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2. 비혼주의 여주와 북부 대공의 비밀 (77)
천천히 눈을 뜨자, 눈부신 빛이 앞을 가렸다.
흐릿한 시야로 색색의 머리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으으, 온몸이 쑤시네. 삭신이야…….’
흐릿한 시야를 가까스로 찡그려 초점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나.
첫 번째 메인 퀘스트를 마무리했을 즈음에도 기절하고 나서 이렇게 눈을 떴었는데.
그때는 눈앞에 내 귀여운 황녀님이 울먹울먹한 얼굴로…….
“달린! 일오났느냐?!”
그래, 이렇게. 응?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래빗? 래빗이 여기 있다고?
고개를 들려다 말고 고통에 끄응 신음을 흘렸다.
곧 요정의 창이 떠오르며 내가 지금 느끼는 후유증의 이름을 나타냈다. ‘몸살’, 생각보다 그리 큰 후유증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과도한 스킬 사용으로 인한 ‘상태 이상’은 스킬 ‘몸에 나쁜 건 날아가라!’로 다 사라진 거 아니었어?
[건강 수치가 올라가질 않아서 새로운 ‘상태 이상’이 생겼어요, 휴식하면 사라집니다! (❁´▽`❁)*✲゚*]
생각하는 동시에 요정의 창이 떠올랐는데, 어쩐지 묘하게 친절하게 느껴지는 문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래빗, 황녀님?”
눈 앞에는 정말로 래빗이 있었다.
다만, 래빗의 실체가 아니라 반쯤 홀로그램 같은 상태였다.
래빗의 발 아래에 자그만 수정구슬이 있었고, 여기에서 흘러나온 빛이 래빗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 나댜!”
“어…….”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리면, 아스와 린, 제타르 경이 보였다.
아스와 린은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고, 특히나 린은 얼마나 운 건지 눈두덩이가 탱탱 부어 있다.
“흡, 흐흡, 예비 대공비님…… 깨어나셨군요.”
“다행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스 뒤에 서 있는 제타르 경은 부상이 심한지, 팔엔 부목을 대고 움직일 수 없게 천까지 감아두었다. 그의 눈시울도 굉장히 붉어져서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기색이었다.
“어…… 다들 울지 말아요. 나, 괜찮은데…….”
곧 아스와 린, 제타르 경이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내가 눈을 뜨면 이렇게 하기로 정해진 것처럼.
그리고 그제야 나는 방 저 멀리 홀로 외로이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휴고였다.
‘음, 자는 도중에 휴고의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나?’
어째서인지 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하더니, 그대로 시선을 돌린다.
‘시선을 피하다니…….’
수줍어할 때가 아니면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놀랐다. 그러나 내가 그를 부르자, 그는 주춤하면서도 조금씩 다가왔다.
마치 묶여 있던 어린 그를 보았을 때와 같이,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 같은 몸짓이었다.
마침내 어색하게 다가온 그가 세 걸음 정도를 앞두고 멈춰섰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
대공이 대답이 없자, 홀로그램으로 된 래빗이 입술을 내밀었다.
“대공 답 안 하냐? 몰 이제와소 내외하눈 고냐? 대공, 그로케 안 보였눈데 아듀 웃기눈 사람이네.”
“…….”
래빗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럼 황녀님이 설명 좀 해주실래요?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래빗이 휴고 쪽을 흘끗 보더니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빠르게 묵직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제가 설명…… 드릴게요.”
휴고가 무겁게 입을 떼더니, 이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가까이서 보고서야, 나는 휴고의 얼굴이 생각보다 더 엉망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눈물을 흘린 건지, 눈 밑이 새빨갛다 못해 짓눌린 상태였다.
그의 설명인즉 이러했다.
휴고가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고. 머지않아 기사들과 병사들이 달려왔지만 내 숨이 너무나 미약한 상태였다고 한다.
동원될 수 있는 모든 마법사가 동원되어 치료마법을 준비했지만 좀처럼 내 상태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으음, 건강 수치가 정말 바닥까지 떨어졌나 보네.’
그 순간 내 숨이 아주 잠시지만 멎었다고 한다. 그런데 곧바로 다시 숨을 쉬었다고.
이 말을 하는 휴고는 절망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나는 거기서 짚이는 게 있었다.
‘스킬 ‘불굴의 의지’야.’
건강 수치가 0이 되었을 때, 다시 되살아나며 1시간 동안 건강 수치 1을 유지하는 스킬.
이 한시간 내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휴고는 즉시 황실에 연락을 취했고 바로 연락이 닿아 황실에서도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결국 황실 쪽에서 넘겨받은 도구와 북부의 마법사들이 모두 힘을 합쳐 내 숨이 붙어있다는 소리였다.
“이 몸이 많이 힘울 썼지.”
휴고가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래빗이 엣헴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슬쩍 웃음지었다.
“황실에 있울 때도 네가 크게 다친 적이 있옸지…… 그으, 아바, 아니 부친에게 말해소 어떻게든 해굘하려 애썼다.”
우리 황녀님은 아직 아빠를 아바마마라 부르는 것까진 어색한지 시선을 슬쩍 돌리며 호칭을 바꿨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래빗은 사실은 자신이 직접 북부에 오고 싶었는데 그건 어려웠다며 혀를 찼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데 말이지.
