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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73화 (173/281)

◈173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2)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돌리고서야 아차 싶었다. 라이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개의치않고 하고 싶었던 말을 먼저 꺼냈다.

“황자님! 혹시 방금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어, 아? 음, ……뭐라고 했나, 영애?”

“방금 두 사람이요!”

라이칸이 끙, 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나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그대는 어떻게 된 게…….’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장하다, 나.”

“뭐가 장하다는 거지?”

“아, 음. 아니에요. 그보다 방금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알고 있다. 한쪽은 헤벤 공녀고, 다른 한쪽은 이사야 후작이니.”

“공녀, 아니 공녀님요?”

라이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로 짙은 적발을 지닌 귀족은 이 제국에 헤벤 공작의 일족뿐이다. 그리고 공녀와 이사야 후작이 소꿉친구인 건 이미 꽤 알려진 사실이지.”

“아, 혹시 저 두 사람 연인이나 약혼 관계인가요?”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다.”

으음, 그렇단 말이지. 좋아. 저 언니에게 연인은 없단 거지.

어쩌면 ‘악녀’란 키워드를 준 건 악녀의 요건을 충족할 조건을 찾으면 완전한 여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일단 내가 악녀가 되기엔 완전 무리고.’

열심히 생각하는 동안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라이칸이 나를 아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언제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졌지?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자, 라이칸의 잘생긴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저 표정을 해석하자면 ‘이제야 나를 의식한 거냐?’ 하는 표정인 것 같은데.

“이사야 후작에 대해서는 왜 묻는 거지?”

“네?”

후작이라니. 내가 관심 있는 쪽은 그쪽이 아니라 악녀 언니 쪽인데.

그렇지만 그럼 왜 헤벤 공녀에게 관심이 있냔 질문을 받더라도 곤란한 건 매한가지였다.

“혹시 그대가 내 파트너 제안을 받아들인 건…… 여기까지 예상했기 때문인가?”

“네? 그럴 리가요!”

아무리 나라도 이걸 어떻게 예상해요. 나는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왜…… 이사야 후작에 대해 물은 건가?”

질문이 도돌이표다. 나는 끄응 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 남자 얼굴도 조금 가물가물한데.’

수집한 초상화에 있던 얼굴이니 잘생기긴 했다.

다만, 내가 여태까지 보았던 라이칸, 휴고, 대마법사 발데르가 차례대로 모아온 초상화 중에서도 몹시도 뛰어난 사람들이었던 탓에 이사야 후작이란 사람은 기억에 잘 남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눈매 때문에 아, 초상화에서 봤었지 떠오른 게 전부였다.

‘이런 걸 상대성 오징어 이론이라고 한다지…….’

그 많은 초상화 중에서도 가장 빼어났던 사람이 라이칸인데, 그런 남자를 눈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자, 잘생기셔서요?”

얼떨떨하게 급히 대답했더니, 라이칸이 미간을 찡그렸다.

“잘생겨서 다가갔다고? 잘 생겨서 누군지 물어본 거란 건가?”

“어, 음, 별다른 의도는 없고 그냥 어떤 분인지 궁금함 반, 조사차 반…….”

어째 라이칸의 표정이 ‘너 나랑 장난하려는 거냐?’ 하는 느낌었다.

“그, 슬쩍 봤는데 미남이시긴 하셨고, 그 앞에 계시던 공녀님도 미인이시…….”

“……내 질문의 의도를 정말 모르는 건가?”

일그러지는 표정이 꼭 재고할 가치도 없다 말하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좀 변명이 궁색하긴 했는데, 나라고 그냥 한 소리는 아닌걸.

“그렇지만, 전 라이칸 황자님을 처음 뵈었을 때도 너무 잘생기셔서 넋을 놓았는데요……?”

“…….”

우리의 첫 만남을 생각해보라. 라이칸 미모에 놀라 멍하게 입을 벌리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했다. 어찌나 열렬하게 쳐다봤는지 이쪽에서 오해도 했지 않았던가.

“그래서 황자님께서 제가 황자님을 좋아하는 줄 오해……하실 정도였잖아요.”

라이칸의 시선이 흔들렸다. 곧 시선을 피하는 게, 흡사 자신의 흑역사를 떠올린 사람의 표정이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살짝 삼켰다.

크흠, 이 남자가 자꾸만 귀여워 보이네. 갈수록 래빗이랑 비슷한 부분이 보여서인가?

“……물어본 내가 바보였다.”

“아뇨,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라이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달빛 아래에서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은하늘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아래, 살짝 그을린 듯한 얼굴이 몹시도 그윽했으니까. 순간 그 미모에 놀라 숨을 들이킬 정도로.

“영애도 나도 말장난은 여기까지로 하지.”

그가 조근조근 말했다.

“잘생긴 남자면 무조건 조사하겠다는 건가?”

……아. 잠시 잊고 있던 사실. 이 제국에는 미남미녀가 더럽게 많았다. 그래서 남주를 찾겠답시고 내 취향의 미남 초상화를 모았다가 후보가 너무 많아서 엉엉 울었던 적도 있지 않던가.

“당연히 그건 아니죠. 잘…… 생겼다고 전부 따라다니지는 않아요. 저만의 기준이 있어요.”

