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71화 (171/281)

◈171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0)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엄, 엄. 머리로는 분명 지금 당장 할 일이 있으니, 거절하는 것이 마땅한데…….

막상 눈앞에서 목을 붉힌 채로 굳은 표정인 남자를 보자니, 거절의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여기서 거절하는 건 차린 밥상을 거절하는 것 같은데……. 아니, 그래.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 생각은 순전히 눈앞의 절경 같은 남자에게 홀린 탓이었다.

세상에, 내 취향인 건 알았지만…… 까칠한 얼굴로 날 향해 얼굴을 붉히는 남자라니, 이렇게 완벽한 모습이 또 어디 있냐고.

‘여기서 눈물까지 흘리면…… 더 취향…… 아니, 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가까스로 세 번째 이야기를 생각했다.

언제 또 메인 퀘스트가 나타날지 몰라.

또한 그 퀘스트 내용이 어떠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막상 튀어나왔는데 또 누구랑 연애라도 해보란 내용이어봐.’

라이칸에 민폐도 그런 민폐가 있겠는가. 나는 쓴 약을 삼키는 기분으로 입술을 열었다.

그래 진짜 너무너무 아쉽지만, 거절하자.

‘잠깐만.’

그 순간이었다. 끝내 거절의 말을 뱉지 못한 건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그러고 보니, 라이칸이 준 ‘보약’ 덕분에 목숨도 구하고, 두 번째 메인 퀘스트도 완수했잖아?’

그때 분명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돌아간다면, 라이칸의 소원을 하나 꼭 들어주겠다고.

이제 와서 모른 척 할 수도 있지만, 숫자로만 치면 나를 두 번이나 구한 약이었다.

더군다나…… 그 약을 구하러 갔다 뺨에 상처가 났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는 아물어진 뺨이었지만, 그 자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저, 황자님. 대답을 드리기 전에요, 혹시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무, 무엇이든지.”

“……왜 안 어울리게 말을 더듬으세요. 저도 어색해질 것 같잖아요. 크흠, 아무튼 간에 조금 안 어울리는 질문이긴 한데요. 혹시 황자님은 소원이 있으세요?”

“소원?”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이 한순간 풀렸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제게 바라는 소원이요.”

“……무엇이든지?”

“네. 무엇이든지. 아, 근데 야한 건 안 돼요. 아시죠?”

“무, 무례하다! 무슨 말을!”

“아, 당연히 농담이죠.”

방긋 웃자, 라이칸의 목이 더욱 빨개졌다. 아. 어떡하지. ……조금 재밌는데.

나는 크흠, 헛기침하며 간신히 참았다.

“혹시 이상한 생각하신 건 아니시죠?”

“안 했다! 아무튼 어떤 소원이나 가능하다고?”

“네.”

“그럼 역시…….”

“데이트 하는 거요?”

“……그래.”

라이칸이 끄덕였다. 그가 잠시 꽃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대가 받아주면 좋겠어. ……싫지 않다면.”

싫냐고 물으면 그건 아닌데.

“그럼 언제요? 오늘 당장이요?”

라이칸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그저 데이트 신청을 하러 온 것뿐이다. 이런 건 서신보다는 직접 전달하는 쪽이…… 크흠, 낭만적인 거라고 하여서.”

“그건 또 어느 분이 조언하셨나요?”

“……노아가.”

노아? 세상에, 3황자님요? 나는 3황자의 나이를 떠올리고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열댓 살 동생에게까지 조언을 받는 황자님이라니. 뭐랄까, 이 남자가 귀여워 보이면 안 될 것 같은데.

“좋아요.”

“……좋다고?”

“네. 사실 라이칸 황자님 소원을 하나 꼭 들어드리고 싶었거든요.”

그 말에 라이칸은 잠시 입을 달싹였다. 궁금한 것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가.”

“혹시 그럼 시간은 언제가 좋으세요?”

“오늘에서 일주일 뒤. ……그때가 좋을 것 같다.”

일주일 뒤, 날짜를 곱씹어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추수제 날이잖아?’

마차에서 리제에게 들었던 날짜였다.

조금 전 막 들었을뿐더러 같이 참석하자는 약속을 했기에 잊을 수가 없었다.

“추수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설마 그곳에 함께 가자고……?”

“정확히는 파트너지.”

이런 무도회는 남녀가 짝이 되어 들어가기도 한다. 로판의 규칙 아니겠는가?

나도 파올로와 함께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대가 그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면 좋겠어.”

내 처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리 이상할 것 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뺨을 매만졌다.

“저, 황자님 으음, 말을 번복하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은데요……. 그, 말씀해주신 건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현재 제국에서 내 처지를 생각하면 더욱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막 대공님과 파혼을 한 입장이고, 파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황자님과 함께 무도회에 입장하면 황자님 평판에도 좋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라이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이 사람이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닐 텐데, 정말 생각 못 한 모양이었다.

