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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56화 (156/281)

◈156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73)

휘저어지는 칼날에 입에서 무언가 왈칵 치솟았다. 거대한 고통이 온몸을 지배했다.

“……!!”

특무대가 달려와 아르테반의 양팔을 부여잡았다.

“죽지 않게 처리하도록. 당장 죽이지 않는다.”

“예!”

흐릿한 시야 속에서 아르테반은 제가 불러온 마나홀로 다가가는 휴고의 뒷모습을 보았다.

리바의 마법으로 멈췄던 공간이 찢어졌다.

공간을 찢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뱀이었다.

도저히 보통 뱀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덩치와 끔찍한 모습. 등에 삐죽삐죽 솟은 뿔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

“대, 대공님 혹시 저건 30년 전에 그……!”

“아니다. 기록과는 크기가 달라.”

휴고가 검을 들었다. 제 부친을 차차 죽음에 이르게 만든 거대한 괴물, 그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달랐고 동시에 크기는…….

“30년 전보다 더욱 크다.”

운이 좋을 땐 저렇게 거대한 마나홀에서도 강력한 몬스터 딱 하나만 등장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행운은 휴고의 편을 들지 않았다.

거대한 뱀 옆으로 중형 몬스터들이 수없이 쏟아진다.

“하지만 비슷하게 생긴 놈이니 아마도 같은 종류라고도 할 수 있겠지.”

30년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의 북부 병력과는 다르게 그간 더욱 혹독한 훈련을 거친 강력한 기사들과 병사들.

거기다 휴고는 이 대륙이 자랑하는 최강의 검사였다.

“이놈은 내가 맡는다.”

휴고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거대한 뱀 머리 위에서 다시 나타난다.

사활을 건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휴고가 달린을 데려오라 지시했던 가르카와 마법사 아르반이 달린이 오른 산에 다녀오는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사이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전투는 영지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거대 마나홀의 전투 장소로는 최악의 장소였다.

마법사 아르반은 숨을 몰아쉰 채로 광장을 멍하니 보았다.

부서진 집들, 바닥에 수없이 쓰러진 몬스터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거대한 괴물의 모습이었다.

거대한 뱀 괴물이 혀를 빼놓은 채 죽어 있었다.

뱀에게서 나온 검은 피가 땅을 적셨다. 아니, 이젠 검은 땅이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새카만 대지를 보며 마법사 아르반은 이곳에서 있었던 전투를 쉬이 직감했다.

몬스터의 피는 오염을 상징한다.

대지를 오염시켜 마땅했지만 둑스의 가호가 있는 지금은 괜찮을 것이다.

“대, 대공 전하!”

거대한 뱀 앞에 휴고가 검을 늘어트린 채 서 있었다.

사람인지, 아니면 검은 피를 뒤집어쓴 무엇인가 인지 모를 모습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휴고를 본 순간, 마법사 아르반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전투 시에 마저 온순해 보이던, 그가 아는 대공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영애는.”

“……예, 예?”

“…영애는 어디 가셨지?”

마법사 아르반이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전하.”

함께 달린을 데리러 갔던 가르카가 간신히 앞으로 나섰지만 곧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지금 전하께 이 말을 전하는 것이 옳은가?

몬스터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흉흉한 기운이 휴고에게서 느껴졌다.

“말하라.”

가르카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눈꺼풀이 덜덜 떨렸다.

가르카는 처음 달린을 적대했던 이들 중에서 가장 먼저 마음을 연 자였다. 동시에 그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그만 영애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아꼈다.

‘가르카 경…… 아무리 찾아도,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휴고와 더불어 평생 충성을 맹세하고 싶을 정도로.

‘우리는, 절벽에서 마차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떨어지는 예비 대공비님의 모습도요.’

그러나 이제 그는 끔찍한 진실을 토로해야 했다.

“……전하, 송구합니다. 아니 너무나 죄송합니다! 이 가르카 명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

“예비 대공비님께서는…… 코스텔리아의 절벽에서 떨어지셨습니다.”

하필 달린이 떨어진 절벽은, 산맥에서도 악랄하기로 이름 높은 절벽이었다.

아래로 상시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강과 뾰족한 돌이 산재한 곳.

거기다 절벽에도 바위가 가시처럼 돋아 있기에…… 천운으로 안전한 곳에 떨어졌을 거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미 북부의 무수한 약초꾼을 삼킨 절벽이기도 하였다.

“……그분은 사망하셨습니다.”

가르카는 그렇기에 모두가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토로해야 했다.

휴고의 시선이 흔들렸다.

“젠장!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미친 자식, 뭐가 어쩌고 어째?!”

전투 부상으로 부축을 받고 있던 특무대 1대대 대장과 2대대 대장이 소리쳤다.

이것을 신호로 모두가 분노어린 얼굴로 아우성쳤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절벽에서 떨어져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여, 영애가…… 코스텔리아의 절벽에…….”

휴고가 제 입을 꽉 가로막았다. 커다란 손이 덜덜 떨렸다.

믿을 수 없었다.

왜? 대체 왜? 무엇이 잘못된 걸까.

아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그녀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나?

