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9)
“……협조해달라는 건가요?”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라는 것, 그런 거야 아주 많지. 궁금한 것도 아주 많다.
“아까는 횡설수설하긴 했는데, 있긴 있어요. 다만, 일단은 좀 더 정리해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대마법사는 내 말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말 연애를 하자는 거라도 좋고요.”
이렇게 덧붙이면서.
거기서 나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남주는 능글한 남자인가보다.
* * *
“달린!”
다행이랄지. 내가 지하 묘지에 갇혀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내게 쪼르르 달려온 리제의 손에 잡혀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대마법사는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또 만나요. 언제, 어디서든.’
‘…어디서든요?’
‘마법의 가장 편리한 장점이죠. 어디든 당신 눈앞에 나타날 수 있으니까.’
대마법사와는 다음 약속을 잡기는 했는데, 그게 조금 찝찝하긴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또 내 방 테라스에서 나타나겠다는 소리인가 싶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리제의 품에는 다양한 물건이 잔뜩 안겨 있었다.
경매장에서 구매한 물건이라는데, 이것보다 더 큰 물건은 이미 집으로 먼저 보냈다나?
“그 팔찌 되게 신기하게 생겼다.”
“그치? 이 팔찌는 200년 전에 영웅이 사용했던 팔찌래. 당시에 함께 다니던 신비한 힘을 가진 여우가 물어온 팔찌라나?”
“……그래?”
리제는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리제,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어?”
“응? 으음,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알기로 리제는 소소한 취미들을 즐겼다. 직접 쿠키를 굽는다거나 다도라거나. 허브도 직접 키운댔나?
하지만 이 안에 이런 보석이나 마법 도구를 수집하는 취미는 없었다.
“취미라기보다는 일에 쓰려고 하는 거니까.”
“일?”
“응. 아, 맞아. 달린, 넌 세 달 전에 크게 아픈 뒤로 기억이 불안정했지……? 내가 종종 까먹는다니까. 내가 남몰래 상단을 하나 돕고 있잖아.”
상단?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리제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께는 비밀이야.”
“으응.”
지금이라면 다른 것을 물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저, 리제, 있잖아. 갑자기 생각난 거지만 혹시 내가 북부로 떠날 때 나한테 줬던 보고서 같은 거 기억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적혀있던 거.”
“응? 응! 기억나지. 내가 달린을 위해 손수 만든 건걸!”
“혹시 거기에 있는 이야기들…… 다 어떻게 알았어? 엄청 도움이 됐었거든.”
“아, 정말?”
도움이 됐단 말에 리제가 손뼉을 치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여기서 리제가 북부의 기밀까지 알고 있던 이유를 알게 되는 걸까?
“으음, 그 안에 내가 아는 북부 이야기나 주변에서 들었던 것들을 정리해서 넣기는 했는데…… 몇몇 더 자세한 이야기들은 내가 도와주고 있는 상단의 상단주님의 도움을 받았어!”
“상단주님?”
“응. 아주 유능하거든.”
“혹시 그 상단의 이름을 물어봐도 돼?”
“‘카사블란’이란 상단이야.”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실제로 북부의 기밀에 속한 자료나 정보들은 모두 그 ‘상단주’라는 인물이 제공한 것 같았다.
그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 익숙한 이름인가 하고, 하지만 당장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기야, 래빗이나 휴고를 처음 볼 때도 바로 책 속의 인물임을 떠올리지 못했던 나였다.
‘한번 차분히 기억을 뒤져봐야겠다. 혹시나 내가 읽은 책이랑 관련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쨌거나 리제에게 무언가 큰 비밀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내 예상이 어느 정도 벗어난 셈이었다.
“그보다 달린, 달린. 이번에 가을맞이 무도회에 너도 나올 거야? 추수제 말이야!”
“아, 추수제?”
“그래. 이번에 폐하께서 더욱 크게 여신다고 했나 봐.”
그 말에 나는 래빗을 만났던, 거대한 무도회를 떠올렸다. 신기하긴 했지.
다만 래빗을 쫓아가느라 무도회를 거의 즐기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에 서부와 남부, 북부 귀족들까지 모두 모이려나 봐.”
“……북부?”
“아, 으응. 거기도…….”
리제가 말하려다가 말고 멈칫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공통된 인물을 떠올린 탓이었다.
‘휴고도 무도회에 온다고?’
나는 잠시 난감해져서 웃었지만, 곧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리제는 무도회에 함께 가겠느냐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악녀 후보를 찾아야 하는 참이었지.’
영애들이 잔뜩 모이는 자리라니, 그것만큼 좋은 자리가 또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집으로 도착했을 때,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리제, 내리지 마. 난 바로 들어갈게.”
“응, 정말 괜찮겠어?”
“당연하지. 저택이 코앞인걸.”
나는 리제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니면, 우리 오빠라도 불러줄까? 데려다주라고?”
“아니! 아냐아냐, 파올로 경은 한창 바쁜 시간이잖아!”
“바쁘긴, 곧 퇴근 시간…….”
“내 정신 좀 봐 달린, 먼저 갈게! 얼른 돌아가, 알았지?”
허둥지둥하는 리제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살짝 웃었다. 아 역시, 두 사람 사귀지만 않는 거라니까. 풋풋한 모습을 보니 기분 좋았다.
‘이러다 파올로가 먼저 약혼하겠네. 나야 기쁜 일이지만.’