“기준?”

“네. 그냥 잘생기면 안 돼요. 아주아주 잘생겨야 하는데.”

“……하는데?”

“황자님처럼요?”

덧붙인 말에 라이칸이 미간을 찡그렸다.

나는 내가 또 말장난을 한다고 생각한 그가 화가 났나 싶었지만.

“내가 이, 이사야 후작보다…… 낫다는 소리인가?”

그의 목이 붉어진 게 보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말이 맞지?

“황자님이 훨씬 잘생기셨죠.”

그 순간 나는 어깨로 툭 와닿는 온도에 깜짝 놀랐다. 시선을 슬쩍 돌리니 라이칸이 내 어깨에 머리를 가져다 댄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마가 내 어깨에 채 닿지 못한 상태였지만, 온기가 절로 느껴졌다. 슬며시 내 팔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거면.”

“…….”

“그거면 됐다, 영애.”

라이칸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제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가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휙 돌렸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겠나?”

라이칸이 먼저 일어나더니 내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영애, 기억하기론 그대가 수도로 돌아왔을 때 내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하겠다고 했었지.”

“네, 맞아요.”

나는 고요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끄덕였다. 라이칸이 망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

“조금만 더 뒤에 들려줄 수 있겠나? 지금은 그대의 대답을 알 것 같다.”

알고 있다면 보류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나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의 말대로 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저는 괜찮지만, 그건 황자님께 더 좋지 않은 일 아닌가요?”

“아니, 내게는 기회가 되겠지. 그대에게 날 더 선보일 기회.”

그는 들어올린 손으로 뺨을 매만졌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잔뜩 어색한 모습이었다.

“……그, 그대를 유혹해 보일 거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혹시 그 대사, 래빗 황녀님이나 황태자 전하가 알려주셨어요……?”

“……아, 아니다!”

라이칸이 얼굴을 덮은 손바닥 아래로 씨근씨근 숨이 샜다. 귀를 살짝 덮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려서, 그 사이로 빨개진 귀가 보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동상인가 착각했을 것 같다.

“어, 황자님. 지금 부끄러워하시는 거죠?”

“그, 그것도 아니다!”

“그렇구나…….”

어느새 한여름처럼 확 달아오른 온도가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땐 상상도 못 한 이미지네.’

내 잘생겼다는 말에 이토록 반응하는 남자의 모습이라니.

미모를 봐도 지위를 봐도 그런 칭찬 수천 번을 들었을 것 같은 사람인데. 고마워하기보단 오히려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게 어울릴 사람.

“대답 보류에 그대도 동의한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아니,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다.”

라이칸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대가 날 좋아해 주면 좋겠어.”

그러고는 더는 이 얘기는 하지 말자며, 본인이 선을 그어버렸다. 별안간 유혹 선언에 이어 더는 아무 말도 못 하게 된 나는 뺨만 긁적였지만.

“하아, 일단 돌아가지.”

거기엔 나도 동의했다. 우선 회장으로 돌아가 악녀 언니랑 대화를 한번 해보고 싶었으니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 뭔가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요정의 창이라거나, 퀘스트라거나.

라이칸은 목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선 절대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화제를 바꿔 보았다.

“저, 라이칸 황자님, 다른 얘기지만 황자님은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으실 것 같은데. 지겹지 않으세요? 아니면 지겹도록 들으셨다거나?”

“……처음 만났을 때 영애처럼 직설적으로 뱉는 사람은 없었어.”

“그럼 제가 처음인 거군요?”

나는 슬쩍 시선을 올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첫 경험이구나.”

“……표현이 부적절하다!”

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이었는데, 하고 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괜히 머쓱해졌다.

‘하긴.’

흐트러진 소매나 옷깃, 반쯤 붉어진 귀를 한 남자와 나눌 단어는 아니었다.

“체감상으론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한참 산책했네요. 황녀님은 잘 계실까요?”

“아마 형님께서 그냥 두지 않으셨겠지.”

“괜찮을까요?”

소소한 대화는 이제 래빗의 이야기에 이르렀다. 내가 걱정을 내비쳤더니 라이칸도 동의했다. 래빗이 황태자를 좀 성가셔해야 말이지.

외양만 봐서는 황태자가 래빗을 돌봐야 할 것 같은데, 황태자와 시간을 보내고 난 뒤의 래빗은 꼭 주말 내내 독박 육아를 한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얼른 가서 구해드려야겠다.’

우리 황녀님 덕분에 정원 산책을 하면서 악녀 후보도 만났으니 잘해드려야지.

“가끔 그대를 보면 누가 상전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가 있어.”

“네? 아하하하. 제가 너무 예의가 없었나 봐요.”

“아니, 그건 아니야. 지금 이대로가 싫지 않다는 거야.”

마침내 불빛이 어른거리는 연회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 라이칸이 몸을 슬쩍 돌리며 중얼거렸다.

“앞으로도 그대가 나를 마음껏 휘둘러주었으면 좋겠어. 얼마든지 생을 내줄 테니.”

“…….”

정원에서와 다르게 담백하게 말한 그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에스코트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그대의 눈에 내가 가장 잘생겨 보였으면 좋겠군.”

잔잔한 수줍음이 담긴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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