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76)
“나, 난…….”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탓하지 말아요.”
“나, 나는, 여, 영애.”
“당신이 폭주한 순간, 한 모든 행동은…… 당신이 한 게, 아니에요. 그 못된 폭주가 일으킨, 착오일 뿐이야…….”
눈동자가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몹시도 불안해 보였다.
내 어깨를 붙잡았지만 차마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온몸을 덜덜 떨었다. 나는 다른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나, 나 봐요.”
“여, 영애, 나는 다,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세상은 더는 가치가 없다고.”
“알아요. 괜찮아요. 그리고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예요.”
“나, 난! 아버지의 말이 옳았던 것인지도 몰라요, 처, 처음부터 살아있으면 안 됐던 거야…….”
“세상에 살아있으면 안 될 사람은 없어요.”
떨리던 눈이 가까스로 나를 향했다.
붉은 눈동자로 내 모습이 비쳤다. 엉망이 된 모습이.
“……다, 당신을 또 잃는 건가요?”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여기서 당신이 더 미치지 않으면요.”
굵은 눈물이 내 손을 타고 흘렀다. 고요해진 세상, 마치 이 세상에 이 남자와 둘만 남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휴고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마주했을 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의 끝과 같은 폐허에서 아름다운 남자가 서럽게 울며 용서를 구했다.
나는 모든 게 이 사람의 탓이 아니란 걸 알았다. 누군가의 유희로 만들어진 광증이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든 것뿐이니까.
휴고가 내 손을 잡았다. 얼굴이 차차 가까워지며 그가 눈을 감았다.
곧 입술로 메마르고 푹신한 감촉이 닿았다.
그의 커다란 손은 이 차가운 땅에서 몹시도 따뜻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어라라.’
어느새 스킬은 종료된 지 오래였다. 욱신욱신한 고통이 몸을 지배했지만 이 감촉을 모를 수는 없었다.
입술 위에 입술이라니…….
‘아무리 이 남자가 취향이라지만, 날 엄청 좋아한다지만 이래도 되는 거야?’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기분 좋은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 잠깐은, 잠깐 정도는 즐겨보자.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 지금까지 너무 고생했잖아.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상태 이상 ‘극도의 쇠약증’에 돌입합니다! ゜・.(iДi)。:゚]
[스킬 ‘몸에 나쁜 건 날아가라!(lv.1)’가 활성화됩니다! 상태 이상을 제거합니다.]
[랜덤 확률을 피해갑니다! 모든 패시브 스킬이 유지됩니다!]
폭주는 끝났고, 대공님도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면 된다. 여기서 있던 일은 할 수만 있다면 좋은 추억으로 생각하면서…….
그러나 예기치 못한 불행은 언제나 희망의 맞은편에 있다고 하던가.
입술이 떨어지고 눈물을 머금은 얼굴과 마주 미소하는 순간이었다.
“하아, 하아……. 크으윽!”
“휴고?!”
휴고의 커다란 몸이 스르륵 쓰러진다. 이미 스킬이 종료된 뒤라 나는 형편없이 함께 무너졌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휴고? 휴고! 휴고! 정신 차려봐요, 휴고!”
왜지? 뭐야, 뭔데. 모든 게 끝난 거 아니었어? 폭주는 끝났잖아!
이 남자 상태가 왜 이런 건데?
‘……잠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퀘스트 종료 알람이 뜨지 않는 거지?”
마구 주변을 보았다. 언제나 귀찮게 뜨던 요정의 창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떻게 된 건데?
‘요정! 요정! 뭐야, 뭐냐고!’
품 안에 있는 휴고의 체온이 몹시도 뜨거웠다. 동시의 그의 숨이 점차 미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겁이 덜컥 났다.
“둑스! 둑스! 어딨어! 둑스!
-인간. 난 여기 있다.
“두, 둑스! 이거 봐, 이상해. 대공님이…… 휴고가 왜 눈을 못 떠? 그냥 쓰러진 거야? 그런 거지?”
나는 불안을 애써 참으며 마구 물었다. 내 옆에 둥실 떠 있는 아기 여우가 처음 보는 슬픈 얼굴을 했다.
덜컹, 불안이 어렸다.
-인간, 지금 안고 있는 인간은…… 조금 전 폭주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생명력을 소모했다.
“……뭐?”
-이젠 길어야 몇 분 생존한 뒤 죽을 거다.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명료한 시선으로 돌아와 내게 용서를 구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다니?
얼떨떨했다.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퀘스트 결과를 정산 중이에요…….]
[퀘스트(서브) - ‘네가 미쳐가는 소리가 들려!’ 가 완료되었습니다!]
[특별 보상! 상황의 난이도와 특수성을 고려하여 빙의자님은 메인 퀘스트의 마지막 지령 일부를 스킵할 수 있게 되었어요.]
[빙의자님이 대사 하나를 외치는 순간 퀘스트(메인) - ‘북부 대공 프로듀스! 계약 결혼을 완수하라!’가 종료됩니다.
대사: ‘계약이 끝났으나 난 가겠어요’]
나는 눈앞에 떠오른 창을 멍하니 보았다.
‘내가…… 간다고 외치기만 하면, 메인 퀘스트가 끝난다고?’
더럽게 구르고 구른 보상을 이제야 받는 걸까? 대사 하나만 말하면 메인 퀘스트가 끝나고 나는 다시 유예기간을 얻는다. 또 성공하고 생존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요정의 창을 노려본 채로 고개를 돌렸다.
“둑스, 둑스! 휴고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돼? 마법사? 마법사를 데려올까?”