그럼 부친 걱정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도 끝끝내 평온하게 말을 하려 애쓰는 사람을, 심지어 자기 자신이 어떤 상태인 줄도 모르던 이를 강제로 이 성에 남겨두어야 했을까?

아니, 처음부터 더욱 안전한 곳에…… 그런 곳에 모셔서.

저 밑 심해로 빠져드는 기분, 너무나도 아득했다, 이 모든 것이 현실 같지 않았다.

검게 덩어리진 생각이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감히 차오르는 이 마음을 욕심내어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문제였나.

왜 그 죄는 자신이 받지 아니한 것인가?

……사실은, 그의 사랑은 잘못되었는가?

어린 시절 소중한 것들은 모두 부친의 손에 파괴되거나 명을 달리했다.

늘 빼앗기는 삶이었다.

대공이 된 이후로도 그는 끊임없이 아르테반 같은 이들에게 많은 것을 강요당하며 시험 당해야 했다. 충심이란 이름으로.

욕심은 자연히 사라졌다. 때로 자신은 그저 이 북부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동상 같다는, 기계적인 생각으로 움직였다.

그렇기에 휴고는, 세상 처음 만난 첫사랑의 달콤함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 때로 뜨거워서 불에 데는 듯한 마음.

바라보고 있지만 그럼에도 애틋한 마음.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제 목숨을 원한다면 지체 없이 검을 들어 심장을 찌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듯이 떠나버렸다.

아니, 희생당했다.

끝끝내 휴고의 메마른 뺨으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 눈물은 매서운 겨울 바람에 금세 마른다. 휴고는 울지 못했다. 더는 울음을 터트려도 곤란한 듯 다정하게 웃으며 눈물을 닦아줄 사람은, 이제 없으니까.

이 영지가 문제인가? 이 땅이 문제였던가?

마침내 생각이 멈췄다.

이곳이 당신이 더는 없는 세상이라면.

……다 필요 없다.

이 땅이 당신을 죽였다면,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휴고의 생각이 뚝 끊어졌다.

그 순간 휴고에게서 무시무시하다 못해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대, 대공님?”

“전하! 아니 됩니다! 라반!”

“으아아아악!”

그 어느 때와도 다른 흉흉한 기운이었다.

* * *

“아이고, 허리야…….”

온몸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떨어질 때 강한 충격을 받았나 보다.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하늘과 따스한 태양이 보였다.

“으으, 얼마나 기절한 거야…….”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그간 건강 수치가 간당간당할 때마다 겪었던 고통 덕분에 아픈 것엔 내성이 생겼달까.

‘으으, 지금 건강 수치가 얼마나 떨어졌을지 보기도 싫다.’

때마침 요정의 창이 건강 수치 어쩌고 하는 창을 띄웠지만 보지 않았다. 봐 보아야 속만 답답해지지. 이제 몸 상태만으로 수치가 어느 정도일지 감이 잡히기도 했고.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무언가 나를 덮쳤다. 폭신한 감촉.

내 배 위에서 엉엉 우는 아기 여우였다.

-인간! 죽은 줄 알았다! 정말……!

“둑스!”

앞발로 제 얼굴을 잡고 컁컁 운다. 눈물로 잔뜩 젖은 여우의 얼굴을 보니 측은해졌다.

나는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절벽에서 떨어진 순간, 정말 이번엔 죽겠구나 싶었지.

하필이면 이놈의 절벽엔 무슨 가시처럼 삐죽삐죽 솟아난 바위가 많아서, 추락을 멈추기 위해 아무거나 함부로 붙잡다간 저기 꿰뚫릴 것 같았다.

이뿐만이랴, 자칫 잘못 부딪쳤다간 탱탱볼처럼 마구 부딪치다 온몸의 뼈가 부러져서 죽을 성싶었다.

‘손으로는 못해, 검으로 바위를 찍자!’

내겐 스킬로 인한 힘이 남아있었고, 손에 있던 검을 가까스로 한 바위에 찍어 몸을 멈출 수 있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끼기기기긱!

멈춘 순간 옆으로 돋아난 뾰족한 바위가 목 바로 앞에서 멈췄으니, 실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조금만 더 힘이 모자랐다면 멈추려다 말고 이 바위에 사망했을 테니까.

“아슬아슬했지…….”

그렇게 나는 간신히 그나마 내가 엎드려도 될 만큼 평평한 돌을 찾아 올라왔고, 이후로는 기절한 모양이었다.

“둑스, 둑스! 혹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

-시간 말이냐? 컁, 1시간 반쯤 지났을 거다…… 괜찮은 것이냐?!

“응, 일단은. 움직일만해.”

내가 사라졌으니, 함께 따라 나온 친위대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일단 어떻게든 그들과 합류해야…….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경고! 경고! 비상상황 감지! 진행 중인 퀘스트를 강제 열람합니다!]

[퀘스트(서브) - ‘네가 미쳐가는 소리가 들려!’

‘남자주인공(북부대공)’의 최종 발작이 시작되었습니다!

제한 시간 내에 막지 못하면 배드엔딩을 맞이합니다!

제한 시간: 1시간]

……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최종 폭주라니? 왜?’

혹시 내가 습격을 받은 걸 알게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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