저 아래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한쪽은 심각한 얼굴을 한 대공님이었다. 어찌나 살벌한 표정인지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가 보이는 표정은 내가 아는 얼굴이라기보다는……

익히 상상해오던 ‘북부 대공’의 모습에 가까웠다. 냉혹한 군주 말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고개를 돌리자,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성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얼굴과 머리카락에 검은 칠을 해놓은 듯 이목구비와 머리 색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시선을 주자,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본 모습이 나타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저건 내 모습이었다.

분홍색 머리, 연한 연두색 눈동자, 거기다 어딘가 병약한 얼굴까지. 분명 내 얼굴이었다.

‘책 속의 예시 장면 아니었나? 그럼 저 자리엔 ‘지젤’, 그 언니가 있어야 하잖아……?’

위에서 내 얼굴을 3인칭으로 바라보는 기분이란 참으로 묘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얼굴에서 표정을 깨끗이 지웠다.

“대공님, 이 계약은 여기서 끝이에요.”

와, 내 얼굴이 저렇게 냉정한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계약이 끝났으니 난 가겠어요.”

“……누구 맘대로?”

대공님이 입술을 비틀었다. 붉디붉은 눈동자로 사나움과 동시에 서러움이 스쳤다.

칼바람 같은 시선이 ‘나’를 옭아매듯 향했다.

“그 계약은 무효야.”

그의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선연하게 일렁거렸다.

“아니, 계약. 새로 작성해도 좋겠군. 그대와 내가, 영원히 함께하는 것으로.”

“…….”

대공님이 웃었다. 싸늘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대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수락 외에는 없을 거야. 내 허락 없이 이 영지에서 나가지 못할 테니.”

……네? 뭐라고요? 잠시만요.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허공에 떠오른 채 당황해서 마구 손을 내젓는 것도 잠시, 눈앞의 장면이 차차 흐려졌다.

어느새 다시 현재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는 듯, 눈 앞에는 현재의 대공님이 그대로 서 있었다.

심지어 날 향해 이상하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은 채 가만히 쳐다보는 얼굴.

눈앞의 이 얼굴이 내가 알던, 이제는 익숙해진 온순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조금 전 환상 속 장면과 구분 짓지 못할 뻔했다.

‘……아니, 잠깐만. 지금 이 순간에 그 장면을 연출하라고?’

미친 건가? 아니, 그보다 아까 그 장면을 어떻게 연출해?

‘그거, 누가 봐도 피폐 감금물의 도입부 같던데?’

내가 읽었던 계약결혼물에 이런 장면이 있었나?

젠장, 이런 급할 때에도 그놈의 소설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계약 결혼을 중단하는 장면이 큰 갈등이었다는 점만은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와, 대공님이 정말 북부 대공다울 땐 그런 모습이란 말이지…….’

나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지금 날 내려다보는 조금 의아하고 염려스러운 시선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그 싸늘한 눈길로 변모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다니…….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내가 죽을 텐데 말이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이상해.’

메인 퀘스트에는 분명…….

제한 조건이 있었다.

첫 번째, 대공님과 계약 결혼 관계 맺기.

두 번째, 대공님의 호감도를 100(+α) 달성

마지막으로, 광증 수치 40이하

여기서 나는 아직 호감도를 달성하지 못한 채였다.

현재, 99였나?

아직 퀘스트 창에 표시된 ‘플러스 알파’는 어떻게 채우는지 짐작도 못 했다.

그런데 엔딩 장면부터 일단 연출하라고? 이상하잖아.

더군다나 예시 장면에는 왜 지젤, 그 언니가 아니라 내가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환상 속에 나온 대사를 쳤다간, 대공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도 못 하겠다.’

그러다 오히려 그를 자극해서 광증 수치만 오른다면……. 혹은 폭주로 이어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였다.

3단계 폭주는 막지 못하면 바로 배드 엔딩이다.

‘이 더럽게 어려운 퀘스트 같으니.’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공님, 저희가 정한 계약의 만료 기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걸로 알아요.”

“네, 알아요. 영애. 내가 초조했던 것 같아요.”

대공님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환상 속 그를 다시금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당신을 원작대로 되돌려 놓으면, 당신은 그 환상 속 이미지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남자가 되는 걸까?

……지금의 얼굴이 더 어울리는데.

왜일까, 래빗을 두고 향방을 결정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기존 육아물의 클리셰대로 이 황녀님에게 애교를 가르칠 수 있었음에도 끝내 래빗이 더 행복해질 방향을 택했던 날을.

본능적으로, 지금 또 한 번 그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영애가 오늘 밤을 거절한 건 혹시…… 2황자님 때문인가요?”

파르르 떨리는 입술, 이 남자는 정말로 나와 밤을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불안했던 터일 터다.