-……소용없다. 법칙을 뒤트는 인간들의 마법으로도 생명력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인간.
그 순간이었다. 품안에서 휴고가 거칠게 기침을 하더니 스르륵 눈을 떴다.
커다란 손이 땅을 더듬더니, 이내 내 손을 잡았다.
“쿨럭, 쿨럭! 괘, 괜찮아요…… 영애. 내가 이대로 죽더라도, 하아, 이 땅은 다른 주인을 찾을, 거예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속터지는 소릴 할 거면 그 입 다물고 있어요!”
그러자 휴고가 수줍게 웃었다.
“당신이, 이렇게 평범하게, 내게 화를 내주고, 바라는 걸 말해주고, 이런 일상이 이어지면, 참 좋았을 텐데요……. 미안해요, 영애. 내, 고집으로, 이곳에 데려와서.”
“…….”
“죄송해요, 당신이, 이곳의 추위에, 힘들어 하는 거, 알고 있는데, 돌려보내지 않아서.”
“…….”
“그래도 이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네요, 나는…….”
휴고가 예쁘게 웃었다.
“그대 품에서 죽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스르륵 감기는 눈을 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누구 멋대로 작별 인사야?
나는 이 이야기를 원래대로, 원작대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그 어떤 때보다 간절하게 바랐다.
남자주인공이 죽는 이야기 따윈 보고 싶지 않아!
“둑스, 부탁이야. 뭔가 방법이 없을까? 넌 신이잖아. 제발, 방법을 알려줘. 내가 뭐든 할테니까!”
-……인간, 너는 내 땅을 살려줬어.
둑스가 시무룩하게 귀를 아래로 내렸다.
-방법은 있어.
“……있다고?”
-그래, 하지만 이 몸에게 힘든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컁.
“……그게 뭔데? 위험해지는 거야? 뭐든 말해! 응? 내가 책임질게!”
아기 여우가 고개를 저었다.
-약해졌다지만 이 몸은 이 땅을 수호하는 주인, 은혜는 갚아 마땅해. 컁. 그러니…….
둑스가 구슬프게 컁 울었다.
-친구랑 닮은 인간이랑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컁.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아기 여우가 까만 코를 대공의 뺨에 톡 가져다 댔다.
곧 눈부신 빛이 터져나왔다.
-인간, 이 몸은 남은 힘을 모두 소모했다. 이제 영원히 분수대에 봉인 될 것이다. 이게 마지막이야.
“뭐? 둑스, 잠깐, 잠깐만 나는 이런 걸 바란 게……!”
-이 인간은 살아날 거다, 달린 네가 바라는 아무도 죽지 않는 결말이다, 컁.
그걸 어떻게.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이 몸은 이래봬도 신이다 컁, 네가 바라는 것쯤은 읽을 수 있었다.
주홍빛이 더욱 커지며 차가워지던 휴고의 몸이 따뜻해졌다. 나는 갑작스러운 이별에 입만 멍하니 벌렸다.
-인간, 짧은 유희였지만 즐거웠다. 행복해라, 컁.
아기 여우가 울망울망한 눈으로 내게 안겼다.
-네 앞길을 축복해, 컁.
잠깐, 잠깐! 내가 여우를 안는 순간 빛은 사라졌다.
내 품은 텅 비어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결말을 앞둔 채로, 나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를 찾으러 온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들이닥칠 때까지.
* * *
“과몰입?”
졸린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눈앞에서 친한 친구가 감자칩을 씹으며 끄덕였다.
“그래, 그거 들어봤냐. 딱 네 증세던데.”
“내가 뭐.”
이렇게 말하는 내 눈시울은 촉촉했고 눈두덩이는 빨개져 있었다.
아씨, 너무 재밌는 소설을 읽었는데 중간에 이런 눈물 버튼이 있을 게 뭐람.
나는 슬픈 내용에서 여지없이 눈물을 터트려주는 성실한 독자였다.
작가님들에겐 참 뿌듯한 독자인 거라고. 과몰입은 무슨.
“야야, 너 3일째 그거 읽으면서 울고 있잖아. 그렇게 슬퍼?”
“시끄러워. 사람이 책 보다 좀 울 수도 있지.”
“너 예전에 술먹고 엉엉 울기도 했잖아. 왜 최애를 죽였냐며.”
뭐야, 그것도 좀 몰입하면 그럴 수도 있지. 친구가 내 말을 듣고 깔깔 웃었다.
“그래 뭐,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과몰입이 어때서? 좋아하는 캐릭터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당연하지.”
“오, 인정하는 거야?”
“그래, 인정한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친구의 관심이 덩달아 쫓아왔다.
내가 지금은 뭘 읽고 있었더라……. 아.
「대공님, 우리 계약해요!」 이거네.
여기 나오는 인물들도 완전 내 취향이었지?
“그래. 슬픈 것보다는 해피 엔딩이 최고지. 캐릭터가 죽는 건 별로야.”
“오, 전국에 있는 새드엔딩 소설한테 사과해야 할 소신 발언.”
“조용히 해.”
나는 핸드폰을 놓고 기지개를 켰다. 어쩐지 몸이 너무 찌뿌둥한 느낌이네.
마치 여기저기 얻어맞은 것처럼.
“좋아하는 캐릭터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건 당연하지. 난 그걸 보고 싶어서 소설을 읽는 거야.”
“그럼 넌 만약 소설 속 세계로 가면 결과를 바꿔서라도 행복하게 해줄 거야?”
“뭐…….”
나는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주 좋아했던 인물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 순간 손으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만 돌아와주시면 안될까요, 영애.”
수심이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달린!”
그리운 래빗의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