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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65화 (165/281)

◈165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4)

그렇게 결심하고, 그 날 저녁.

사실 이 대마법사를 만나는 일 이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족들에게 북부에서 있었던 일과 앞으로의 예정을 밝히는 일이었다.

“부모님, 그리고 오빠. 나 파혼했어요.”

“……뭐?”

파올로가 막 입에 머금었던 음료를 주르륵 뱉었다.

오, 나 저거 드라마에서 저런 장면 본 적 있는데. 태연하게 생각을 이어가며 부모님을 보았다.

부모님도 각자의 표정으로 놀람과 당혹을 드러낸 채였다.

“식사 중에 죄송한데, 꼭 해야 할 얘기였어요. 중요한 얘기니까요.”

파올로가 참지 못하고 쾅,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아이고, 놀라라.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혹시 휴고가 무슨 몹쓸 짓이라도 했냐며 소리쳤는데, 영 엉뚱하게 방향을 짚은 듯했다.

나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고개를 내젓고 평온하게 휴고와 미리 상의된 것들을 털어놓았다.

“성격 차이?”

북부에서 함께 지내보니, 성격 차이로 아무래도 부부의 연은 맺을 수 없을 듯하여 서로 정중한 협의 끝에 헤어지기로 했다고. 파혼에 합의 및 동의한 일이라고 말이다.

“환경적인 차이도 무시할 수가 없더라구요. 저 추위 많이 타잖아요.”

나는 거대한 설산을 떠올렸다.

정말로 추웠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 있는 동안 추위를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이게 더 대단한 거 아닐까. 북부 사람들은, 휴고는 내게 그런 걸 느낄 순간도 주지 않고 나를 챙겼으니까.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다만, 앞으로 그곳에 쭉 지낼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 말에 가족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다가온 파올로만이 여전히 의문을 품은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는 무어라 하는 대신에 그저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 * *

며칠 뒤.

“대마법사님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다고?”

나는 북부에서 돌아온 이후 한동안 방에 누워 축난 체력을 복구하고 쉬기 바빴다.

솔직히 말하면 좀 빈둥거렸다.

‘죽을 뻔하기도 했으니 이 정도 휴식은 당연한 거 아니야.’

스스로 이렇게 주장하면서 말이다.

요정이 세 번째 이야기나 찾으라고 독촉하면 이번에야말로 욕설을 바가지로 퍼부어주려고 했는데, 다행히 3일째 되는 날까지 요정이 별말 안 하더라.

래빗을 보러 갈까도 싶었는데, 래빗이 나더러 먼저 서신을 보내 며칠 푹 쉬고 만나자고 해줘서 더욱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도 있긴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파올로에게 대마법사에 대해 묻는 참이었다.

“그래, 언제든 찾아오라고 무슨 초청장 같은 거도 주고 가셨어. 이게 있어야, 그 뭐냐, 마탑에 마법사가 아니어도 들어갈 수 있다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파올로가 뒷목을 긁적이면서 설명했다.

마법사의 탑. 통칭 마탑은 허락된 마법사만이 드나들 수 있고, 일반인은 특별한 허가증이나 초청장이 필요하다고.

“아니면 연락만 주면 그, 대마법사님이 직접 찾아오시겠다던데.”

“……대체 왜?”

파올로가 나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그의 눈에 비친 내 얼굴에 의문이 가득 어려 있다. 그리고 파올로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의문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다. 아니, 황실이야 네가 황녀님과 아주 친한 까닭에 나서준 거라 이해해도 대마법사님은 대체 왜 나서신 거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거야 그분이 너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그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아, 설마 내게 반하기라도 하셨나? 이놈의 마성의 미모와 인기.”

“……동생아, 지금 뭐 하는 거냐?”

“그냥 한번 말해봤어. 아무래도 요즘 내가 인기 절정기인 것 같아서 말이야.”

파올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혈육의 개소리를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단 얼굴이다.

약간의 거북함도 비치는 걸 보니 이 오빠가 진짜 내 오빠긴 한 모양이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나도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난 그 대마법사님과 안면은커녕 어떤 인연도 없었는걸.”

“그건 그렇지. 아니면 혹시 아버지랑 네 병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아버지가 나와 같은 병으로 쓰러졌단 건 이미 북부에서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

그리고 대마법사는 학문적인 호기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하기야 호기심이 강했으니까 대마법사의 자리에도 오른 게 아닐까?’

이전에 첫 번째 이야기에서 만난 3황자 노아가 말하길, 마법이란 ‘탐구’하려는 자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어쨌거나 대마법사 쪽에서 직접 만남을 청한 참이니 만나보면 알게 될 테다.

어떤 사람인지, 도대체 왜 나와 우리 가문을 도와준 건지.

“일단 만나보면 되겠다.”

“어떡하려고? 대마법사님을 저택으로 부르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우리 가문에 귀한 걸음 해서 도와주셨는데, 감사 인사는 직접 찾아가야지.”

* * *

다음 날 오전.

나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오전을 맞이했다.

‘북부는 추워서 항상 조금 늦게 눈을 뜨곤 했는데.’

북부의 경우 날이 춥다 보니, 반대로 방은 무지하게 따뜻했다.

휴고를 포함해서 북부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 방 온도에 신경을 아주 많이 써준 덕이었다.

그 덕에 따뜻한 이불에서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던지, 오전 잠이 꽤 늘었다.

하지만 수도로 올라오고 보니, 날이 따뜻하다 못해 살짝 더운 감마저 있었고 절로 아침에 눈이 뜨였다고 할까.

