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75)
돔 안에서 마법사들이 만든 사슬과 휴고가 팽팽한 대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도 곧 한계인 것 같았다. 가장 뒤쪽에 있던 마법사 하나가 콜록 기침을 토하며 피를 토했다.
“젠장, 증원은 아직인가!”
“주변 영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국경에 있는 특무대도 달려오고 있습니다!”
나는 마구 소리치는 기사들 사이에서 익히 얼굴을 본 특무대 총대장과 2대대 대장을 보았다.
제타르 경만큼은 아니지만 자주 보던 얼굴이었다.
“단장, 마법사들은 더는 버티지 못하네! 길어야, 큽, 3분이야!”
“영주성에서 대마물 포획 도구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마법사 중에서는 익숙한 얼굴인 라바가 콜록 기침을 외치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
라바 또한 한계인지, 병사 둘이 라바를 부축하고 있었다.
“……전하…….”
라바는 착잡하고도 절망 어린 얼굴로 앞을 응시했다. 곧 사람들을 돌아보는 라바의 얼굴로 결심이 스쳤다.
“3분이 지나기 전에 모두 물러가시오.”
“마법단장님?”
“이 몸이 희생해서 시간을 좀 더 벌어보겠소! 그 사이에 황실이든 어디든 연락하시오!”
“하지만……!”
“이대로는 모두가 죽소! 젠장, 우리만 아니라 영주민들도 죽어! 전하가 이대로 모두 살해하게 둘 셈이오?! 전하가 계시지 않은 지금 당신이 총사령관이오. 결단을 내리시오!”
“……알겠습니다.”
라바가 신호하자, 특무단 총대장이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모든 기사들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고 이를 악물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들의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였다.
“라바, 당신이 희생하지 않아도 돼요.”
대공님을 상대하는 데 얼마큼의 거대한 힘이 필요한 걸까. 눈을 깔아서 손을 내려다봤다.
첫 번째 이야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짧게 결심을 마쳤다.
“예, 예비 대공비님……?”
“예비 대공비님! 오 둑스시여! 사, 살아계셨습니까?!”
“아, 아가씨!”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이 사람들눈에 경악과 반가움이 스쳤다. 그러나 이는 잠시였다. 모두가 나서서 나를 뒤로 이끌려 했다.
나는 그들을 저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대공님을 막을 거예요.”
고개를 돌린 난 라바를 향해 말했다.
“특무대 총단장님은 이대로 돌아서서 민간인 대피를 도와주세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네?”
“제가 막는다고 했어요.”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고개를 홱 돌렸다.
“라바, 죄송하지만 이 근처에 결계를 펼쳐줄 수 있나요? 안쪽으로 사람이 들어오지 않기만 하면 돼요.”
“……아마 남은 힘을 합하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여기서 대공님을 막을 수 있는 동시에 제정신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유일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그런 희망이라도 있는 사람은요.”
“…….”
난 들고 있던 검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스킬 ‘소환(lv.1)’가 활성화됩니다!]
[스킬 ‘빙의(lv.5)’가 활성화됩니다!]
“라바, 당신이 희생하는 건 내가 죽고 난 뒤에 미뤄도 늦지 않아요.”
“…….”
“뭐해요? 다들 얼른 움직여요. 많은 사람을 죽게 둘 수는 없잖아요!”
[소환 대상 ‘신 둑스’ (S급 영혼)의 힘을 받아들였어요!]
[5분간 사용 가능합니다! ※남은 시간: 04:58]
주춤하면서 어떻게든 나를 말리려는 이가 있었다. 친위대였다.
그러나 내 검에서 주황빛 빛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오자, 모두 멈칫했다.
내 주변으로 둘러싸인, 대공님에 필적하진 못하지만 무시무시한 기운을 이들도 느꼈을 테니까.
“……예비 대공비님께 둑스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단, 위험하시면 부디 몸을 피하십시오. 제가 전하라면…… 이렇게 살아돌아오신 예비 대공비님을 해치고 싶지 않을 겁니다.”
“…….”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 할걸요. 아무래도 나는 당신들과 운명공동체가 되었을 테니까요.
‘여기서 대공님을 막지 못하면 나도 같이 죽는 거지 뭐.’
단순히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결국 중요한 건 하나다. 어떻게든 막아내야만 한다.
“알았어요, 가요.”
마침내 대공님을 둘러싸고 있는 빛의 사슬이 사라졌다.
대공님 주변을 둘러싼 인원은 한발 앞서 사람들에게 달려간지 오래였다.
이 드넓은 공간에 남은 인원은 단둘뿐.
치지지직-!
새하얀 막이 넓은 반경을 막아서듯 나타났다. 라바가 펼친 결계였다.
‘둑스, 저 결계 위로 네 결계도 쳐줄 수 있어?’
-가능하다, 컁!
곧 막 위로 주홍빛이 함께 돌았다. 나는 이 빛을 보기도 전에 얼른 묵직한 기운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팔이 휙 위로 올라갔다.
콰앙!
“……끕.”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속도였다.
‘……엠버넷씨부터 불렀으면 못 버텼겠는데.’