나야 막 파혼하게 된 셈이니 한동안은 약혼이니 결혼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터였다.
‘흐응, 일단 들어가서 둑스나 불러볼까.’
나는 살짝 콧노래를 부르며 마굿간을 벗어났다. 그리고 막 정문에 가까이 갔을 때였다.
거대한 기둥 앞에서 누군가를 보았다.
난 걸음을 멈춰섰다.
기둥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몹시도 익숙했다.
아니, 모를 수가 있을까. 바람에 흩날리는 연한 은하늘빛 머리와 세로로 길쭉하고 탄탄한 장신.
“……황자님?”
눈앞에는 라이칸이 서 있었다.
내 부름에 저쪽에서도 나를 본 건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이지만 그의 얼굴로 긴장감이 스친 것도 같았다.
그의 손은 왜인지 연신 자리를 잡지 못하고 분주하게 손에 쥔 걸 주무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도 그럴 게 남자의 모습이 조금, 보기 힘든 모습이었으니까.
“……영애.”
거기다가 다소 멋쩍고 수줍은 표정으로. 손에는 아주 거대한 꽃다발을 안고 있는 채로.
이건 흡사, 프러포즈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다.
이와 동시에 지난번 라이칸의 고백이 머리를 스쳤다.
……이런.
참 이상하게도 그토록 간지럽던 고백이 아주 예전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이게 스킬의 영향이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요정놈이 나는 진짜 연애를 하지 못하게 하는 건가.’
얼굴을 보지 않으면, 신경쓰지 않으면 영영 의식하지 못할 뻔했음을 깨달았다.
짧은 분노가 치미고 또 삭히는 사이, 라이칸이 다가왔다. 평소보다는 조금 머뭇거리고 느린 걸음이었다.
“……몸은 괜찮은가?”
“네? 네. 엄, 저야 언제나 건강하죠. 건강 빼면 시체랄지.”
그러자 라이칸이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음, 건강을 장점으로 내세우기엔 이 남자 앞에서 기절을 참 많이 한 것 같긴 하다.
“그나저나 라이칸 황자님은 어쩐 일이세요?”
“……에스테 백작을 보러왔다.”
“아, 아버지를요? 그럼 이 꽃도 엄, 아버지 건가요?”
“그래. 이 꽃도…….”
음. 이 꽃다발이 내게 아니라, 아버지 병문안용 꽃이라고?
그러기엔 너무 큰데……?
라이칸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한 손으로 제 눈가를 문지르더니,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땐 결심이 단단하게 선 날카로운 얼굴이었다.
“아니, 실언했다. 사실, 그대를 찾아왔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직구로 훅 들어오니, 이건 이거대로 조금 곤란했던 탓이다.
눈 앞에서 내 취향의 얼굴이 딱 귀와 목만 빨개졌다.
얼굴은 여전히 살짝 그을린 듯 평온해서, 귀와 목을 보지 않으면 이 사람이 평소와 다를 바 없다고 느꼈을 뻔했다.
심지어 꽃다발을 쥔 손끝마저 빨갰다. 손끝이 살짝 진동한다.
“이것 또한, 그대 것이야…….”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꽃을 받았다.
꽃은 잘 모르지만 몇몇 종은 알 수 있었다. 음, 하얀 건 수국인 것 같은데? 하얀 수국?
“이거 수국, 엄, 수국 맞죠, 황자님?”
“푸른색 꽃은 델피늄이다.”
“아하.”
무슨 꽃다발이 이렇게 크고 무겁담? 얼마나 많이 꽃다발을 엮은 건지, 팔이 묵직했다.
내가 살짝 휘청거리자, 라이칸이 놀라 꽃을 다시 받았다.
그는 조금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그, 꽃을 주면 그대가 좋아할 거라고…….”
“누가요?”
“……여동생이.”
……그 황녀님은 본인도 전생에 제대로 된 연애도 안 해봤으면서 남에게 무슨 자신감으로 조언하셨대?
심지어 현생에선 아직 3살도 채 되지 않은 아기님 아니신가.
내 표정을 보았는지, 라이칸이 황급히 덧붙였다.
“그, 꽃은 많을수록 좋을 거라고도 조언했다.”
“누가요?”
“……형님이.”
아, 이건 확신할 수 있다. 그 황태자 놈은 분명 나 골탕 좀 먹여보려고 조언한 걸 거다. 낄낄 웃고 있을 낯이 안 봐도 선했다. 얄미운 작자 같으니.
“……부친께서도 모친께 꽃을 많이 선물했었다고 해서.”
“아하, 음, 폐하께선 낭만적인 분이셨군요.”
그렇게 의도치 않게 폭군의 연애사마저 듣게 됐다.
나는 라이칸에게 들린 꽃다발을 내 품 쪽으로 잡아당겼다. 라이칸의 손이 순순히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잘 받을게요, 황자님. 감사해요.”
나는 잠시 하늘을 보았다가 씩 웃었다.
“저 꽃다발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봐요.”
“그럼…….”
“네?”
“……다, 다른 것도 처음이 되어줄 수 있겠나?”
처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여성과의 데이트가 처음이니.”
“…….”
목과 귀만을 빨갛게 물들인, 표정만은 세상에서 제일 날카롭고 까칠한 남자가 말했다.
“그대가 내 처음이 되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