그리고 내가 이 순간 그 사실을 더 선명히 보고 알아챌 수 있었던 건 ‘스킬’ 덕분인 것 같았다.

이대로 그에게 남은 호감지수는 1, 그리고 앞으로 찾아야 할 플러스 알파.

그의 호감과 애정을 이렇게 올려두고서 잔혹한 퀘스트에 그대로 따라 버려도 정말 괜찮은가?

잊고 있던 사실이 머리를 쿵쿵 때렸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공님, 할 얘기가 있어요.”

내 표정이 변하자 그의 표정도 덩달아 변화했다. 불안과 초조함 속에 의아함이 스쳤다.

“사실, 저는 이 계약 결혼을 쭉 이어갈 생각이 없…….”

파지지지직!

[경고! 메인 퀘스트 파괴는 불가합니다!]

그 순간 붉은 번개가 쳤다. 나는 얼른 손가락을 부여잡았다.

아프진 않았으나, 경고의 의미로는 충분했다.

-인간, 낯선 힘이 느껴졌다, 컁! 무슨 일이냐?

문 안쪽에서 컁컁, 둑스가 우는 것이 들렸다.

-‘요정’의 힘이었다!

‘아냐, 둑스. 괜찮아.’

아직은 말이지. 나는 둑스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대공님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 채, 놀란 낯으로 내 손을 잡았다.

“어디 아픈가요, 영애?”

“아니, 아니에요. 대공님…….”

이 번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이윽고 손을 붙잡힌 채로 눈을 들었다.

“대공님, 저는 사실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아니, 반드시 이뤄내야만 해요.”

“……영애?”

엔딩을 보지 못하면 죽는 몸, 생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이런 말은 정말 직접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목표는 대공님과 함께 한 계약 결혼보다도 더 소중해요.”

지키지 못하면 죽으니까.

“지금 제 말이 뜬금없이 들릴 거란 거 잘 알아요.”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어떻게든 퀘스트의 허점을 피해 말을 이어야 한다. 아니,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 드릴게요, 저는 이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는 누구도 사랑할 자신이 없어요.”

지금 막 어렴풋이 떠오른 것.

퀘스트가 선정한 장면은 적어도 지젤 또한 자신이 느낀 걸 사랑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떠나려 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입술을 축였다.

“죄송해요, 저는 대공님을 이용하려 했어요.”

“…….”

지젤은 책 속에서 계약 결혼을 통해 이득을 보려 했다. 대공 또한 지젤을 이용하려 했으니 똑같은 처지였다.

“대공님이 저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그걸 방관했어요.”

“……그렇게 들으니 영애가 아주 나쁜 사람처럼 들려요.”

“맞아요, 전 나쁜 사람일 거예요.”

원작과 우리의 처지와 비교해서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고 사랑을 하고 있단 점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해도 결국 내가 당신을 이용하려 했던 부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담담히 인정했다.

“깊어가는 대공님의 마음을 알고서도 방관하는 것 또한 죄가 아닐까요.”

“영애. 당신은, 나를 떠나려 했나요?”

“…….”

대답이 없지만 대공님은 대답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나는 그가 곧 울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

대신 보일 듯 말 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영애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단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우는 것만 못한 미소였다.

아니, 차라리 우는 게 나을 정도로 서글픈 미소가 있단 걸 처음 깨달았다.

“……그저, 영애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사실은 어떻게든 내게 상처 주지 않고 거절하기 위해, 날 배려하기 위해 애써 만든 이유가 아닐까 생각하는 내가……. 난 조금 한심하게 느껴져요. 영애.”

그가 내 손을 놓았다. 아니, 놓으려 한 순간 난 빠져나가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하고 싶은 말들이 떠올랐다.

‘전달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입술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제게 이 목적을 부여한 ‘존재’는 대공님이 더 냉정하고 차가우며, 지금보다 더 타인의 위에 강력하게 군림하는 존재가 되길 바랐어요.”

아, 됐다.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존재’라니요?”

“예전에 했던 이야기가 기억나시나요? 당신이 앞으로 되어주었으면 하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요.”

이런 발언은 가능한 모양이지?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래빗의 가족에게 래빗의 회귀 사실을 말해선 안 된다는 금기가 있었다. 이를 절대 어길 수 없었고.

“그건 사실 제가 진정 바라는 것이 아니었어요.”

두 번째 이야기에서의 금제는 이 계약 결혼을 정해진 엔딩 대신 다른 결말로 멋대로 이끌어가거나 강제로 끝내려는 의사를 보이면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가 진정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다.

“대공님은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충분해요. 아니,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어도 괜찮아요.”

“…….”

“계속 말하고 싶었어요, 대공님.”

멈칫하다 못해 그대로 굳어버린 그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억지로 바꾸거나, 타고난 모습을 숨기고 뜯어고치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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