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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51화 (151/281)

◈151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68)

사실 아스와 린에게 몬스터 강의를 꽤 들었는데,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속으로 두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며 손을 떼어냈다.

대공님은 이제 진정된 얼굴이었다.

조금 전과 같은 날카로운 살기와 울상인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이, 있잖아.”

“응?”

“종, 같은 거, 가지고 있어……?”

“종? 아니?”

갑자기 무슨 종이지? 종이라면 저 밖에서 하나 보긴 했는데.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대공님은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끄덕였다. 어째 소년의 시선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묘한 구석이 있었다.

“……조, 종소리가 들렸는데…….”

“아, 종소리? 혹시 저 밖에서 들린 게 아닐까? 밖에 지키고 있는 사람들 머리 위에 종이 달려 있더라고. 너 그렇게 멀리 있는 소리도 들리는 거야? 대단하네.”

하기야 성인일 때도 신체 능력은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지. 어릴 때라고 다른 건 없었나 보다.

“나도 할 말이 있는데, 혹시 너 말이야, 이제 그 검은 치워줄 생각은 없어?”

아직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검을 가리키자, 대공님이 화들짝 놀라더니 얼른 검을 내렸다.

애가 좀 허둥지둥하는 모습이었다. 왜 그러지?

“그, 어, 정말, 아, 아버지가 보낸 몬스터가 아니야?”

“아니지. 피가 붉은 거 봤잖아. 그리고 네 아버지가 보낸 사람도 아니야.”

“그, 그럼 혹시, 마법사야?”

“아니?”

“그럼 왜, 지, 지금 네 주변에서 빛이 막.”

“빛? 어디에?”

나는 주변을 보았지만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뭐지.

다시 고개를 돌리면 대공님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작게 ‘종소리…… 빛……’ 하고 한 번 더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윽고 그가 다시 나와 조심스럽게 눈을 마주했다.

“그럼…… 여긴 왜?”

“널 위해서.”

나는 웃으며 말했다.

“널 위해서 왔어. 혹시 여기서 탈출할 생각 없어?”

“탈……출?”

난 흘끗 아래를 보았다. 내 다리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아기 여우를 보다 웃음을 머금었다.

귀여운 아기 여우님, 이름 한 번만 더 쓸게.

“응. 위대한 짐승께서 너를 여기서 탈출하게 도우라고 하셨어.”

“…….”

“네가 자유로워지라고.”

어떤 경위로 여기 갇히게 됐는지는 조금 전 가르카와 그의 선배의 대화로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공님의 뜻은? 휴고의 뜻은 어디에도 없었겠지.

“넌 여기서 못 나간 지 얼마나 됐어?”

휴고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뜻 같았다.

뭐 이런, 아동 학대가……. 로판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라지만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싱긋 웃었다.

“나가보지 않을래? 아니, 나가자.”

한참을 망설이던 휴고가 천천히 내 쪽으로 손을 뻗었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더 크게 미소했다.

‘의외네. 여기서 부친이 무섭다거나, 밖이 무섭다거나. 나간 뒤에 다시 잡힐지도 모른다고 무서워하거나……. 아무튼 한번은 무서워하면서 뺄 줄 알았는데.’

대공으로서의 휴고는 잘 울고 머뭇거리고 쑥스러움을 타지만 한편으로는 결코 녹록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주한 아이는, 어른 휴고와 비슷한 느낌이면서 동시에 정말로 아이 같은 느낌이라 웃음이 터졌다.

어린 휴고는 내 웃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뭘 그리 빤히 보는 거야?”

“……내, 앞에서 웃는, 사람은 오랜만에 봐서.”

내 웃음이 살짝 흐려졌다. 그러자 어린 휴고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손을 뻗었지만 묶여있는 줄 때문에 내게 닿지 못했다.

“그게, 아, 아버지만 날 보고 웃어서. 내가 아프면 웃어서……. 기분 나빴어?”

“뭐?”

“미안해! 너도 가, 갈 거야?”

울먹이는 저 표정을 보며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조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기운을 표출하던 어린아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눈앞의 아이는 정말로 연약한 어린아이였다.

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체 애를 어떻게 취급했길래…….’

이것이 이야기이자 어쩔 수 없는 서사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다.

아니, 가라앉히자. 분노는 이 순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 가. 너 나갈 때까진 안 갈 거야.”

나는 품 안에 안고 있던 검을 소년에게 내밀었다.

검이 조금 키에 비해 크지 않았나 싶었지만 그래도 나보단 잘 다루겠지. 우리 대공님은 어렸을 때도 매우 셌던 것 같으니까.

“그리고 넌 최대한 빠르게 나가는 게 좋겠다.”

이런 곳에 휴고를 더 오래 둬선 안 되겠어.

요정은 전체 제한 시간을 뒀을 뿐 언제 빠져나가란 소린 하지 않았으니, 내가 알아서 하면 되겠지.

“그, 넌, 바란타와 같은 편이야?”

“바란타?”

칼리의 할머니? 그 할머니가 여기서 왜 나와?

마침 조금 전에 마주쳤던 인물이라 더 궁금했다.

“그 사람이, 갑자기, 그랬어. 나보고 오늘 자정에 자지 말라고……. 나, 나가게 해준다고.”

“……그래?”

