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1)
나는 한쪽에 잔뜩 모여있는 사람들을 면밀히 살폈다. 어디 보자, 내가 찾는 무리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람들을 틈틈이 보는 한편, 래빗에게 간식을 가져다주기도 하면서 시간이 꽤 흘렀다.
몇몇 이들이 나를 보며 수근대는 걸 보기도 했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그들의 입에서 ‘대공’하는 단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롤린, 조굼 피곤해 보인댜.”
“아, 그런가요?”
래빗이 나를 보며 살짝 찡그리더니, 함께 있던 라이칸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롤린이 지친 것 같운데, 잠시 밖에 산책하묜 좋울 것 같댜!”
“그래, 좋은 것 같군.”
“아, 저는 괜찮은데…….”
“안색이 조금 창백하다, 영애.”
라이칸의 말에 래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입술을 앙다물고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참고로 나눈 연약한 어린애라소 밤바람운 내게 위험하댜!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네?”
누가 연약해요……?
밤 정원에서 무시무시한 딸랑이를 겨누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러나 라이칸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래빗과 나를 후원 쪽으로 데려갔다.
래빗은 가던 길에 있던 테라스 앞에서 멈춰섰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로 돌아섰다.
“나눈 요기서 쉴 거다! 두 사람운 바람을 쐬고 와라.”
“네? 하지만 황녀님, 황녀님을 혼자 둘 수는…….”
“다녀오지.”
라이칸이 내 손을 이끌었다.
“롤린, 걱졍하지 마라. 아마 1분도 안 돼소 황태자 그놈이 이리로 올 거다.”
“아.”
그 사람이라면 가능하지. 나는 납득했다.
래빗이 내게 부탁해 허리를 숙이자, 그대로 내 귀에 속삭였다.
“나눈 네가 좋아하눈 사람이면 누구둔 다 좋댜. 기왕이면 모두 체험해바라!”
“……네? 체험?”
“구래! 대공 그놈운 아니라소 헤어진 고 아니냐? 물론 다른 일로 북부로 간 건 알지만, 혹시라도 사랑했다묜 사랑은 사랑으로 잊어라!”
엄, 그렇다기엔 사랑한 적도 없지만. 설명하기 애매한지라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아무리 환생자라지만, 3살 황녀님에게 받는 사랑 응원은 좀 묘한 기분인데.’
우리 래빗, 북부에서도 그렇고 어느새 어엿한 중매쟁이로 커버린 것 같다.
유모로서, 또 친구로서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고민을 해야 하는 부분인지 헷갈렸다.
어쨌거나 나는 라이칸과 함께 후원으로 향했다.
밤에 잠긴 후원은 은은한 불빛으로 인해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후, 확실히 나오니까 숨쉬기는 편하네.’
무도회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정말 사람이 많았다.
이러다 참여한 영애들을 다 볼 수나 있을지 싶은 인파였다.
‘언제 다 돌아보냐…….’
우리는 함께 걷다 말고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딱히 다리가 아파서는 아니었고, 정말 나도 모르게 멈춘 걸음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라이칸이 고요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나를 보고 있지만 어딘가 살짝 초점이 맞지 않는달지.
“라이칸 황자님?”
내 부름에 그의 눈으로 초점이 돌아왔다.
“아, 잠시. 그대를 처음 본 날과 이전 무도회에서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으음. 그날이라면…….”
내가 빙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렬한 흑역사를 찍던 날들 아니었나?
잊어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항상 그대를 볼 때마다 생각했지. ‘또 인사를 생략하는군.’ 하고.”
“…….”
라이칸이 순간 제 입술로 손을 가져가며 살짝 웃었다.
“언제쯤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려나 했어. 돌이켜보면 처음 볼 때부터 관심이 갔던 건가?”
……이런 예쁜 정원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반칙인데.
훅 들어오는 직구에 나는 눈을 굴렸다.
내가 무어라 답변하기 전에, 낯선 소리가 우리 사이를 갈랐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고요한 사위 덕에 남자의 목소리가 꽤 선명하게 들렸다.
‘소리?’
나는 라이칸을 보았다. 라이칸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요정의 팁! 새로운 ‘세 번째 소설’ 단서가 빙의자님 근처에 있어요! (❀╹◡╹)]
꽤 오랜만에 보는 요정의 창.
나는 잠시 고민하다 라이칸에게 손짓했다.
살금살금 나무쪽으로 다가가자, 라이칸은 이상하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를 얌전히 따라왔다.
“헤벤 공녀님, 약속이랑 다르지 않습니까?”
나무 뒤에서 공터를 발견했다. 티타임 장소인지 멋스러운 정자가 보였다.
나는 커다란 나무 뒤에 얼른 몸을 숨겼다. 바로 옆으로 라이칸이 주춤 날 쫓아 몸을 숙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세 번째 소설 단서라니.’
눈앞으로 두 남녀가 보였는데, 그들을 훑던 나는 헉, 숨을 삼켰다.
한쪽은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보아서는…… 초상화에서 봤던 것 같다.
‘맞네. 초상화에 저런 사람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달빛 아래 검갈색 머리칼이 선명하게 보였다.
