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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을 모르면 죽습니다-175화 (175/281)

◈175화. 3. 대마법사와 악녀 메이커 (14)

“뭐?”

잘 들리지 않아 귀를 기울였더니, 리제가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아니. 혼잣말이었어. 그보다 2황자 전하랑 정말 뭔가 있긴 한 거야? 넌 어때? 달린 넌 분명 음, 그분의 초상화를 제일 황홀한 표정으로 봤던 것 같은데…….”

“아.”

그랬던 적이 있었지?

“난 2황자님 때문에 네 약혼이 금방 끝을 맞이한 줄 알았어.”

리제는 내가 왜 과거 초상화 중에 으뜸으로 꼽았던 라이칸이 아니라,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사야 후작에 대해 물었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하기야, 궁금하기도 하겠다.

‘리제는 내가 북부에 잘 적응할 수 있게 선물도 줬는데, 이 정도는 얘기해도 되겠지?’

리제에게 무어라 설명하려 입을 떼어내려 하는데, 그보다 먼저 누군가 탁 소리를 내며 우리의 신경을 끌었다.

“세상에, 에스테 영애?”

고개를 돌리자 진한 갈색 머리칼을 가진 영애가 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한동안 계속 아프셨다고 들었어요. 이제 몸은 괜찮으신 거예요?”

“네? 네…. 염려해주신 덕분에요.”

옆구리를 콕콕 찌른 리제가 ‘산테 남작 첫째 딸’이라고 알려주었다.

속닥속닥 내게 저 사람은 누구고 저 사람은 누구니, 시키지 않아도 속삭여주는 리제는 정말 착하고 설명 잘하는 전형적인 조연처럼 느꼈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싹 숨기고 얼른 미소 지었다.

“산테 남작 영애께서도 잘 지내셨나요? 제 예법이 서툴고 어색해도 이해해주세요. 간만에 나와서…….”

“아아…….”

그러자 주변에서 대화를 나누던 영애들이 동시에 나를 응시했다.

일순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에 난 당황했다.

‘왜, 왜 다들 이렇게 쳐다보는 거지?’

나는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모를 때는 일단 웃자.

이어서 말을 건 사람은 조금 전까지 말한 산테 남작 영애가 아니었다.

“저런, 영애……. 괜찮으신가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음성을 찾아 고개를 돌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에는 눈이 확 뜨일 정도로 눈부시고 화려한 미녀가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세상에, 악녀 후보 언니잖아?’

와. 악녀 언니가 말을 걸어주셨어.

샹들리에 아래에서 더욱 환한 빛을 품은 머리칼은 꼭 금이라도 칠한 듯 반짝였다.

장밋빛으로 물든 뺨은 꼭 봄에 가장 먼저 싹을 틔운 새순같이 싱그러웠다.

하지만 날 응시한 붉은색 눈동자는 뾰족한 눈매와 다르게 어른스러웠다.

“어, 음…….”

“아, 갑자기 말을 걸어 놀라셨나요?”

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누추한 빙의자에게 귀한 세 번째 이야기 주인공이,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자 내 행동이 웃겼는지 이 언니가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사뭇 우아하고도 아름다웠다.

“저런, 몸이 약한 영애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소문으로 접한 영애의 소식은 저도 알고 있어……. 나는 로잘린 헤벤이에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이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사교계 파티 자리 어딘가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다시 본인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건 만난 횟수 자체는 매우 적다는 거고.

그렇다면 과거 내가 빙의하기 전에 한번쯤 스치듯 인사를 나눠본 적 있겠구나, 라고 나는 판단했다.

“달린 에스테예요.”

가까이서 보니 살짝 표독스러운 느낌이 있어서 무서운 느낌도 있긴 한데…… 눈매만 제외하면 미모만으로 여주인공을 너끈히 할 것 같은 영애였다.

‘실제로도 이번 이야기 주인공 후보지만 말이지.’

아니, 주인공이 맞을 거다. 난 확신해.

로잘린, 이름도 꼭 여주 같은 여주 언니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녀의 웃음이 진해졌다.

“오랜만이에요, 리제 양.”

“네. 오랜만이에요.”

리제가 언제나처럼 강아지같이 귀여운 미소로 대꾸했다.

평소보다 살짝 밝은 목소리였지만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꾸며 낸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오늘은 에스테 영애와 함께 오셨네요.”

“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니까요.”

흘끗 리제의 얼굴을 보았지만 평소와 같은 귀여운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상기된 표정.

그 순간 공녀 언니가 눈을 설핏 찡그렸다.

난 금세 날카로워진 인상에 움찔하며 눈을 깔았다.

‘갑자기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어쩐지 나를 바라보며 저쪽이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실수했나? 끙 신음을 흘리는데, 헤벤 공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테 영애, 혹시 오늘 정원 쪽으로 나가신 적이 있나요?”

“네?”