“그리고 롤린, 네 부친인 에스테 백작의 건강운 걱졍하지 않아도 된댜.”
“네? 정말요? 그래, 저희 아버지 건강은 어떠신데요? 나아지신 거예요?”
“그로타.”
나는 생각지도 못한 기쁜 소식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안도의 마음이 파도처럼 나를 뒤덮었다.
당장 멸망한다는 북부 영지와 대공님을 신경 쓰느라 돌아가면서도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요? 어떻게 아버지가 괜찮아지신 거예요?”
“으움, 그곤……. 내가 수댠과 방법울 가리지 않긴 했눈데.”
래빗이 휴고를 슬쩍 보며 라이칸을 언급했다. 래빗과 함께 라이칸이 함께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정말 애를 많이 썼다고.
“하디만 달린, 네 부친이 산 것도, 네가 산 것도 사실운 결정적우로 대마법사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댜.”
“대마법사요?”
홀로그램 속 래빗이 끄덕였다.
황실에는 그 어떤 부상도 치료할 수 있는 마법 도구가 하나 있는데, 이걸 내가 있는 북부로 전송하기 위해서는 대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래빗과 라이칸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웬일인지 평소 제멋대로인 대마법사가 수락했단다.
황실이 선뜻 대단한 마법 도구를 넘겨줬다는 사실에 고마웠고, 동시에 갑작스레 등장한 대마법사의 등장에선 조금 의아했다.
더군다나 부친의 상태에도 도움을 줬다니…….
“롤린, 네가 수도로 오면 한번 보쟈고 대마법사가 말했댜.”
“음, 네. 그 정도야 뭐. 제 쪽에선 감사를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나도 부친도 위기를 넘겼다고 하니까.
초상화로 한번 봤던 것 같은데, 밝은색 머리카락이었단 걸 제외하면 나머지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충 내 취향이었으니 날카롭게 생겼으려나?
‘라이칸이나 휴고나 너무 잘생긴 탓에 상대적으로 이제 다른 남자들은 거의 기억에 남질 않는단 말이지…….’
어쨌거나 모든 게 잘 해결됐기 때문일까, 나는 다소 느긋해졌다.
이러한 생각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세상 모든 우울을 짊어진 것 같은 남자가 있었다.
나는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네요, 휴고. 언제까지 그렇게 볼 거예요? 나 잘 살았잖아요.”
그 순간 그의 눈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래빗은 눈물을 뚝 떨어트리는 휴고의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리더니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나를 보면서 입을 뻐끔거린다.
아, 래빗은 그가 저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은 못 봤지?
“어, 움, 어, 다, 달린. 건강한 걸 봤우니 일단 오빠 그놈에게도 얼룬 알려야겠다. 지굼 대마법사와 함께 에스테 백작 저에 있거든. 다시 연락해랴.”
래빗이 평소와는 다르게 슬쩍 말이 빨라졌다.
“으움, 더 통화하고 싶지먄, 시간이 얼마 안 남아써. 이 구술은 마력이 마니 들어서 이제소야 쓰는 고니까 간댠하게 해야한다.”
“아, 네! 라이칸 황자님께도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물론, 저도 직접 인사드릴 거지만요.”
“구래! 알게따! 그럼!”
래빗은 얼른 수도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서는 사라졌다.
통신이 끊어진 듯 구슬에서는 더는 빛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고요해진 방안에서 다시금 휴고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참으려는 듯 눈가가 빨개진 채로 어떻게든 나를 외면하려는 남자를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에스테 저택에서 그의 청혼을 받던 날, 내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한 채 수줍어하던 얼굴과는 정 반대의 얼굴이었으니까.
이도 잠시, 나는 살며시 미소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휴고.”
어쩌다 보니 이곳에 머문 날이 예상 이상으로 길어졌다. 의도치 않게 북부의 수많은 사람과도 얽히게 됐다.
이뿐일까, 눈앞의 남자의 어린 시절을 직접 마주했지.
이젠 이 남자를 이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랑은 아니지만, 정이 든 걸 거다.
“왜 사람을 옆에 두고 그렇게 외롭고 서럽게 울고 계세요.”
“…….”
책 속에서 보았을 땐 외로움조차 타지 않을 것 같던 남자주인공은, 실제로는 깊은 외로움을 그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견디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이란 걸 알면서도 북부의 위기 앞에서 언제든 검과 방패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이젠 잘 알았다.
“그냥 계실 거예요?”
“…….”
“저, 팔 아픈데.”
그제야 고개를 돌린 휴고가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이내 내게 다가왔다.
안아줄 것처럼 손을 뻗자 내 품 속으로 거대한 몸이 폭 들어왔다. 그의 너무 커다란 덩치 때문에 안는 것보다 내가 안긴 형국이 됐다.
나는 커다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이젠 다 괜찮아요. 그리고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예요.”
“……영애.”
“네. 휴고. 당신은 앞으로 광증을 앓지 않을 거예요. 폭주도 하지 않을 거고요.”
“…….”
휴고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의 침묵을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더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나를 감싸안았다.
“……흡사 작별인사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