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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64화 (164/281)

◈164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3)

다른 얘기, 다른 얘기를 하자. 나는 얼른 머리를 굴렸다.

“그, 혹시 황자님, 제 아버지의 상태는 괜찮아지셨나요? 황녀님께 모두 들었지만 예후도 괜찮으신가 싶어서요.”

“아, 에스테 백작은 건강하다. 그대가 걱정할 일은 전혀 없을 거야.”

다행스럽게도 대화의 주제는 어렵지 않게 넘어갔다. 거기다 줄곧 궁금했던 부분이기도 했었다.

부친이 제대로 해독과 치료를 받은 뒤에도 다른 문제 없이 건강하다니, 무척이나 다행이었다.

“나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조심스러운 질문이라 그대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서 대답을 듣고 싶군. 질문을 듣고 대답하기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

“앗, 네. 편히 여쭤주세요.”

“그대의 집안에는 본디 병을 앓은 이들이 많았나?”

“음…….”

내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빙의자인 나는 에스테 가문에 대해 그렇게까지 잘 알지는 못하니 말이다.

“우선 저희 할아버지 대까지는 다들 건강하셨다고 들었어요. 아버지도 건강한 분이셨고 그래서 이번에 소식을 듣고 더욱 놀랐거든요…….”

부친인 에스테 백작은 과거, ‘달린’이 불치병으로 앓아 누워 생사를 오가는 동안 대륙 전역의 의사를 데려오고 직접 발로 뛰기도 할 때조차도 건강했던 사람이었다.

“저도 저택에 도착하면 어떻게 된 건지 꼭 물어보려고요. 혹시나 또 아프시면 안되니까요…….”

“……영애의 병은 완치된 건가?”

“일단은, 그렇다고 알고 있어요. 더는 아프지도 않고요.”

“……정말로 아프지 않은 게 맞나?”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라이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더니 다소 뚱한 표정을 했다.

뚱하다니, 늘 까칠함과 날카로움이 기본인 이 남자에겐 조금 생소한 느낌이었다.

‘휴고를 너무 오래 봐서 시무룩한 얼굴의 잔상이 남았나.’

이리 생각하는데 라이칸이 툭 뱉었다.

“그런데 왜 난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건가?”

“예?”

“……대, 대공과는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해진 건가?”

“……?”

”아니, 아니. 이 질문은 못 들은 걸로 해주겠나!”

빠르게 이어진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벌렸다.

라이칸은 고개를 좌로 슬쩍 돌렸지만 눈만 굴려서 나를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 나는 그의 귀가 발긋 물드는 것을 보았다.

엄마야, 이게 뭐죠.

‘……절경이네요.’

내가 황홀해 하는 사이, 라이칸은 저 큰 어깨를 움찔하더니 눈을 굴렸다.

“…대답은 하지 않는 건가?”

“아.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지금 황자님, 아니. 라이칸 님의 귀가요. 엄청…….”

“그건 언급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군, 내 상태는 잘 알겠으니까.”

“어엄, 네. 아무튼 라이칸 님.”

나는 눈을 굴렸다.

“……그대, 곧 약혼식을 한다고 들었는데, 수도에서 치를 예정인가?”

아, 맞다. 그게 있었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으음, 그게 말이죠. 황자님. 황자님께 가장 처음 이야기 드리지만 저 파혼하기로 했어요.”

“그래, 역시 수도에서…… 뭐?”

“파혼이요.”

나는 쓰게 미소했다.

“휴고, 아니 대공님과 원만한 합의 끝에 파혼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수도로 올라가면, 다시 북부로 가지 않아요.”

“…….”

라이칸이 곧바로 무언가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라이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고개를 아예 돌려버리더니 한동안 돌이 된 것처럼 굳은 얼굴로 마차 벽을 응시했다.

한참이 시간이 흘렀을 때야 그는 겨우 ‘그런가…….’ 하고 대답했다.

라이칸이 대뜸 자신의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영애, 나는 누군가의 안타깝고 불행한 일에서 희망과 희열을 느끼는 음침하고 저열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은데…….”

“네? 어…….”

나는 딱히 불행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리 느낀다고 한들 음침하고 저열하다고도 생각 안 하는데요…….

‘하긴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경험상 여기서 뭔가 말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라이칸은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있다가, 홀로 한숨을 쉬기도 하고 얼굴이 울긋불긋해지기도 했다.

“그럼 나 또한 이제 영애의 이름을 불러도 되는 건가?”

마침내 라이칸이 입을 연 건, 우리가 포탈을 타기 위해 옆 도시에 도착했을 때였다.

“……내게도 그런 기회를 주면 좋겠는데.”

정말 부끄러운 말을 하는 것처럼 귀와 목을 벌겋게 물들이면서.

* * *

수도, 에스테 저택.

에스테 가문의 저택은 수도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에스테 가문이 번성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현재는 그때만 못한 위치로 떨어졌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 원인이 나였으니, 볼 때마다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한단 말이지.’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재산을 쓰느라 거처를 옮긴 거니 말이다.

물론 가족들 중 누구도 그런 티는 내지 않지만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할까.