‘이것도 일종의 시차 적응, 아니 환경 적응이라 시간이 걸리는 건가.’

내 방에는 조그만 구슬이 하나 놓여있었다.

이 구슬로 말할 것 같으면 래빗과 바로 통화할 수 있는 구슬이었는데, 래빗이 황성에 오지 않을 땐 이걸로 통화하자며 두고 간 것이었다.

구슬에서 불이 반짝거렸다.

곧이어 구슬 속에서 귀엽고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 모야? 일찍 일오난고냐?”

“네. 일찍 눈이 뜨였어요. 그나저나 황녀님은 제가 일어난 줄 모르고 연락하신 거예요? 제가 못 받았으면 어쩌시려고요.”

“나중에 또 하면 되지? 모가 문제냐.”

이 구슬은 현대의 핸드폰이랑 다르게, 상대가 통화를 요청할 때 빛만 반짝거리는지라 빛을 보지 못하면 통화를 못 했다.

“아직 이른 오전인데 왜 일찍 일어나셨어요?”

“롤린, 너눈 모르겠찌만, 원래 나이가 들묜 잠이 줄어둔다.”

“……황녀님 지금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았다는 거, 자각하고 계신 거죠?”

“내 영혼의 나이룰 말한 고다!”

“이번 생을 받아들이신다면서요!”

“모두 인정한 고지!”

우리는 잠시 구슬을 두고 투닥거렸다.

3살 황녀님이랑 싸우기엔 너무 유치한 주제였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던 투닥거림은 내가 항복을 하면서 멈췄다.

“……롤린, 얼룬 너랑 함께 놀고 싶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운 걸 참고 있어.”

“그, 음, 참으세요. 금방 돌아간다면서요? 왕국 사람들.”

그랬다. 현재 황성에는 왕국에서 온 사절단이 도착했는데, 황제가 그 자리에 래빗도 함께 하길 바랐다.

‘완전히 딸 바보가 딸 자랑하려고 만든 자리 같았지…….’

래빗은 귀찮아하면서도 수락했고, 오늘도 오찬을 함께 하는 모양이었다.

“황녀님 이렇게 얘기 나누는 김에 한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혹시 대마법사님은 어떤 사람이에요?”

“대마법사?”

래빗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더니 곧 입을 열었다.

“글쎄, 희한한 놈이었다. 갑쟈기 나타나서눈 널 돕겠다 했우니까.”

들어보니 래빗도 대마법사에 대해서는 크게 아는 게 없어 보였다.

래빗은 황성이 어수선하니 사절단이 돌아간 뒤에 자신의 성에 오라고 했고 나는 기꺼이 휴가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래빗은 너무 바빠서 내 저택에 놀러 오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만남을 조금 더 뒤로 미뤘다.

그래도 한 3일 뒤에 사절단이 돌아간다고 하니, 다시 볼 날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래빗과 통화를 끝내고 그날 오후. 곧 저택으로 반가운 손님이 도착하기로 했다. 바로 리제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

시간상으로 한 달 정도 다녀온 거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 떠나 있다가 돌아온 기분이니.

나는 테라스 앞에 기대 다리를 흔들면서 난간 아래를 보았다. 저 멀리 정문이 훤히 보이니 리제의 마차가 한눈에 보일 거다.

“리제는 언제 오려나.”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눈앞으로 연한 실타래가 살랑 움직였다.

‘실타래?’

웬 실타래지?

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것을 만졌다. 몹시도 부드러웠다. 백금색의 실타래였다.

한창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난 움찔했다.

……실타래에서 체온이 느껴졌으니까.

“어라.”

곧 허공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치고는 청량하지만 졸린 기운이 서린 목소리.

“내가 보여요?”

곧 눈앞으로 새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한들한들 흔들리는, 실타래라 생각했던 것은 백금색 머리카락이었다.

한 뼘이나 될까 싶은 거리에 남자가 둥실 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이 사람, 얼굴이 낯익은데?’

대단한 미남이었다. 거기다 내 취향!

그래, 그럼 누구겠는가. 내가 모았던 초상화의 남자 중 하나다.

‘그리고 상황을 미루어 추측해 보자면…….’

“……대마법사?”

나는 중얼거리다 말고 황급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님?”

남자가 내 앞에 둥실 떠 있는 채로 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나붓하게 웃었다.

아니, 웃었다기보다는 그냥 눈을 살짝 휜 느낌?

“일단 그렇게 불리긴 한데…….”

날카로운 눈매지만, 졸린 것처럼 눈을 반쯤 감은 상태라 본래의 날카로움이 반도 채 살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네?”

“어떻게 알았지?”

살랑살랑 움직이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으려니, 이 상황이 실감 나기는커녕 나도 남자의 나른함에 같이 잠길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이렇게 거리가 가까운 점이 전혀 실감나지 않았단 소리다.

“당신은 내 투명 마법, 어떻게 알아봤어?”

이 남자의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적였다. 분명 리제인가 래빗이 한번은 알려준 것 같은데.

‘아.’

발데르. 그래, 발데르였다. 이 남자의 이름.

발데르 혼 다미야. 제국의 대마법사.

난 얼른 팔목을 바라봤다. 항상 차고 있기에 종종 차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먹을 정도로 한 몸이 된 나의 아이템, 주연을 알려주는 팔찌 ‘사이렌 오더’.

‘……어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대마법사도 남자주인공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는데?’

주연을 알려주는 팔찌는 놀랍게도 아무런 빛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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