힘의 총량이 달랐다. 최종 폭주 중인 이 대공님은, 차라리 짐승이 아닌가 싶을 만큼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뚝뚝.
또한 그의 첫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비꼈다.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검과 검이 마주한 채 끼긱끼긱 팽팽한 대치를 이뤘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휴고.”
나는 검을 맞댄 상대를 보았다.
둑스의 힘을 빌린 지금, 보통 인간과는 전혀 다른 근력을 가지게 됐음에도 다소 버겁게 느껴지는 검을 맞댄 상대를.
“내가 죽었다고 오해했나요? 그래서 이렇게 미친 거예요?”
“…….”
대공님은 흡사 짐승이라도 된 듯 사람이 아닌 것의 으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허리를 베인 상처가 아파서는 아니었다.
“……이렇게 울 거면서. 왜 그랬어요.”
“…….”
대공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정신이 돌아와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그저 초점이 사라진 눈에서 본능적인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대공님의 본심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사실 아무것도 해치고 싶지 않은 거지?
카앙!
스킬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5분이 흐르자, 내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스킬 시간이 초과되면서 건강 수치를 소모한다는 메시지도 본 뒤였다.
‘이대로는 안돼.’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둑스의 힘은 짐승처럼 빠르고 강하게 움직이게 해주지만 검술 활용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찰나의 휴식 동안 나는 결정했다.
[‘나만의 로판’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스킬 ‘빙의(lv.5)’와 연계됩니다!]
[황제 ‘로아타’의 힘을 받아들였어요!]
[경고! 현재 빙의자님이 받아들일 수 없는 힘입니다!]
[스킬 지속을 위해 건강 수치를 소모합니다! 현재 건강 수치: 88]
래빗의 힘이 내게 깃든 순간. 처음 깃들던 때처럼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활기가 차올랐다. 몸은 금방 뜨거워졌다.
온몸이 욱신욱신 아팠지만 그때보다 건강 수치가 더 많은 탓일까? 견딜 만해졌다.
‘오래 끌 수는 없어.’
곧 눈앞이 핑글핑글 돌며, 숨이 가빠질 것이다. 건강 수치는 미친 듯이 빠르게 떨어졌다.
더는 요정의 창을 보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보여.’
둑스의 힘을 썼을 때는 그저 본능적으로 막아내기 급급했다면, 이제는 검술의 활로가 보인다.
대공님은 놀랍게도 폭주로 미친 상태에서도 본인이 쓰던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킬 지속을 위해 건강 수치를 소모합니다! 현재 건강 수치: 60]
카앙!
검과 검이 마치 두 마리의 뱀처럼 엉켰다 풀어졌다를 반복했다.
내 몸에 쌓인 생채기만큼이나 대공님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느려졌다.
‘……됐다!’
[스킬 지속을 위해 건강 수치를 소모합니다! 현재 건강 수치: 30]
눈앞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처음 이 힘을 사용할 때보다 사용 시간이 늘었지만 이것도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대로 대공님의 힘이 완전히 빠지면 이대로 제압하자. 제압해서, 대화를.
대화를…….
푸욱!
“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순간, 이미 뱃속으로 살벌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인간!
둑스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울컥, 목으로 무언가 역류했다. 뱉어내선 안돼. 참아야 해.
그러나 역류한 것이 멋대로 움직여 입술 아래로 흘러내렸다.
나는 손으로 허리를 꾹 눌렀다. 울컥울컥. 피가 솟았다.
몸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래빗에게 빌린 힘이 마치 래빗이 분노하기라도 하듯 눈앞의 휴고를 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 안돼.’
마지막 순간, 난 모든 힘을 쥐어짜 필사적으로 공격의 방향을 틀었다.
움직이지 않았다면 휴고의 심장을 노렸을 공격이었다.
동시에 힘을 마구 흩어내고 거둬들여 겨우 휴고의 허벅지에 검이 꽂히도록 했다.
“하아, 하아…….”
내가 내 손으로 휴고를 죽일 순 없어.
이 모든 건 그가 잘못한 게 아니니까.
“괘, 괜찮아요……. 괜찮아, 휴…고…….”
“…….”
“당신…… 잘못이…… 아니야.”
다리를 다쳤으니 이제 정상적인 속도로 움직일 수는 없겠지. 여기서 힘만 더 빠지면 쓰러질 것 같은데……. 그러면 대기하던 마법사들이 묶어서, 그래서…….
‘아, 눈이 조금 감겨.’
안돼. 안돼. 이러면 안되지. 고지가 눈앞이잖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휴고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킬 지속을 위해 건강 수치를 소모합니다! 현재 건강 수치: 10]
난 손을 뻗어 그의 뺨에 얹었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허리에서 뜨끈한 고통이 계속 느껴졌다.
“눈, 떠요……. 이곳은, 당신이 사랑한…… 곳이잖아.”
“…….”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해요…….”
나는 작게 웃었다. 드디어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보는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탁해진 안개가 걷히고, 또 걷히고, 마침내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홍옥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뺨으로 멈췄던 눈물이 흐른다.
메마르던 뺨이 서서히 눈물로 적셔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