아까 바란타를 본 건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

이 퀘스트, 난이도가 엄청 높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불가능한 수준으로 세팅된 건 아니었던 걸까다.

“하지만…… 실패할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해?”

“바, 란타 다음에 다녀간 사람이, 그랬어. 모두 들켰으니, 생각도 말라고……. 아버지의 친위 기사가…….”

음? 이러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는데.

이게 과거에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면, 과연 이 일은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하긴 성패가 중요한 건 아니지. 내가 이곳에 온 이상 무조건 성공해야 하니까.

“잘됐네. 양쪽의 정보를 모두 알았으니까…… 이제 이용하면 되겠다.”

나는 생긋 웃었다.

우선 이 검, 시스템 창에서 무기 운운했던 걸 보면 휴고에게 검이 필요했던 걸 거다.

“혹시 검이 있으면 일이 잘 풀릴 것 같아?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온 거거든. 어떻게 생각해?”

“……좋아. 검이, 있으면 자를 수 있어. 이거…….”

휴고가 가리킨 건 자신의 발목을 묶은 철로 된 끈이었다.

어린 나이로 보이는데, 휴고는 이미 검으로 마나를 뿜을 수 있었다. 다만 그동안은 녹슨 검만 주어졌기에 휴고는 제대로 마나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그럼 옆에 쓰러진 저 몬스터는 녹슨 검이란 패널티가 주어진 상황에서도 쓰러트린 거란 말이야?’

나는 감탄하면서도 안쓰러움을 느꼈다.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에게 무기를 전달하겠습니까? 도움을 주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0/2)]

흐음, 도움 횟수가 여기에 쓰인단 말이지?

[‘남자주인공(북부 대공)’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1/2)]

휴고에게 검을 주고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묶고 있던 끈을 잘라냈다. 놀라운 솜씨였다.

‘혹시 래빗의 힘을 빌리면 나도 이런 게 가능할까?’

곰곰이 고민하는데, 둑스가 캉캉 짖으면서 자기 힘을 빌리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다.

대신에 짐승의 힘이니까 손톱이랑 이빨로 물어뜯을 수 있다나?

……음, 난 최대한 인간답게 무력을 쓰고 싶은데 말이지.

“그럼 이제 밤까지 기다리자.”

“저, 어, 어디가?”

“정찰!”

마침 유령 같은 몸이 되었겠다, 바깥으로 나가서 정황을 좀 살펴볼 생각이었다.

“걱정 마, 곧 돌아올 거니까.”

* * *

밤이 되었다.

북부의 해는 금방 졌고 밤 또한 빠르게 찾아 왔다.

나는 지붕에 앉아 한참을 아래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인간, 많은 인간들이 오고 있다.

‘응, 나도 보여.’

바깥에서 대기하길 잘 했다. 바로 이 순간을 기다렸던 거니까.

휴고가 있는 탑 주변에 숨죽이고 있는 사람들은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서 얼굴을 가리는 복면을 한 채였고, 복면을 하지 않은 사람은 바란타였다.

바란타는 전체 인원에게 무어라 지시하더니, 본인도 복면을 쓰기 시작했다.

‘몰래 탈출시키는 건가?’별안간 이곳에 뚝 떨어진 탓에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서의 바란타는 어떤 이유 때문에 휴고를 이곳에서 탈출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니까 이 퀘스트에 한해선 나와 한편이란 말이지.

나는 지붕을 돌아 탑 반대편을 보았다. 놀랍게도 거기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숨어 있었다.

저 사람들은 약 4시간 전부터 저곳에 있던 이들로, 바란타와는 다른 무리였다.

검은색 단복을 입은 이들. 아마 추측하자면 휴고 부친의 친위대 기사들이 아닐까 싶었다.

따라서 현재 대립하는 두 세력이 탑을 가운데 두고 몸을 숨긴 상태라는 거다.

‘이대로라면 곧 부딪치겠네.’

아니나 다를까 바란타 세력 쪽이 몰래 탑 입구로 들어갔다. 잠깐의 시간을 두고 검은 단복 기사 무리가 쫓아서 들어갔다.

거기까지 보고서 나는 서둘러 휴고가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아!”

웅크리고 앉아있던 휴고가 벌떡 일어났다.

창백하다 못해 새하얀 뺨에 발그레 홍조가 돌았다.

“저, 정말 왔어?”

“응? 응. 당연하지. 약속은 지켜.”

어째서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상황이 조금 급했다.

“잘 들어. 휴고. 지금부터 시작이야. 우린 이 탑을 나갈 거야.”

“으응……!”

아마 아래에서는 빠른 시간 내로 전투가 일어날 것이다.

과거엔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휴고를 어느 쪽과도 마주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길은 내가 알려줄게. 내가 말하는 대로 잘 달리는 거야.”

“아, 알았어!”

문을 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휴고를 완벽하게 묶어 둬서인지, 아니면 몬스터를 들이기 편하게 만든 건지 몰라도 제대로 잠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복도로 나온 뒤, 나는 휴고 보다 먼저 앞서 벽을 뚫고 확인하거나 바닥을 뚫고 내려가 확인한 뒤에 휴고가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저, 있잖아…….”

또 한층 내려가려 하는데 휴고가 나를 붙잡았다.

“나, 나가면 너도 나와 같이, 지내?”

“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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