자연히 남자의 앞에 있는 여인을 바라봤는데,
시리도록 달빛 아래 눈부신 적발의 여인이 화사한 얼굴을 드러냈다.
……헐. 존예.
입을 가로막은 나는 허벅지를 철썩철썩 내려쳤다. 와 대박.
‘눈 호강!’
예뻐도 너무 예쁘잖아?
제국에는 미남미녀가 참으로 많다. 이 때문에 남자주인공을 찾는데 고생을 하기도 했었지?
조금 전 무도회에서 드레스 미인들에 황홀하도록 눈 호강을 했음에도 한눈에 들어오는 미모였다.
잠정적으로 뭔가를 떠올린 나는 반대쪽 허벅지를 내려쳤다.
“어째서 내가 거절하면 안 된다는 거지?”
여성 쪽은 적발에 핏빛처럼 붉은색을 가졌다. 휴고랑은 다르게 좀 더 어두운 붉은색이다.
그 눈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흡사 내가 후회라도 할 것처럼 굴고 있네.”
예쁜 사람이 목소리도 예쁘다니. 두고두고 듣고 싶은 음성이다.
가녀리고 연약한 음성에 잠정적인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미 그대가 이렇게 말하긴 늦지 않았나? 내 마음은 확고해.”
“하지만 저는.”
“후작, 당신도 같은 마음이리라 생각했는데.”
여성이 남성을 향해 우아하게 찡그리며, 낮게 으르릉거렸다.
“그러게 내가 사랑할 때 그대도 최선을 다했어야지.”
“…….”
“이제 와 후회하나?”
심상치 않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침이 고였다.
이 순간 팝콘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대신 입을 가로막고 허벅지를 열심히 내려쳤다.
…어째, 대사가 로판 재질이다? 고인물의 명예를 걸고 확신해.
이거 누가 봐도 치정 싸움이잖아?
“웃기지도 않아.”
한 발짝 다가간 여성의 그림자가 남자의 그림자와 겹쳐졌다. 마법등불 아래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여성의 눈매는 고양이처럼 끝이 올라가 도도하고 앙칼진 느낌을 자아냈다.
‘……와 언니, 내 취향이시다…….’
부담스럽지 않게 부채로 남자의 턱 끝을 들어 올린 여성이 피식 작게 웃었다.
“그대에겐 내가 아까워.”
어느새 더, 더, 외치던 나는 눈에 눈물이 고일 기세로 뚫어져라 응시했다.
집중하던 그때였다.
[빙의자님이 새로운 ‘악녀’ 후보를 발견했습니다! ⁽⁽◝( ˙ ꒳ ˙ )◜⁾⁾]
부스럭. 옆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살짝 입술을 벌렸다.
‘아, 맞다. 라이칸도 함께 있었지.’
너무 집중했던 모양이었다.
머쓱한 마음에 살짝 웃고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저 사람이 악녀 후보라고?’
그나저나, 후보라니. 그럼 아직 새로운 여자주인공은 아니라는 건가?
‘일단 인상이나 태도는 완벽한 악녀 같은데…….’
거기다 칼리에 이어서 두 번째로 만나는 내 취향에 딱 부합하는 언니였다.
저 사람이 여자주인공이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친구 하고 싶다…….
[현재 ‘악녀’ 후보는 총 세 명입니다! 명단을 공개합니다!
1. 로잘린 헤벤
2. 달린 에스테(빙의자)
3. 리제 트리샤 ]
나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명단에 눈을 의심했다.
‘잠깐만, 잠깐만. 나는 왜 여기 있는데? 아니, 나는 둘째치고서…….’
우리 리제는 왜 여기 있는 거야?!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단이었다.
[후보는 어디까지나 후보일 뿐,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어요!]
찡그렸지만, 따질 새도 없이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약속을 잊은 겁니까?”
날카로운 남자의 목소리와 동시에 나는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앞에 있던 나뭇가지를 밟았다.
콰직!
꽤 큰 소리가 들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들킨 거 아냐?
그러나 웬일인지, 꽤 큰소리가 났음에도 두 남녀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라, 저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남성이 금방이라도 저 예쁜 악녀 후보 언니를 위협할 것 같았다.
‘그보다 이 소리가 안 들린 건가?’
라이칸이 내 옆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얼른 작게 속삭였다.
“황자님, 방금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은 걸까요?”
“그럴 거다. 이쪽엔 방음 결계가 쳐져 있을 테니.”
“방음 결계? 누가 쳐요?”
“내가.”
라이칸이 조금 까칠하지만 평소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필요한 거 아닌가?”
“어, 음 네…….”
대체 언제 친 거지.
라이칸 정도의 검사쯤 되면 마나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건 알았지만.
그의 센스에 감탄했다.
그사이 실랑이를 벌이던 남녀의 모습은 끝을 맺었다.
그 끝이란 화가 잔뜩 난 여성 쪽에서 분노를 퍼붓고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남성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머물다가 복잡한 낯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돌아섰다.
“……역시 그 대마법사 때문인가.”
뭣이라, 대마법사?
익숙한 호칭에 내 마음속에 굳은 생각이 하나 자리 잡았다.
‘아무래도 저 언니가 여러모로 새로운 여주인공이 맞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