“아, 그건…… 이런, 사과하지.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어.”

“아니에요.”

“그래. 그대의 평판에 전혀 좋지 않은 일이지.”

나는 라이칸이 이대로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혹은 추수제가 아닌 다른 날짜를 잡아서 제안하거나.

그러나 잠시 생각에 빠지는 듯했던 라이칸은 도리어 고개를 들었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럼, 영애.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가?”

* * *

-일주일 뒤.

보통 제국에서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는 귀족 계층은 정해져 있었다. 수많은 귀족 전부가 참석할 수는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예외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가을에 열리는 ‘추수제’였다.

평소처럼 중앙에 거주하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드넓은 제국의 동쪽, 서쪽, 북쪽에서도 모든 주요 귀족을 포함해 지방 귀족들이 모두 모이는 축제.

다시 말해 래빗을 처음 만났던 무도회에서보다 사람이 훨씬, 정말 훨씬 많았다는 거다.

나는 그 무도회가 열리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와, 저 밑으로 보이는 사람만 봐도 아주 질릴 만큼 많던데.’

대체 안쪽엔 얼마나 많은 거야?

전생에서부터 사람이 많은 곳을 그리 즐기진 않았다. 아, 물론 로판의 꽃이라는 무도회가 싫지는 않은데……. 그거와 체질은 별개라고 할까.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조금 희게 질린 낯일지도 모르겠다.

눈앞으로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렸다.

“2황자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무도회장에 누구와 함께 오게 되었느냐. 보시다시피 라이칸과 함께 입장하게 되었다.

이제 와 라이칸에게 추문을 안겨줄 생각은 전혀 아니었고.

“황녀님과 황녀님의 유모 달린 에스테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라이칸의 제안은 이러했다.

‘그럼 내 여동생이 함께 하는 건?’

한 사람을 원 플러스 원으로 끼워 넣자!

그 사람의 이름을 듣고 나서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거절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설마 거기서 래빗의 이름을 말할 줄은 몰랐지.’

길게만 느껴지던 북부 생활에 조금 잊혀졌지만, 나는 래빗의 유모였다.

아직도 그 직위는 유효했다.

사람들은 유모와 함께 입장하는 것에 대해 별달리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이 나라 황자들이 모두 여동생 바보라는 사실이 이미 익히 알려진 터라, 라이칸과 함게 입장하는 것 또한 당연하게 느끼는 기색이었다.

‘아, 물론 이거 때문에 폭군이 노려보는 시선은 정말 무서웠지…….’

이뿐이랴, 래빗이랑 입장하지 못하게 됐다고, 황태자가 찾아와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물론 이를 알게 된 래빗이 가만있지 않았지만.

“롤린, 안색이 좋디 안타. 어디 아푼 고냐?”

“아뇨아뇨.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약간 현기증이 났나 봐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래빗의 손을 고쳐잡았다.

래빗은 함께 잡은 손을 슬쩍 보다가 볼을 살짝 물들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으윽 귀여워…….’

당장이라도 둑스를 소환해서 래빗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환해도 내 눈에만 보이고 만져진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구나저나, 이미 말했찌만 아쥬 놀랐다. 롤린, 네가 저놈이랑 파트너로 입쟝하려 하다니…….”

“외람되지만 정말로 롤린이라고 부르실 거예요? 이제 이름 좀 불러주세요.”

“저놈우로 괜찮운 고냐?”

내 말은 안 듣고 계신 건가.

“……그놈도 그 말을 듣고 있으니, 호칭을 좀 자제해주겠나?”

“오빠 네놈운 듣거나 말거나.”

“내가 딱히 못 해준 것 같진 않은데, 왜 태도가 늘 그런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군.”

“우리 롤린이룰 노리는 놈둘은 나한테 일단 다 파룜치한이다! 오빠 네놈도 예외눈 아니야.”

“…….”

래빗이 내 손을 잡은 채로 삐죽 눈을 세웠다.

나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나저나 사람이 많긴 정말 많네.’

무도회장을 둘러보다 말고 저 멀리서 리제를 발견했다. 내가 오늘 파올로와 입장하지 않아서 두 사람이 함께 입장했다고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파올로가 옆에 있다.

‘이야, 풋풋한데?’

나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꽤 익숙한 색을 본 것 같았지만, 다시 보면 어디에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했다.

추수제 무도회라고 해서 내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중앙에서는 춤을 추고 가장자리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소파 쪽에 모여 대화의 꽃을 피운 이들이 즐비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즐기지 못했던 무도회를 이제야 한번 느긋하게 보게 됐네.’

하지만 오늘이라고 그리 느긋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내겐 뚜렷한 목표가 있었으니까.

‘여기 어딘가에 악녀 후보가 있지 않을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