정원이라면…… 라이칸과 나갔던 장소를 떠올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이 사람이 확신하고 묻는 듯한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곧 그녀가 내 쪽으로 손을 휙 들어 뻗었다. 주변에서 숨을 삼켰다.

“이런, 손을 뻗어도 놀라지 않으시네요.”

공녀 언니의 손에는 작은 나뭇잎이 들려 있었다.

아주 작은 데다 하필 머리 장식도 녹색이라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영애의 귀여움을 알아보고서 붙은 거려나요. 황성 후원에만 있는 리키큘런스 잎이네요.”

“아…… 조금 전에 산책을 갔었는데, 으음, 그때 붙었나 봐요.”

성실히 대답을 하는데, 어째 날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아니, 꽤 살벌하다고 해야 하나.’

거기다 나만 이런 걸 느끼는 건지, 주변은 생긋생긋 웃는 사람뿐이었다.

“아, 라타냐 영애! 안녕하세요?”

기묘한 긴장감은 리제의 외침에 사그라들었다.

리제는 한 영애를 향해 수줍게 손을 흔들고 있었고, 그 인사를 받은 사람은 아주 아름다운 영애였다.

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내가 이사야 후작과의 일을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몰래 지켜볼 때는 분명 들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리제, 참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구나.

그런데 왜 친구는 나밖에 없다고 한 거니.

뿌듯한 마음 반, 조금 질투 나는 마음 반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데, 마침 공녀 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을 부르는 한 영식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아주 예쁘지만 살벌한 얼굴로.

영식 무리에는 한 영애가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여쁜 얼굴이지만 공녀 언니랑은 반대되는 청순한 인상이었다.

곧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상체를 숙인 공녀 언니가 영식 사이에 있던 영애의 귀 쪽으로 입을 가져다 대곤 무어라 말을 했다.

응? 귓속말이 이어지는 듯한데, 어쩐지 갈수록 분위기가 더욱 살벌해지는 느낌이었다.

“달린, 달린.”

어느새 리제가 내 손을 잡고 살짝 잡아당겼다.

“우리 자리를 피할까?”

“왜?”

속삭임에 속삭임으로 얼른 답했더니, 리제가 빠르게 말했다.

“저 영애, 이사야 후작의 가장 최근 애인이야.”

아. 치정이구나.

사교계 암투라도 보는 줄 알았더니, 그보다 더한 삼각 치정을 지켜보는 중이었던 거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숨죽인 영애들이 부채를 연신 팔락거리며 기대 어린 표정으로 저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음, 네x트 판이라도 지켜보는 눈들이네.’

어째 다들 팝콘을 쥐어 주어야 할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음, 보통 이 순간에 전 약혼자의 최근 애인에게 속삭일 말이라면…… ‘그 남자는 내가 버렸어, 넌 내가 버린 쓰레기나 잘 챙겨가.’ 아니면… ‘나대지 마.’ 뭐 이런 얘기일까?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데, 빙글 몸을 돌린 공녀 언니가 내게로 다가왔다. 아니, 왜 여기로 다시 오세요?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아 금방이었다.

내 앞에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며 영애들은 제 얘기를 이어가거나 재밌다는 듯 구경했다.

저 언니가 굉장한 기세로 쳐다보는데 어, 어떡해?

난 황급히 리제를 보았지만, 리제 또한 예상치 못한 일인지 나와 마찬가지로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에스테 영애.”

“네, 공녀님. 어,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시라도…….”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상대는 대꾸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니다, 무서워하지 말고 이참에 이 공녀 언니랑 좀 친해져 봐?’

가장 유력한 주인공 후보였다. 난 이 사람이 주인공이 아마 맞을 거라고 강력하게 확신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가까워져서 나쁠 건 없었다.

그때였다.

탁, 둔탁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부채를 바라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공녀 언니의 부채였다.

“이런, 내 부채가 여기 떨어졌네요?”

뭐야, 주워달라는 건가?

아니, 설마 나 혹시 이번 세 번째 이야기에선 무자비하게 수치사를 겪는 조연 역할이었던 거야……?

[빙고!]

뭐야?

나는 화들짝 놀라 허공을 바라봤다. 요정의 창이 빠르게 움직였다.

진짜? 내가 여기서 수치사를 겪는 게 정해져 있었다고?

농담입니다 ^ㅁ^]

……이 XX가?

[삐비빅! 곧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 주인공이 지정됩니다. (⑅´•⌔•`)*✲゚*。]

화를 낼 새도 없이 창 속의 내용이 휙휙 바뀌었다.

조금 정신없다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지금 막 새로운 세 번째 이야기 주인공 ‘악녀’가 정해졌습니다!]

퍼엉! 내 귀로 폭죽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훽 돌렸지만, 그 어디에도 폭죽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 놀라거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사람들. 나만 들은 소리인 것 같았다.

[축하합니다! 빙의자님은 주인공 ‘악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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