오랜만에 보는 저택은 고작 한 달여 만에 보는 것임에도 한 1년은 보지 못했던 것처럼 반가웠다.

‘정말 집에 돌아온 기분이네.’

나는 얼른 뒤로 돌아섰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라이칸 황자님.”

라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과 얼른 시간을 보내라며, 저택 앞까지만 에스코트 해주었다.

사실 조금 전 황성에서 다시 만난 래빗이 반갑긴 했지만, 내 친구와의 대화를 잠시 미룰 만큼 부친의 건강과 안부가 궁금했다.

“그럼 다시 뵐게요.”

“다시.”

“네? 네. 이제 수도로 돌아왔으니, 래빗 황녀님을 만나러 갈 테니까요. 라이칸 황자님은 래빗 황녀님과 자주 함께 계시니 또 뵙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된다라.”

라이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손을 잡았다. 조금 간지러운 감촉이 손등을 스칠 듯 말 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렇게 라이칸이 돌아가고, 나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 정문을 막 들어섰을 때,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을 맞이했다.

오빠인 파올로였다.

“어, 뭐야. 달린? 진짜 달린 너냐?”

“오빠.”

나는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었다. 계단에 있던 파올로가 한걸음에 달려와 내 손을 덥썩 잡았다.

“으앗, 뭐야, 뭐 하는 거야?”

“있어 봐, 무게 좀 재보자.”

“저기, 미쳤어? 무슨 무게를 이렇게 재!”

파올로가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 졸지에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난 파올로의 멱살을 꽉 쥐었다. 떨어질까 봐 무서웠으니까.

이 오라버니가 못 본 사이에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래?

“음, 전이랑 그렇게 차이가 나진 않네? 북부에서 잘 먹었나 봐?”

“먹는 거랑 자는 거랑 여러 가지 다 대공님이 잘 챙겨주셨어. 일단 좀 내려놓고 말해.”

“추위에 약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다행이다.”

나는 그제야 파올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 오빠는 커다란 덩치나 준수한 미모는 여전했지만…… 볼이 어쩐지 핼쑥했고 눈 밑에 거뭇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부친이 쓰러지고 나서 고생한 흔적이겠지. 난 절로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미안해,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 내가 멀리 있어서 와보지도 못하고.”

“무슨 그런 얘길 하냐. 네가 바로 여기로 오려 했단 거 알아, 황녀님이 말씀해주셨으니까.”

파올로가 나를 내려놓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너야말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나는 파올로를 물끄러미 보았다.

나랑 비슷한 느낌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르게 생긴 내 오빠. 부친이 쓰러진 동안에 가장 노릇을 했을 사람.

보고 있으려니 몽글몽글한 감정이 샘솟았다. 그리고 정말로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도 함께.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어머니랑 아버지께 인사드리자. 어머니도 네 걱정에 밤잠을 잘 못 이루셨어.”

“정말? 편지는 자주 했잖아.”

“편지로 걱정이 사라지겠냐. 아버지도 쓰러지기 전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파올로가 함께 계단을 오르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더니 크흠흠, 헛기침을 하며 뺨을 슬쩍 붉혔다.

“그, 트리샤 영애도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꼭 연락해.”

“아, 리제? 근데 리제 얘기를 하는데 얼굴은 왜 붉혀? 왜, 나 없는 사이에 우리 집안에 약혼한 사람이 하나 더 생긴 거야?”

내 평온한 말에 파올로가 계단을 오르다 말고 펄쩍 뛰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서. 아니긴 무슨. 아닌 게 더 이상하다, 이 오빠야.

“난 오빠가 있어서 리제는 덜 걱정했는데. 그거랑 별개로 엄청 보고 싶었지만 말이야.”

북부 영지에서 퀘스트가 워낙 다사다난하고, 정신없이 일이 돌아간 까닭에 리제에게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게 참 미안했다…….

정작 리제가 줬던 정보는 아주 알차게 써먹었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대체 리제는 북부의 기밀에 가까운 사항들까지 어떻게 알아낸 거야?’

* * *

“오, 달린! 달린,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내 아가니?”

“달린! 세상에, 내 딸!”

잠시 뒤, 나는 부친의 침실에서 부친과 함께 모친까지 함께 만나 오랜만의 회포를 풀었다. 약 한 달여 만에 만나는 거였지만, 부모님은 흡사 몇 년은 보지 못했던 것처럼 나를 반겼다.

다행스럽게도 라이칸의 말처럼 부친의 증세는 완전히 나아졌고, 그저 예후를 지켜보기 위해 침실에 좀 더 누워있는 거라고 했다.

‘……하아, 진짜 다행이네. 황실도 그렇고 도와줬다던 대마법사에겐 반드시 꼭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해야겠는걸.’

이렇게 가족들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나니, 새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서 정돈되는 기분이었다.

우선은 그 대마법사와 만나서 그 사람이 정말 세 번째나 혹은 네 번째 이야기와 관련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자.

그리고 설사 원작 주연이 아니라고 해도 대마법사나 되는 사람이니, ‘요정’에 대해서라거나 여러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좀 물어볼 생각이었다.

‘뭐가 됐든 뭐라도 얻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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